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들
- 이 글은 혼자 살고있을 당시 썼던 과거의 일기이다. 외로움 투병일기의 시작점과 비슷하다.
#
삐비 빅-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며 노래를 불렀다. 짧은 음악이 끝나자 또다시 작은 방안이 조용해졌다. 혼다 산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제 때 빨래를 널지 않아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의무감이나 양심, 일말의 책임감 등이 나를 등 떠밀어 세탁기 앞으로 보내지 않는 한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서 제대로 말리지 않은 빨래에 곰팡이가 서식하는 정도의 변화라면 모르겠지만.
#
나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혼자 있다 보면 필수 불가결하게 외로워진다. 고심 끝에 달아놓은 꽃무늬 커튼도, 아이유 포토카드도, 꺼져있는 바보상자도 내가 건드리기 전까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온통 무생물 투성이인 방안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나 하나라는 사실이 때때로 무서워진다.
#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 하늘이 청량하고 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는데 이 풍경을 혼자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아깝다.
밥 먹고 설거지를 잔뜩 쌓아둔 채 이불속에서 보는 영화 한 편은 너무 아늑하고 편안하다. 고요함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혼자 산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
그저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H와 연락을 안 한 지 3일째였다. 다툼의 원인은 단순했다. 빨간 날에만 쉬는 나와 빨간 날이 아닌 날에도 쉬기 어려웠던 H와의 데이트는 원활 할리가 없었다. H는 내게 조금만 믿고 기다려달라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맛있는 요리를 해 먹고 재밌는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보니 혼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H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하고 머리가 맑아졌다.
#
설거지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나 보고 있었는데 H에게서 문자가 왔다. 조금의 대화 끝에 H는 '그래 그만 만나자'라고 끝맺음했다. 나는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읽씹 했다. 괜히 찜찜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혼자 있는 게 행복했는데 순식간에 기분이 바뀔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생각하고 있었던 이별이었고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별이었다. 나를 붙잡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 이 찜찜한 기분은 무어란 말인가. 사랑이 식은 건 꽤 오래전부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걸까. 아직 H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 서운함에 가려져 있던 건 아닐까? 이토록 정이 깊었던가.
불현듯 부엌 쪽을 바라보니 아직 버리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눈에 띄었다. 버리려고 했는데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찜찜했던 건 버리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 때문이었나 보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무언가 하려고 마음먹어 놓고 잊어버린 채 시간이 흘렀을 때의 그 찜찜함. 아마 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