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익상 Oct 09. 2023

<굿모닝 예루살렘> 기 들릴 인터뷰

2014 @ A-COMICS

2014년 6월 A-COMICS에서 자리를 마련해 진행했던 인터뷰. 서버가 사라져서 더이상 접속할 수 없는 관계로 여기 복원해 둔다.


----


이야기가 내게로 왔다

_ <굿모닝 예루살렘> 기 들릴 인터뷰


애플 PPL 중인 기 들릴 자캐(물론 농담이다. p.35 참고) - 이하 모든 <굿모닝 예루살렘> 이미지는 출판사 길찾기에서 제공한 것.

  

<굿모닝 예루살렘>으로 2012 앙굴렘 만화축제 대상을 수상한 작가 기 들릴이 한국에 왔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나자마자 서로 짧은 영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은 처음이냐고 물어보니, 남한은 처음이라고 답한다. 아, 맞다. 평양에 갔었지... 점심은 뭘 먹었냐고 물어보니 국물에 고기가 담긴 걸 먹었다고 했다. 샤브샤븐가? 했더니 맞는 것 같단다. 맛있었단다. 영어로 나눈 대화는 여기까지. 프랑스문화원에서 일하고 있는 양이경 씨가 통역으로 수고해주었다.(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조익상: 작품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세상과 사람들이나 사건을 흥미롭게 담아내는 표현이 무척 좋다. 먼저 작업 방식에 대해 들어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이런 표현이 나오나?     


기 들릴: 항상 뭔가 이야기할 만한 거리가 있을 때마다 노트를 써둔다. 작품은 노트를 바탕으로 작업한다. 현지에서는 노트만 하고 묵혀뒀다가 돌아가서 작업을 한다. 돌아가서도 몇 달 정도는 기다린다. 노트를 보면 당시와는 달리 딱히 흥미롭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렇게 재미있다, 웃기다, 이상하다 등을 노트를 통해 판단하고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작업을 하게 된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짧은 엽서를 보내는 것처럼 작업하려고 한다. 친구들이 들으면 재미있겠다 싶은 에피소드를 들려주듯이 그려나가는 거다.     


조익상: 그렇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재미있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재미는 어떤 걸까? 어떤 것이 들려주고 싶은 ‘재미’의 요건인가?


기 들릴: <굿모닝 예루살렘>은 1년 동안 머물면서 있었던 일을 담고 있는데, 그걸 균일하게 한 쪽씩 담아낸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이야기 모음이 되어버리고 말 거다. 그중에서 재미있는 일을 골라서 6~7페이지 정도로 구성하고 그런 에피소드들을 모아 300페이지로 추려내는 데는 내 취향이 작용했을 거다. 특히 내 문화권과는 다른 사건이나 상황이 흥미를 자극한다. 그게 취향이라면 취향이다. 퀘벡이나 유럽과는 다른 것 말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일을 보기 어려웠는데, 예루살렘에서는 굉장히 당연한 일들. 예를 들어 무슬림 상점은 금요일에 쉬고, 토요일엔 유대교 가게가 쉬고 일요일엔 개신교, 이런 부분들이 흥미로운 거다. 예루살렘에선 대체로 종교적인 게 문화에 배어있는 게 그랬다. 나한테 이런 차이가 흥미롭게 다가온다면, 내 유럽인 친구들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세세하게 인식하고 세세하게 그러내려고 한다. 얼핏 봐서는 차이가 아니지만, 잘 들여다보면 큰 차이인 것들이 있다. 그렇게 특별한 차이가 내게는 재미있는 부분이다.     


p.14 그러니까 이런 차이, 이런 디테일.


조익상: 자기 문화와의 차이, 낯섦, 요즘 어려운 말로는 타자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끌린다는 말로 이해했다. 그걸 전달하고 서술하는 게 취향이자 작가로서의 욕망인 것 같은데.


기 들릴: 맞다. 특히 낯선 것을 유머러스하게 풀고 싶어하는 편이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욕망은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만화 작가로서 예루살렘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게 더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이나 글이 아니라 만화 작가가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의 이점이 있을 거다. 만화가 새로이 ‘치고 올라오는 장르’라는 점도 이점일 테고.

     

조익상: 동의한다. 그렇다면 다른 문예 장르와 변별되는 만화의 이점이 무엇일지 몇 개만 들어보고 싶다.


기 들릴: 두 가지 정도 얘기할 수 있겠다. 평양에 갔을 때 얘긴데, 거기선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억을 그림으로 저장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건 큰 이점이다. 다음으로 예루살렘에선 여기저기 동네마다 특색이 있고 설명할 거리들이 많았다. 위치가 어딘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등도 드러내야 하고. 그럴 때 있는 지도를 그냥 썼다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동네 외에도 모든 게 균일하게 들어가 있었을 게 아닌가. 하지만 만화이기 때문에 <굿모닝 예루살렘>에는 이해하기 쉽고 많은 부수적인 것이 생략된 지도나 약도, 그림이 많이 들어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부각되게 배치한 표현을 만드는 데 만화는 정말 좋은 예술이다.      

p.85 약도와 지도와 공간 묘사


조익상: 만화에서는 생략을 할 수 있다는 건 참 중요한 포인트다. 사진이나 영화에서는 피사체를 중심에 놓더라도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은 CG를 쓰지 않는 한 없애기가 어려운데, 만화는 그게 용이하니까. 그런데 지금까진 그림의 이점을 이야기했다면, 그림과 문자 텍스트의 조합인 만화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 달라.


기 들릴: 나는 단순한 그림과 단순한 텍스트를 조합하는 걸 좋아한다. 만화는 소설이 아니니까 길게 쓸 수 없다. 유머러스한 표현을 두고 말하자면, 단순한 텍스트로 그림과 함께 유머를 자아내야 하는데 그게 늘 쉬운 것은 아니다. 사실 상당히 어렵다. 하지만 그림과 텍스트의 조합이 될 때만 만들어낼 수 있는 의미가 있고, 나는 만화의 그러한 특징에 감사한다. 상황에 따라 텍스트와 그림의 분량을 조절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이 페이지는 처음에는 텍스트를 상당히 많이 넣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저 보여주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텍스트를 많이 빼서 이렇게 구성했다. 어떻게 느끼라고 얘기해 주는 게 아니라 알아서 느꼈으면 좋겠다 싶었다.


p.102-103_원래는 대사가 더 많았다고

조익상: 잘 알겠다. 그런데 혹시 언어화가 불가능해서 보여주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나? 말하자면, 너무 큰 고통이어서 말할 수도 없는 경우라든지, 역사적인 맥락을 너무 많이 설명해야 하고 그 골이 너무 깊어서 보여주는 것만 가능한 경우 말이다.     


기 들릴: 아직까지는 없었다. 설명하기 어려우면 더 노력을 해야 한다. 가끔은 시를 인용하기도 하고. 만화가로 작업해온 경험을 토대로 해서 어떤 부분은 그림만으로 보여주는 게 필요하고, 어떤 경우는 그림과 글의 조합을 통해 전달하는 게 필요한지를 판단하고 취사선택 하는 거다. 내러티브의 리듬도 그런 판단에 고려하는 요소다. 표현이 너무 힘들다고 그림만 달랑 두는 일은 없다. 그림으로만 구성된 이 페이지 같은 경우는, 요르단에 여행 갔던 걸 보여주고는 싶은데, 요르단이 얼마나 예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엽서 식으로 그림을 이렇게 배치한 거다.

p.180 기 들릴은 컷이나 페이지마다 다른 컬러로 시공간을 분절하는 문법을 종종 쓴다. 여기선 컷 단위로 되어있다.

조익상: 작품을 보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것 같다. 깊이가 있단 얘기다. 대상 장소에 대한 연구도 그렇고,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시각을 쌓는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공부도 그렇고. 어떻게 이렇게 보이게 만든 건가?     


기 들릴: 사실 예루살렘에 가는 게 결정되고 출국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나라에 대한 조사는 전혀 못하고 간 거다. 도착해서 기자나 NGO 홀동가를 많이 만났고, 원래 호기심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있으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관찰을 많이 했다. 그렇게 쌓은 정보나 지식이 작품에 들어가 있다. 그게 더 생생한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식이기도 하고. 또 전투가 벌어지거나 사람이 죽는 일은 그 자체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내 책에 어떤 시각이 녹아 있다면, 그건 그런 일들이 내게 왔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까, 내가 예루살렘에 가게 된 것도 가게 된 때도 내가 미리 계획한 게 아니라 조금은 갑작스럽게 가게 되었던 거고, 갔더니 내가 있던 기간 동안 내 작품 속에 담긴 일들을 만나게 된 거다. 내가 주관적으로 한 일은 만났던 일 중에서 넣을 것과 뺄 것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긴 일들은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했다. 그러다보면 이야기는 그 스스로 혼자서 창조된다. 내가 기록해 둔 것들을 모아서 작품으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각 에피소드들이 어떤 건 앞에 어떤 건 뒤에 가면서 큰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각기 다른 단체가 제공하는 투어에 모두 참가한 기 들릴. p. 280

  

각기 다른 단체가 제공하는 투어에 모두 참가한 기 들릴. p. 307


조익상: ‘이야기가 내게로 왔다. 스스로 창조되었다.’는 답변이 참 인상적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평양도 그렇고 예루살렘도 그렇고, 거기에 가겠다고 스스로 계획한 게 아니기 때문인 면도 있을 거다. 평양은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갔던 거고, 버마와 예루살렘은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인 동반자(책에서는 ‘아내’로 번역됨)가 가게 되어 함께 갔던 거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작품 활동을 위해서 가보고 싶은 지역이나 그럴 계획은 없나?


기 들릴: 없다. 이젠 나도 그녀도 갑자기 나갈 일은 생길 것 같지 않다. 일본에 가보고 싶긴 하다. 만화 산업이 발달한 나라니까. 카투만두도 궁금하다. 근데, 간다고 해서 작품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아까 말했듯 내게 사건이 다가와야 하니까. 일부러 어딜 가서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짜낼 생각은 없다.     


조익상: 듣다 보니 일반적인 르포르타주나 저널리즘 만화의 기본적인 특징과는 반대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사건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장소에 가고 사람을 만나는 건데, 당신은 그냥 가게 되고 가서 사람과 사건을 만나게 되는 거니까.     


기 들릴: 맞다. 나는 어디 가더라도 내 작품을 르포르타주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출판사나 언론이 붙인 이름이다. 나 자신이 조 사코(<팔레스타인>, <저널리즘> 등) 작가 같은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굿모닝 예루살렘>은 진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원래 목적이 아니었다. 한 사람, 그러니까 한 퀘벡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담아 편안하게 전달하는 데 있었지. 하지만 내가 가게 되었던 곳이 하필이면 (아픈 역사가 새겨진) ‘예루살렘’이었고, ‘평양’이었고 ‘버마’였기 때문에 원래 목적과 다르게 읽히는 면이 있다. 그리고 창작을 할 때도,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표현이 되고 그러다 보면 기자가 한 것처럼 보이게 되기도 한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조익상: 그게 당신 작품의 매력이고 독특함인 것 같다. 조 사코로 대표되는 저널리즘 만화와는 다른. 그 전통에서 좋아하는 작가는 누군가?


기 들릴: 나도 조 사코 작가 작품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 작품은 유머가 좀 더 가미되었고, 그래서 독자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한 아빠처럼 표현했으니까.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아트 슈피겔만(<쥐>)이다. (2012 앙굴렘에서 기 들릴이 대상을 받았을 때, 그의 우상 아트 슈피겔만이 심사위원이었다.) 마르잔 사트라피(<페르세폴리스>)도 좋아한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봐 온 모든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다음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걸로 인터뷰는 종료되었다. 기 들릴 작가와 인사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통역자에게 점심으로 먹은 게 뭐였냐고 슬쩍 물어봤다. 굴국밥이었단다. ... 그걸 그렇게 설명하다니. 그림으로 그려달랄 걸 그랬다. 이런 반전 있는 남자 같으니.


    

실제론 이렇게 생겼다. 자기 작품을 PPL 중.


매거진의 이전글 순식간-이미지들의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