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러블린 Aug 03. 2021

채사장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영화 <비포 선셋(2006)>을 떠올리며


때때로 계절이나 날씨, 시간과 어울리는 책이 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손등을 스치는 계절에 흔들거리는 의자에 앉아 주인공들이 느끼는 설렘을 상상하며 읽을  있는 소설이 있는가하면,  잡고 책상에 앉아 오른 편에는 수첩을 꺼내놓고 옮겨 적으면서 읽어야 하는 책들도 있다.


이 책은 아무래도 새벽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환한 낮에 읽으면 어쩐지 죄책감이 든다. 누군가의 속마음이나 살아온 일생 같은 것들이 담겨 있어서다. 사실  그동안 이런 종류의 책들을 부담스러워 했다.

'저자에 대해 내가 이만큼이나 알아도 될까?'

괜히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벽에 간접등 하나에만 의존한 채, 침대에 무릎을 접어 올리고 책을 읽으니 죄책감이 반으로 줄었다. 모두가 파한 술자리에 나와 저자 둘만 남아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귀에 가을 냄새가 나는 노래를 틀어놓으니 한층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고 그래서 반가웠다.







소년병 이야기


뭉툭한 소설이었다.

수려하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만 있어서 담백했다.

이성적인 사람이 소설을 쓰면 이렇게 까슬까슬한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그렇다고 재미가 없거나 유치한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식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으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인물이름이 정해지지 않고 '소년병', '소녀' 처럼 대명사로 불리는데 나는 그게 좋았다.

때때로 소설 속 이름은 내가 아는 누군가를 자꾸 떠오르게 만들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어떤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밍밍한 미역국처럼 싱거운 단편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왜이렇게 지금에까지 여운이 남는지 모르겠다.


소녀는 나무 장작을 아껴 태웠다.

나그네들에겐 자신이 가져온 장작이 다 타면 떠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소년병을 잡아두고 싶었던 소녀는, 느릿느릿, 장작이 타는 시간을, 끌었다. 소년병은 그런 소녀의 마음을 의심했다. 끓을 듯 말듯 발롱거리는 소녀의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소년병은 말했다.

나는 떠나기로 했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아니야, 그건 사랑해서야. 당신을 사랑해서 그런 거야.

소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년병은 기어코 소녀를 떠났다. 그러나 후회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녀를 떠나오면 후련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소년병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점점 더 소녀가 그리워지기만 했다.


소년병은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소년병'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그는 전쟁터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죽어가는 소년병에게 '신도 아니고 운명도 아닌' 어떤 누군가가 다가와 말했다.
너를 소녀에게 데려다 줄게, 대신 거기에는 대가가 따를 거야.
누군가는 조건을 걸었다. 소녀가 소년병과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면, 그 순간 소년병의 시간은 끝나고 영혼을 거두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깨어난 소년병은 소녀와 함께 살던 오두막으로 돌아와 있었다. 곧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었을 때 소년병이 맞이한 건 소녀였다. 분명 그 소녀였지만 다른 소녀.


소년병은 소녀에게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녀도 그 말을 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소년병은, 느릿느릿, 사랑이 타는 시간을 끌었다. 소녀는 소년병의 마음을 의심했다.

'나는 떠나기로 했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소녀는 자기 소유의 짐가방을 문 앞에 두고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그건 사랑해서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소년병은 비로소 그 때서야 예전에 소녀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







관계에 관한 이야기

그에게는 오카리나가 남았다


대학교를 들어간 첫 해, 나는 동아리에 들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한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다.

 남자는 나보다  살이 많았지만 나보다 키가 작았고,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목소리가 끝내주게 좋았다. 꼿꼿한 발음에 중저음의 낮은 발성은 다른 자들을 마다하고 기꺼이 그에게 반할 가치가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려면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야했는데, 유난히 덜컹거리는 마음이 오래된 1호선 지하철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 설레서 그런건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이어폰을 꼽지 않았는데도 스탠딩 에그의 사랑 노래가 들리는 것 같은 날도 있었다.


나는 그 선배를 좋아했다.

그는 언제나 목에 니콘 DSLR 카메라를 걸고 다니는 청년이었는데, '니콘은 풍경 사진에 어울리고 캐논은 인물 사진이 잘 나온다'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소리도 그의 목소리로 들으니 특별한 말처럼 들렸다.

나는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꼬박 세 달을 모은 돈을 가지고 캐논 DSLR 카메라 하나를 샀다. 사진 찍는 법을 알려달라는 핑계로 선배와 데이트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금방 그와 연애를 시작했지만, 선배와 나의 연애는 채 2개월을 못 채우고 끝이 났다.

나를 부잣집 딸로 착각한 그가 자꾸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졸랐기 때문이었다. 새학기에 입을 바지가 없다며 나를 아웃렛으로 데려가 몇 시간 동안 본인의 바지를 고르게 하고(그렇게 골랐어도 대부분의 밑단을 잘라내야 하겠지만) 마침내 쇼핑이 끝나는 순간 '쇼핑하느라 힘들었으니 나 밥 사줘' 라며 당당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을 때.

나는 더이상 그의 목소리마저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길로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이후 나는 동아리를 나와버렸으므로 살면서 그를 다시  일은 없었다.

그리고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들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사진을 찍는다.

처음 의도는 불순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어깨끈이 떨어지도록 나의 레베카와 여정을 나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면 당연히 가방 한 켠에 카메라 들어갈 자리를 만든다.


책 속의 채사장 후배도 그렇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친해져보려고 들어간 오카리나 동아리였지만 그 여자는 금방 동아리를 나가버려 후배만 홀로 남았다. 거의 오카리나 준장인(?)이 되어 연말 공연에서 힘있게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후배를 보며 채사장은 생각했다.

길고 긴 인생의 중간에 만나는 인연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거라고.

그에게는 오카리나가 남았고 나에게는 카메라가 남았다.




통증론


채사장은 본문에서 어쩌면 통증은 신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방법일 수도 있다고 적었다.

얼마 전에 크게 아팠던 나로서는 아주 공감되는 말이었다.
맞다, 우리는 통증을 통해 여기에 내 장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통증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통증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도 깨닫게 된다.

만약 나도 얼마 전에 그렇게 아프지 않았더라면 내 신체와 통증을 막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피곤이 물먹은 솜이불처럼 나를 덮어오는 날이면 나는 약을 준비한다.
'아 통증이 찾아오겠구나.'


저자의 이런 생각은 통증으로 인해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를테면, 여성들은 호르몬에 따라 피부가 망가지곤 한다. 생리를 앞두면 호르몬 체계가 뒤틀리기 때문이라는데, 일전의 나는 그런 걸로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뾰루지 하나에 집착하고 수시로 거울을 보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내가 곧 생리를 하겠구나, 여드름은 그 통증에 대비를 하라는 의미구나.’ 생각하고 다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성장이라고 믿는다.

음 그리고 이건 좀 아이러니한데 나는 통증을 통해 내가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도 깨달았다.

사실 그동안은 낮은 자존감을 방패삼아 술도 막 먹고 건강을 홀대하며 지냈었다면, 아프고 난 뒤 나는 자꾸 건강한 방법으로 나를 지켜주려고 한다. 통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생긴 것이다.








세계에 관한 이야기

진리의 반대말은 복잡성


괴벨스였던가? 아무튼 그와 비슷한 어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들은 100%의 거짓말에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대신 99%의 거짓에 1%의 진실을 섞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선동당할 수 있다고.
그 말이 떠올랐다. 진리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복잡성이라는 대목에서.
거짓만 있을 때 그것을 걸러내는 건 쉽지만,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으면 우리는 혼란해진다. 그리고 쉽게 믿어버린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당연한 것을 자꾸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연습, 의심.
나는 아직 좁밥나부랭이라 이게 너무 어렵지만..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선사해준 것(풍요)와 빼앗아간 것(즐길 권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채사장은 본문에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일을 사례로 들었다. 자본주의가 음악 시장을 점령하기 전에는 사람들 모두가 음악에 있어 생산자이자 소비자였다. 서너명만 모인 자리가 되어도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그런 쾌락과 유흥은 '잘 하는 사람들(연예인)'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저 단상 아래서 박수나 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소설을 생각했다.
언제나 소설을 한 편 쯤 써보고 싶다고 꿈꿨으면서도, 나는 재능도 용기도 부족하니 내가 쓰는 것보다 잘 쓴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생산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다만 소비해야 하는 존재로 밀려났다.








하이퍼

<비포선셋(2006)>


20대 초반에 <비포 선셋>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영화관에서 이벤트성으로 재개봉을 했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내가 왜 이 영화를 선택했었는지 의문이다. 어른 행세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은 인셉션이니 매트릭스니 하는 SF 영화에 빠져있었으면서.

영화는 파리의 오래된 서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나는 잠들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기억나는 장면이 없어 머쓱했다. 그래서 내게 <비포 선셋>은 지루한 영화로 각인되어 있었다. 20대 중반을 거쳐 후반을 지나는 동안 여러 번이나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찾지 않았다. 이건 지루한 영화였으니까.

그러다 얼마 전에 집 청소를 하다 영화 티켓을 찾았다. 20대 초반에 혼자 보았던 영화 <비포 선셋>

문득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건 지루한 영화니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어 있었다. 그 몇년 새 지루한 영화에서 여운이 남고 대사가 생생할 만큼 와닿는 영화가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채사장은 이걸 '경험'으로 설명한다.

너무 어렸을 때 어려운 책을 읽으면 그저 지루한 책읽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험을 한 뒤라면 책의 내용이 비로소 이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사이 사랑도 했고, 이별도 했고, 재회를 꿈꾸다 좌절도 해 봤고, 옛 연인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몰래 염탐하면서 일종의 경험을 했다. 사랑이라는 경험을 하고 났으니 영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재회'라는 키워드를 이해할 수 있던 거였다. 영화는 가만히 있었는데 내가, 내가 달라진 것이다.


고등학교때 보면, 교생 선생님이나 젊은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 반에도 갓 부임한 국어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꽤나 진심이었다. 초임 선생님들은 주로 1,2학년 수업을 담당하셨고 우리 3학년들 수업엔 보충수업만 들어왔는데 친구는 그 보충수업에서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을 바라볼 때나 선생님 얘기를 할 때 친구의 눈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빛났다.

그리고 그 애는 열심히 공부해서 기어코 선생님의 대학교 후배가 되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 그냥 대학생만 되면 졸업했다는 구실로 찾아올 수 있잖아. 라고 쉬운 소리를 하는 내게 친구는 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생님과 공유할 게 하나 더 많아지잖아."

졸업과 동시에 친구와 연락이 끊겨 이후 소식은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님과 사랑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대개의 소녀들은 동경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니까. 대학생이 되어 사랑을 경험한 친구는 그 감정이 뭐였는지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고, 점차 선생님을 잊었을 것이다.

연애도 해 보고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여성들은 더이상 선생님에게 설레지 않는다. 그 감정은 동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친구는 인생에 딱 한 번 할까말까한 경험을 한 셈이다.


채사장이 오래 전에 만났던 연인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왜 이렇게 괜찮은 사람들은 상대방의 인생이 힘들 때 나타날까, 이렇게 좋은 사람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약할 때만 곁에 다가올까. 혼란한 시간을 겪던 저자는 그렇게 괜찮은 연인을 자꾸 지치게 했고 결국 떠나게 만들었다.

어떤 누군가들은 떠날 때 자신이 받은 것들을 다 토해내고 간다. 그게 폼이라도 난다는 듯, 자신이 받은 선물과 편지, 사진들을 상대방의 집 앞에 처리하듯 던져놓고 떠난다. 하지만 채사장의 옛 연인은 오히려 더 안겨주고 떠나려고 했다. 그녀는 이제 사랑보다 더 커진 걱정과 위로를 형광펜과 볼펜으로 가득 적어두고. 떠났다.


그리고 나는 <비포 선셋>을 떠올렸다.

영화는 파리의 오래된 서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제시(에단 호크)는 그 오래된 서점에서 독자들과 만남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셀린(줄리 델피)이 찾아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채사장은 이 책을 내고 옛 연인에게 연락을 받았을까? 이 책의 북 콘서트를 할 때, 그 사람이 한번쯤은 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행사장으로 가지는 않았을까? 영화에서처럼 둘은 다시 만나 이제는 더이상 혼란도 없고 불안도 없는 시절에 다시 사랑을 했을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 책갈피 :::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삿짐을 정리하다 오래된 책을 발견했다. 티벳 여행기. 그래, 이런 책이 있었지. 그대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무거워 들출 수 없었던 책장을 가볍게 넘겨보았다. 일정과 준비물과 차표 시간마다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고 꾹꾹 눌러 쓴 익숙한 글씨로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랬구나. 책상에서,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그녀는 한장한장 책장을 넘기며 불안한 연인을 대신해 티벳의 외로운 고원을 순례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왜 책을 건네는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도 차분하고 지쳐 있었는지 나는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p.127)

 

진리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리의 반대말은 복잡성이다. 거짓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거짓 안에 진리가 섞여 있을 경우, 혹은 진리 안에 거짓이 섞여 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쉽게 제거하지 못한다. (p.149)


우리는 세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나의 세계 안에는 무엇이 있고,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혹시 나는 고집스레 단일한 진리관을 움켜쥐고 빈곤하게도 이것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닌지를. 또한 외부의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단순히 비진리라 규정해버림으로써 그것을 안 봐도 괜찮은 것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던 것은 아닌지를. (p.156)

매거진의 이전글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