스타트업의 피벗에 대하여
춘배의 목표는 명확하며 의지는 불타고 있었다. 춘배는 예쁜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의욕에 찬 춘배는 결연히 일어나 집 근처 번화가에 찾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눈에 띄는대로 여성들의 전화번호를 묻기 시작했다. 한번에 성공할리는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도를 반복하면 언젠가는 목표를 이룰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계획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주일간 매일같이 전화번호를 물어보며 거리를 방황해도 호의적으로 답해주는 상대는 없었다. 춘배는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원인을 분석해봤다. 그리고 하나의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집 근처 여자들은 내 스타일을 안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다른 동네로 가서 반복해야겠다!"
그리고 춘배는 강남으로 갔다. 그 다음주는 홍대, 그리고 그 다음은 건대, 그리고 이태원에 가로수길까지...
서울의 온갖 번화가를 돌아다녀도 결과는 동일했다. 하지만 춘배의 마음은 꺽이지 않는다. 다음주에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되니까.
그런 춘배는 본인이 못생겼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은 사실 스타트업 이야기다. 내가 봤을 때 많은 스타트업들이 초기 고객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춘배가 번화가들을 바꿔가며 찾아가는 방식과 다름이 없다. 본인의 얼굴이, 그러니까 제품/서비스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은데 피벗을 아무리 해봐야 소용있을리가 없다.
사실 좀 더 따져보면 춘배의 상황보다 스타트업이 더 어려운점도 있다. 춘배는 자기를 좋아해주는 단 한명의 여성만 찾으면 된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고객이 있다/없다로 양분되는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고객이 있는지, 그 고객들이 우리 서비스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반복해서 사용하는지, 얼마나 주변인에게 소개하는지 등 다양한 요소가 뒤섞여 스팩트럼을 이루게 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한 스타트업의 대표인데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피벗을 해야할까? 제품을 개선에 집중해야 할까?
상황 1. 런칭과 동시에 사용자가 몰려서 매달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 쯤에서 성장세가 꺽여 정체되었다. 매출이 여전히 조금씩 늘고는 있지만 이대로라면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 것도 몇년 뒤의 이야기가 된다.
상황 2. 국내에서는 매달 그럭저럭한 수준의 성장이 일어나고 있다. 더 빠르게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이게 왠일인지 인도에서 엄청난 트레픽이 몰려오고 있다. 이 기세라면 조만간에 한국 사용자의 수를 넘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위 상황들은 애초에 정답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초기 스타트업이 마주하는 상황들이 얼마나 불명확하고 모호한지 알려주는 예시를 들었을 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걸까?
나는 초기 스타트업이 유저 인터뷰를 훨씬 더 많이 진행해보기를 권한다. 춘배가 좀 더 용기를 내서 왜 본인을 거절했는지 물어봤다면 본인이 처한 상황을 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는 대신 피부 관리를 하고 옷을 더 말끔하게 입었다면 목표한 바를 더 빨리 이뤘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초기 스타트업도 고객이 우리를 떠나가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은 제품이 문제지만 마케팅 메시지, 운영 방식 등이 문제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춘배가 거울 앞에 서서 본인 외모를 점검해볼 시간을 갖지 못한 건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가 못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외면했기 때문에 외모를 가꿀 기회도 갖지 못한 것이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의 제품/서비스는 창업자의 자식같은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다. 본인의 제품/서비스가 어쩌면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존심을 지키려고 사업을 하는게 아니니까 어려운 순간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마치며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춘배로 정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과 이름이 겹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명으로 춘배를 쓰고 계시는 분이 이 글을 보고 불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