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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린 Aug 03. 2021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feat. 가을방학)


정세랑 소설가의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언제나 가을방학의 노래를 전곡 반복으로 틀어둔다.
두 예술가의 궁합이 엄청나게 좋다. 경쾌하고 발랄하지만 마냥 명랑하지만은 않은 정세랑 소설가의 글은, 가을방학의 노래를 마치 글로 풀어 써낸 것만 같다. 어쩐지 소설의 제목이 노래 가사들과 연결되는 것도 같고, 노래를 들으면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지나가기도 한다.
둘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탁하지 않은 초록색.

그래서 이 서평은 단편 하나하나에 가을방학의 노래를 엮어 써 보려고 한다.





1. 웨딩드레스44


뭔가 잘못됐어, 뭔가 잘못됐어. 그치만 어쩐지 난 이 상황에 말을 하지 못하네.
최악의 상처는 왜 꼭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나. 더 좋아할 수록 더 비참하게 지게 되어 있었네.

가을방학 - 아픈 건 이쪽인데요



 몇년 전, 서울 외곽의 한 회사에서 근무를 할 때였다.

친한 언니가 청첩장을 준다고 모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왔기에 나는 잔업을 마치고 부랴부랴 퇴근을 했다.

사당역의 한 밥집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과 언니들 그리고 예비 신랑 분은 이미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걸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눈인사와 함께 내가 "안녕하세요." 첫 마디를 떼자, 그 남자는 내 면전에서 픽, 웃음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한 눈으로 그와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는 내게 그 사람은

"얼굴이랑 옷은 러블리한데 목소리는 무슨 남자 목소리처럼 낮네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 날 어떻게 식사를 했는지, 어떤 말을 하고 들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청첩장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받자마자 가방에 넣어버렸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잘 들어가고 있냐는 카톡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생각하는 동안 언니는 벌써 미안하다는 말까지 보냈다.

잘못한 건 그쪽인데 왜 언니가 사과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썼다 지웠다 몇 번을 고민하다 마침내 답장을 했다. 언니는 그 남자에게 너무 과분한 사람인 것 같은데 정말 그 결혼 괜찮겠느냐고.

언니는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예쁜 친구들이 많아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서 도가 지나쳤던 것 같아]라며 내게 이해를 구했다.

슬펐다. 뭐가 슬픈지 정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그냥 슬펐다.

나는 언니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주었다. 알겠다고, 괜찮다고, 결혼 준비 잘 하라고, 결혼식에서 보자고.

안심한 언니가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는 걸로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그녀의 결혼식에 다녀왔지만, 더이상 그녀와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 슬픔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언니가 서글펐던 것이다.

결혼이란 내가 낳지도 않은 남자때문에 사과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이구나.

그리고 그건 너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사회가 슬슬 압박을 주는 나이임에도 나는 결혼한 내 모습이 좀체 상상되지 않는다.

결혼은 아직 내게.. 무서운 영역이다.

내가 한 선택을 오롯이 나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결심인지 도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내 선택을 후회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주체할 수없이 밀려들면 어떻게 하지? 누굴 원망해야 해?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결혼한 거잖아.. 연인처럼 쉽게 무를 수 있는 관계도 아니고. 게다가 만약 아이까지 생겼다면?

휴...


사실 주변에는 '저렇게 산다는 보장만 있으면 나도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이면은 내가 모르는 거니까. 행복해 보이는 SNS 사진 밖으로 시월드가 펼쳐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또 덜컥 겁이 난다.

뭐 언젠가는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눈과 귀를 멀어버리게 만드는 사랑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물웨딩드레스44의 모든 신부가 다 불행해 보이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몇 번째 신부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비 남편과 죽이 아주 잘 맞는 신부의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인생의 이른 시점에 시행착오도 거의 없이 본인과 취향과 결이 꼭맞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

반면에 자기 결혼식 드레스 고르는 일까지 시부모의 간섭을 받는 신부도 있었다.

결혼이란 건 이처럼 모든 단계에 복불복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운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좋은 패를 고를 자신이 없다. 언제나 남자 보는 안목도 없는 편이었고.

책을 읽으면서 문득 친구들이 흘러가며 했던 말들이 밀물처럼 돌아와 이해되기 시작했다.

결혼이란 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괜찮은 며느리인지, 얼마나 좋은 아내인지 자꾸 점수를 매기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본문의 말을 빌리자면)


"굴욕적이야."



독자들이 꼽은 <웨딩드레스 44> 올타임 넘버원 부분







2. 효진


어느 3월의 주말에 그녀는 내게 정말 말씀 많이 들었다면서 묘한 웃음을 짓고
갑자기 내 얼굴엔 눈부신 조명이 비춘다.

가을방학 - 여배우



<블린>


 너도 알겠지만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야. 슬픈 기억이라든지 잊고 싶은 것들은 빨리 지워내고 영원히 담아두고 싶은 추억만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더니 너는 그게 부럽다고 했었어. 어떻게 그게 조절가능한 거냐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이야.
우리가 졸업한 고등학교에는  구름다리가 있었지. 구름다리를 사이로 저쪽은 남학생들이 쓰는 건물이었고 이쪽 건물엔 여학생들 반만 있었어. 그래서 문학적인 친구들은 그걸 오작교라고 부르더라. 괜찮은 작명이라고 생각했어.  춘향이와 몽룡이가 만난 남원의 광한루에도 오작교라는 다리가 있잖아, 그것도 견우직녀 일화에서   이름이래.  구름 다리를 사이로 얼마나 많은 춘향이와 몽룡이가 생겨났는지는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름이 그러면 무슨 낭만적인 사건이라도 일어날  같아서 괜히 좋았어.


다리를 건너기 직전 복도 왼쪽에 교무실이 있었거든. 각 반에서 한 서너명 정도씩? 매일 아침마다 어제 공부한 책을 층층이 쌓아서 교무실을 찾아야했지. 교무실을 한바퀴 돌면서 각각 선생님에게 사인을 받아야했던 거 혹시 기억나? 난 항상 네 뒤에 서서 같이 검사를 받았었는데. 우리는 귀찮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특권인 것처럼 부러워했다. 아마도 선생님들이 더 신경써 주시는 것 같아 보이니까 그랬나봐.

나는 그 시간이 좋았어. 거기서만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애를 볼 수 있었거든. 나는 계속해서 문쪽을 흘끔거리면서 내가 검사를 다 받기 전에 그 애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 애는 김정훈쌤인가? 김경훈쌤인가? 아무튼 훈으로 끝나는 영어 선생님네 반이었거든. 선생님은 이렇게 뾰족한 안경을 쓰곤 엄청 길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니시는 분이었는데 그 애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렇게 무서운 선생님의 목소리마저도 예뻐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 애 이름에는 울림소리가 많이 들어가 있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기지도 않아. 연락 한 번을 안 하면서 2년을 짝사랑했다니.
아니다, 방금 생각한 건데 말야. 내가 좋아했던 건 그 애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똑똑하고 리더십 있어보이는 어떤 남자애가 아니었을까? 내가 수학을 정~말 못하는데 그 애가 잘 해서 그게 부러웠는지도 모르고.

슬프게도 나는 대개의 소녀들이 그렇듯 동경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했어.


어떤 소설가가 그러더라, 짝사랑은 모멸감을 잘 견디는 사람만이 할 수 있대. 그 때의 나는 모멸감을 잘 견뎠었나봐. 그 애 좋아하는 걸 끝내기로 한 순간이 걔가 다른 여자애를 생각하면서 버즈의 노래를 불렀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으니까 말이야. 아마 계속 좋아했어도 내 차례는 오지 않았을 거야. 그 여자애 다음엔 내 친구를 좋아했다고 들었어. 누구냐고? 수연이. 너 수연이 별로 안 좋아했지? 알아. 대충 눈치채고 있었어.

어? 아 이거 <옥상에서 만나요>라는 정세랑 소설에 나오는 말이야. 응 재미있어, 너 애기들 키우느라 밤에 쓰러지듯 잠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도 궁금해? 그럼 주소 좀 알려줄래? 내가 보내줄게. 그냥 애들 재우고 맥주 한 캔 하면서 읽으면 되지.


야 우리 고등학생때 아파트 놀이터에서 밤에 몰래 술마시던 거 기억나냐? 시소에 앉아가지고. 네가 계속 소주 마셔보라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안 궁금하다고 한사코 거절했잖아. 끝까지 나는 입에도 안 대고 이렇게 너 마시는 것만 쳐다보면서 얘기나 들어주고. 아~ 너 그 때 술 왜마셨냐면 남자친구랑 헤어졌었어, 나는 네 전남친 걔 이름도 기억나. 그 여우 같은 자식이 환승했잖아 우 어쩌구 하는 여자애한테. 기억나지 이제? 아무튼 그 때 미성년자는 술 마시면 안된다고 한사코 거절하던 노잼 원리원칙주의자라 법대를 갔나봐 내가. 지금도 법공부 계속 하고 있고. 그 때는 그렇게 안 마신댔는데 지금은 술고래가 다 됐네. 정말 술 좀 끊어야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내가 아까 말한 그 소설. 그게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거든 그래서 생각났어. 뭐 이유가 따로 있겠냐 원래 나이를 먹는다는 건 차곡차곡 쌓인 추억을 들추면서 산다는 뜻이래. 어 애기 울어? 알겠어 얼른 가 봐. 나중에 너 사는 데로 놀러갈게. 그 때 보자. 주말 잘 쉬어.


뜬금없이 왜 전화통화 형식으로 감상문을 썼는지는 글을 읽은 사람만 알 수 있다. (뿌듯)







3. 알다시피, 은열


어쩌면 비극의 제1장일까요, 아님 장밋빛 미래를 향하나요.
그저 그대로 써내려가요. 이제 난 그대를 사랑하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어요.

가을방학 - 그대로, 그대로



이 책의 가장 끝 페이지에는 <작가의 말>이 적혀있다.
나는 보통 본문만 읽지 작가의 말은 읽지 않는 편인데, 이건 그런 보통의 소설이 아니니까. 이건 정세랑의 소설이니까. 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이런 글을 썼는지 궁금한. 다름아닌 정세랑의 책이니까 그것까지 읽어보았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은열'에 관한 모든 내용이 다 소설가의 상상이었다는 점이었다. 내심 은열이 역사 속 실존 인물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은열이 현존했던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아니면 이제 어디서도 은열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은열이 그리워지면 아쉬운 대로 이 소설을 여러번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음, 소설가가 본문에서 적었던 것처럼 한중일 아이돌 총출동 합작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왜냐면 나는 이제 은열을 알지 못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내가 속했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은 많은 무리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들도 행복했었느냐고.

만약 행복했다고 대답해주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그 밑에 세필로 '나도 그렇게 생각해(我如想之)'라고 덧글을 달아놓을텐데.







4. 보늬


지금 이순간 나는 알아, 왠지는 몰라 그냥 알아.
언젠가 너로 인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걸 알아.

가을방학 - 언젠가 너로 인해



중학교 때 동생이 명동엘 갔다가 돈을 빼앗기고 온 적이 있었다.

그 돈은 청바지 사겠다고 과자도 안 사먹고 용돈을 아껴 거의 두 달을 모은 것이었고. 

나보다 덩치 큰 내 동생이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집에서는 독재자처럼 큰소리치는 동생이 밖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화가났다.

나는 그 길로 동생 손을 잡고 명동으로 가서 곧장 그 무리를 찾아냈다. 그리곤 동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언니가 한 시간 안에 안 돌아오면 너는 그냥 집으로 가.


나는 그 여자애들 세 명 앞에 호기롭게 섰다.

내 동생 돈 빼앗아 간 거 내놔.

아 뭐래 라며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는 그 여자애들은 근처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상의는 배꼽 위로 짧게 올라와 있었고 치마도 앉으면 속옷이 보일 만큼 짧았다. 사실 좀 무서웠다. 나 때는 촌스러워서 실업계는 노는 애들이나 가는 줄 알았거든. 그래도 가서 말이나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걔들보다 키가 훨씬 커서였다.


나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는 걔들의 가방끈을 잡았다.
제일 대장처럼 보이는 애였는데 걔가 이렇게 팔을 휘저어 내 팔을 끊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 운동을 해서 힘이 좀 센 게 아니었다. 결국 걔는 나를 끊어내지 못했고 맘대로 해라 하더니 걷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끈을 잡고 그 애들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걔들이 떡볶이 집을 들어가면 나도 가서 그냥 옆에 앉았다. 그러다 나와서 골목길로 가면 가서도 또 그냥 서 있었다. 가방끈을 꼭 잡고서.

내동생 돈 내놔, 너네가 아까 가져갔잖아 내놔.

처음에는 발로 차고 밀고 욕하던 애들이 한 몇시간 그러고 따라다니니 질렸는지 가방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내 내 쪽으로 던졌다. 표정하나 안 바뀌고 땅에 떨어진 돈을 줍는 내게 무슨년 무슨년 욕을 해댔다.하지만 그런 욕들이 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는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 찾은 돈을 동생에게 주었다. 동생은 유행하던 청바지를 살 수 있었다.

내가 운이 좋았다는 걸 잘 안다. 걔들이 여자애들이 아니라 남자애들이었으면 정말 큰 일을 당했을 수도 있고, 무서운 친구들을 더 데려왔다면 죽도록 맞았을 수도 있었겠지. 근데 그 순간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그냥 동생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렸을 땐, 자매가 없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맨날 신발 하나 옷 한 벌로 그렇게 죽일 듯이 싸우는 게 너무 지겨웠기 때문이었다. 근데 지금은 자매가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친구가 많지 않은 내가 유일하게 기대는 게 내 동생들이니까.

이 소설을 읽고 새벽에 동생들 방문을 하나씩 차례로 열어보았다. 바쁘게 오르내리는 숨이불을 확인하고나서야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얘들이 없으면 난 어떻게 살지.





자매들의 언니라서 나는 어쩔 수없이 보연의 시선에서 글을 읽었지만, 나는 규진의 마음도 궁금했다.

그 쪽도 슬픈 건 매한가지였다.


누나한테 고백하려고 했는데. 처음 고백했던 스물 두 살 풋내기가 아니니까 어쩌면 지금의 나는 누나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건데.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사회가 누나에게 불안하라는 시선을 자꾸 보내오면 그 때 다시 고백하려고 했었는데. 그러면 누나가 '나를 선택하는' 실수를 어쩌면 해 줄 수도 있었는데..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 주변 최소 여섯명의 사람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보늬의 죽음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여러 모양의 슬픔이 있다. 그러나 끝까지 돌연사.net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건 규진이였다.







5. 해피 쿠키 이어


네 품에 안겨있으면 내 귓가에는 파도가 치네.
이토록 가까운데 우리 사이 부는 아득한 바람.
사막은 커지다 못해 급기야 바다에 이르렀네.

가을방학 - 나미브



기분좋게 읽고 넘길 귀여운 단편이다.

정세랑 소설가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SF!

다만, <작가의 글>을 통해 이 소설이 처음에는 익명으로 쓰인 소설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정세랑 소설가는 독자들이 이 소설을 쓴 작가가 남성이라고 오해했으면 하는 마음에 익명으로 글을 썼다고 했다. 언젠가 정세랑 소설가를 만나면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세랑'이라는 편견에 대응하고 싶었던 걸까?


아 맞다, 요즘 젊은 남자 소설가들은 여성의 이름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웃겼다.







6. 이혼 세일


난 절대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너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
행복함에 눈물 범벅이 될 지라도 너 하나로 숨막힐 바보는 안 될 거야.
그렇겐 안 될 거야.

가을방학 - 이브나



친구들 중에도 유독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가 있다.
그러면 그 친구는 질투의 대상이면서 닮고 싶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재는 그런 친구다.
이재를 아는 누구든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면 그 옆의 나는 자연스럽게 병풍이자 그림자가 된다. 그건 서글프지만 나는 그 애를 아주 좋아해서 견뎌야 하는 일이다.

초등학교때 우리 반에 양원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내게는 그 친구가 그런 사람이었다. 같이 있으면 나까지 밝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 애를 무척 좋아했다. 그 애를 좋아했지만 좋아하지 못했다. 함께 있으면 주변 친구들은 자꾸 비교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못난 나는 졸업하면서 연락할 생각을 안 했고 그러다보니 이제는 연락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근황도 모르는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당연히 나는 주인공 타입이 아니니까 이재를 제외하고, 그럼 다른 친구들 중에서 누구와 비슷할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아영이다. 혼자는 두렵고 무섭지만 누구랑 함께하면서 외로울 게 더 무서운, 그래서 혼자있기를 선택하는 사람.







7. 정세랑


나는 정세랑의 문체가 참 좋다.

수월히 읽히는데 거기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두 개의 그림을 접속사를 통해 연결하는 문장이 좋고, 그 문장의 담백함이 말도 못하게 좋다.

발랄하다. 읽으면서 한참 웃었는데 또 읽고 싶어서 돌아가 다시 읽고는 또 웃은 장면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좋은 건 '안 가르쳐주지롱~' 이다.

절대 뭔가를 그냥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는 만큼만 보이고 마치 퀴즈를 푸는 것 같다. 자꾸 나를 검색하게 만드는데 그렇게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 희열이 정말 끝내준다.

이를테면, '나폴레옹 제과점'을 '어느 프랑스 장군의 이름을 딴 빵집'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환상적이야.




근이의 고향은 완도였을 것이다.
전복 양식장으로 유명한 남도의 어느 섬. 근이는 거기서 온 아이였다고 적혀있으니.

'너는 왜그러냐아아' 하는 근이의 사투리가 듣기 좋았지만, 나중에 근이가 선택한 직업을 생각했을 때 사투리를 빨리 고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아쉬운 이야길 하는 걸 보면 아마도 근이는 아나운서가 되었는 모양이다.


이스마일이 떠나온 나라는 요르단이었다. 정세랑 소설가는 이스마일이 어느 나라에서 온 청년인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뿅하고 힌트를 하나 심어두었다.

'붉은 사막'

네이버에 붉은 사막을 검색했을 때 요르단이라는 나라 이름이 가장 앞에 떠올랐다. 그걸 알고나니 이스마일의 외모나 주변이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대미친 너무 환상적이야...)

아쉬운 건 효진에게 전화를 건 화자의 고향이 어디인지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산물도 없고 그저 낡은 절이 하나 있는, 유명한 가게라곤 오래된 동태찌개집이 전부인 깡시골은 어디였을까?

정세랑 소설가는 유독 '좋다'는 용언을 자주 쓴다.

[디지털 건반의 부자연스러운 잔음을 사실은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그래선지 소설이 밝고 환하게 느껴졌다. 어두운 글감을 재료로 하고 있으면서도 글은 어딘지 모르게 흥미롭고 발랄했다. 밝은 단어를 자주 쓰는 작가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을 읽었으니 당연히 나는 행복한 독서를 했다.

그리고 또 느꼈지.

살면서 가장 으뜸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 장을 덮는 그 때.

이를테면 이 책을 덮을 때처럼.
(가을방학 - 속아도 꿈결)








:: 책갈피 ::


어릴 때부터 성실했던 서른네번째 여자는, 결혼 적령기에 곁에 있던 사람과 쫓기는 마음으로 결혼했다. 몇년이 지나고서야 이 숙제는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가 아니었을까, 의문이 찾아왔다.

내가 너를 떠올릴 때, 항상 너의 옆 이마엔 무지개가 맺혀 있어. 두 장의 유리가 맞닿은 틈이 프리즘처럼 무지개를 만들어냈지. 학교 앞의 별로 예쁘지도 않은 까페였는데 유리창이 가끔 그렇게 재주를 부렸어. 관자놀이에 무지개가 있다고 내가 말하자, 너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옆으로 굴렸어. 마치 그러면 볼 수 있을 것처럼. 그러지 않으면 무지개가 사라지고 말 것처럼.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도 어떻게든 연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처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 지옥 같은 회사를 개선시키고, 성격이 안 맞는 애인과 다투고 다퉈서는 안정적인 관계에 다다르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그런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어.

사모하는 공자에게 귤 따위의 작은 열매를 던지는 것은 강남의 낭만적인 전통이다. (…) 어쨌든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은열이 남성으로 그려졌다는 점인데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은열이 집단 내의 우두머리 직책을 이르는 이름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보다는 편의상 남장을 했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창량이 "수년 동안 여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는 로맨틱한 거짓이 된다. (p.74)

사실 알고 싶어하는 것도 나 하나 아닐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과거일 뿐이다. 무덤 속의 실 보풀 같은 것을 들고 보물이라고 말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게다가 내가 찾은 이 모든 편린들은 논문보다는 한중일 아이돌 총출동 합작 드라마용으로 더 적합하지 않은가. (p.75)

"윤회의 바퀴가 셀 수 없이 거듭 돌아 본래의 육(肉)과 혼(魂)이 먼지만큼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함께 있고 싶은 이들과 함께 있다면 그곳이 극락이다" 정도인데 만족감이 엿보인달까. 행복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게다가 원본을 그대로 옮긴 필름엔 시로의 글에 덧붙여 세필로 "나도 그렇게 생각해(我如想之)"라고 적혀 있었다. 그 다른 필적이 은열의 것이 아닐까 잠깐 두근거려 하고 말았다. (p.80)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 (p.222)

"나 한달 만에 울면서 돌아올 수도 있어." 이재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또 어때."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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