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봄 - (4) 고마운 마음들, 그리고..

by 하정희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 성장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했던 나의 옛 교회는 수유리 주택가에서 시작해 3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며 오천 명 넘는 교인이 모이기까지 성장한 교회였다.


엄마는 당시의 많은 엄마들이 많이들 그러했듯 나를 키우고 가정에 집중하느라 힘들게 얻은 중학교 역사 선생님 자리를 선뜻 포기하고 물러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건 원래 가지고 태어난 학구열이나 리더십은 어디 가지 않아, 엄마는 그 에너지를 당시 한창 할 일 많았던 '80-'90년대 교회에서 마음 껏, 보람 있게 쓰셨던 것 같다. 엄마는 동네 별로 조직되어 있는 구역예배 리더였고, 권사였고, 고등부의 교사였으며, 성인 대상 평신도 성경공부 프로그램의 대표 교사였다.

젊은 시절의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형편 좋지 않은 배경에서 혼자 힘으로 열심히 배워 국내 TV 방송국 초창기부터 쌓은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에 본인의 기준을 고수하는 말없고 고집 있는 사람이었지만,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돌아봐도 희한하리 만치 엄마를 존중하고 그에 물들어 갔다. 아빠 역시 차츰 성경을 연구했고, 고등부 교사를 오래도록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장로의 자리에도 참여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엔 아빠는 고등부 '부장'선생님, 엄마는 고등부 교사, 나는 고등부 성가대 반주자였다. 한 가족이 패키지로 예배 사회를 보고(아빠), 예배 반주를 하고(딸), 예배 후 사춘기 한창이던 아이들을 휘어잡아 성경을 가르치는(엄마) 광경을 친구들과 교인들은 아주 재미있어 했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좋은 권사님과 좋은 장로님으로 기억되는 나의 엄마 아빠가 참 좋았다.


나의 유년기로부터 청년기 시절, 우리 가족은 모두 주말 내내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건 피곤하거나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그 교회는 고향이기도 했고, 마음 나눌 사람들이 있는 놀이터이기도 했기에.


그랬던 세월을 기억하며 우리 가족을 알고서 지금껏 즐거이 교류하는 교회 친구들 중, 강남의 큰 상급종합병원 흉부외과 수술실 간호사로 오래 일해 온 후배에게 그 날 아침 전화를 걸었다.


아침 7시, 그 애도 수술 들어갈 준비를 할 시간이었을 텐데 싶어 미안하면서도, 염치 불구 전화를 걸어 눈물 바람 아래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나 큰 수술인지 잘 아는 간호사로서 상황 파악을 하고자 집도의가 내게 어떤 설명을 했는지 내게 이것저것 확인을 하는데, 가슴뼈를 연다고 한 것인지 측면의 갈비뼈를 연다고 한 것인지, 하행 동맥이어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여서 어디를 잘라 인공혈관으로 치환해야 하는 상황이라 한 것인지 등 수술 방법에 대해 내가 아는 바도 없고 이해하고 있는 바가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달으니, 가슴이 다시 쿵쾅거렸다. 그래도, 흉부외과 중에서도 동맥수술 전문이라면 실력없는데 교수가 되었을 리 없다, 젊은 집도의를 꾹 믿어야 한다는 그 애의 말에 용기를 가졌다.


엄마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에 도착해 중환자실 면회 시간을 기다리는데, 그의 남편이자 역시 유년시절의 서로의 모습을 기억하는 선배인 젊은 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역시 우리 부모를 고등부 교사이자 장로와 권사로 기억하는 사람인데, 마침 그 근처에 있어 찾아왔다며 와서 엄마를 위로하고 함께 기도 해 주겠다며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게 목사의 일이라면서.


젊은 목사께서 가시고, 중환자실에서의 아빠와의 조우를 끝낸 뒤 아빠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난 뒤, 엄마는 그제서야 큰 울음을 터뜨리셨다. 그러던 엄마가 길 건너 창경궁을 한 바퀴 돌자 하셨다.

교수는 대동맥 치환술만으로 수술이 끝나면 7시간, 관상동맥 스텐트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면 거기서 몇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 했는데, 병원에서 아득한 정신으로 걱정만 쌓는 시간을 보내기엔 마음이 힘들어 그러셨을 거다.



그 날은 날씨도 정말 좋아, 소풍하기에 딱 좋은 그런 아름다운 날이었다.

예쁜 정원과 꽃, 그리고 소풍 온 관광객들 사이로 섞이면서, 역시 지구는 각자의 슬픔은 알 바 없이 아름다이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엄마와 걷는데, 이번에는 또다른 목사님에게서 다짜고짜 서울대병원 로비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옛적 강북의 그 교회에서 부목사로 활동하다가 본인의 개척교회에 엄마를 성인 대상 성경공부 교사로 역할해 주실 것을 부탁하여, 역시나 오랜 연을 이어오고 있는 분이었다.


창경궁을 걷다 말고 병원에 돌아가 그 사이 많이 늙으신 그 목사님을 반가이 맞이하고, 여전히 근처에 있던 오전의 그 젊은 목사님까지 다시 불러 점심식사 그리고 오후 커피를 함께 했다.

아빠를 위한 기도가 시작이었지만, 크고 작은 여러 화제 거리가 오고 가는 동안 늙고 젊은 두 목사님들이 우리 앞에 보여주는 티키타카에 엄마와 나는 아빠를 수술실에 밀어 넣고도 그들과 함께 밝게 웃고 떠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남편 목사를 보내주어 고맙다, 기도 받고 수 시간 동안 두 목사님의 케미를 구경하다 시름을 잊을 수 있어 큰 위로를 받았다 하는 내 인사에 우리 흉부외과 간호사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언니, 그럴 땐 원래 누군가 그렇게 옆에서 정신을 쏙 빼 줘야 돼. 가족이 수술실 들어갔다는 걸 기억 안나게 해 줘야 되는거야!'



...그 친구 역시 최근 몇 년 간, 부모님들이 동시에 크게 병을 겪으신 터라 힘든 딸로서 한참 견디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런 길을 걷고 있을 때, 그 길에 함께 해 준적이 없는 것이 새삼 미안했다.


뒤늦게,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빠가 수술실로 들어간 지 6시간 즈음 지났다.

서울대병원 수술실 앞은 환자 가족에게 그닥 친절한 공간은 아니라서, 수술 상황을 알 수 있는 상황판 등이 걸려 있지 않아 더 조바심이 났다. 그 조바심에 수술실 근처 벤치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는데, 강남의 병원에서 강북으로 퇴근하는 길에 들렀다며 간호사 후배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났다.

말할 수 없는 고마운 마음과 조바심에다, 보고 싶은 아빠 생각이 다 겹쳐서 그 애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수술이 시작된 지 7시간, 남편도 퇴근길에 수술실 앞으로 온 터라, 우리는 이젠 넷이 되어 함께 서성이고 있었다. 병원에 대해 모르니 조심스러워 어찌할 바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 타 병원 흉부외과 간호사님께서 '언니, 나 이런 거 잘 해' 라며 수술실 옆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문의'용 벨을 누르며 말했다.


'하OO 환자님 수술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요?'


안에서 웅성웅성했다. 아마도 서울대병원이라는 간판 앞에 그렇게 용감히 묻는 보호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몇십 초의 초조한 기다림 끝에 스피커 건너 대답을 주기를, 담당 집도의가 곧 나올 것이라 했다.


5분 정도 흘렀흘까, 삼십대 중후반의 (내 눈에는 여전히 앳된) 그 교수가 7시간이라는 수술 후임에도 불구하고 어제 봤던 생생하고 건강한 안색을 하고서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설명하러 나왔다.

'가슴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혈관이 튼튼하신 분이라 대동맥 치환 수술은 잘 마쳤고, 관상동맥도 CT상 판단했던 것보다 심각하게 막힌 상태는 아니었던 터라 그대로 뒀다', '이제 후유증 없도록 회복만 잘 하시면 되겠다'는 말이었다.



... 엄마와 나는, 말을 마친 젊은 교수에게 허리를 숙여 진심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


나는, 나의 늙은 아빠가 누군지 모를 젊은 교수의 연습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데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깊이, 사과했다. 젊고 체력 좋은 이가 내 아빠를 살려내는 데에 긴 시간을 거뜬히 집중해줬다는 데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아직 깨지 않은 채 수술실에서 나와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아빠의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제는 그나마 한숨 돌린 엄마를 수유리로 모셔다 드린 뒤 강남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어땠어, 엄마 할아버지는 괜찮어, 엄마 나는 안 보고 싶었어 하며 내 옆에 들러붙는, 다 컸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가인 두 딸들을 꼭 껴안아주고 기록을 부분 부분이나마 메모로 남겼다.

그 이틀 동안 내가 입은 은혜와 감사의 순간을 잊지 않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나여서 그냥 사랑해 주는 이들과의 일 말고, 그들과 나누는 따뜻한 정서 말고, 급작스레 밀려드는 다른 어찌할 바 모를 상황이란 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모르는 세상이 나를 설명할 기회도 부여하지 않고서 나를 다룬다고 하여 내가 답답하다, 나는 옳다 바득바득 증명을 하고 안하고는 인생 전체로 볼 때 그닥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을 굳이 아빠의 목숨을 걸어가며 배울 필요는 없었으나, 갑자기 아빠 일을 계기로 알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다른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노쇠하지만 기품 있게, 아쉽지만 깊은 후회가 없게 내 삶을 마무리 하려면 어찌해야 할 지 인지하며 살아야겠다. 이미 그러하신 내 부모와의 남은 시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그리고, 그런 노년이 되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 생각을... 우리 아빠와 엄마,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로부터 깊은 은혜를 입었던 폭풍 같은 2025년의 봄에서야,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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