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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기정 Aug 11. 2021

다시 진질의 바다로

청와대 마지막 밥상

요리책은 아닙니다만
모두를 위한 밥상이야기입니다



민주정부 최장수 정무수석  

꼬박 20개월이었다. 민주정부 최장수 정무수석이라고들 한다. 총선이라는 큰일을 치렀고, 코로나 긴급 재난지원금, 북미 정상회담, 남북정상회담, 지소미아 등등 숨 막히는 시간을 청와대에서 맞았다.

책상을 정리하는데 정무수석 임명장이 보인다. 나는 정무수석에 임하면서 ‘정책에 민심의 옷을 입히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그 일에 충실했는가. 20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는 정무란 무엇일까. 무엇은 성과가 있었고 무엇이 부족했나. 방향과 속도는 어떠했는가. 생각이 많다.


청와대에서 만났던 밥상들  

청와대에 일하는 동안 먹었던 밥들을 돌아본다. 대통령의 전국 경제투어 때는 미리 가서 사전점검을 하고, 또 후속 점검을 위해 가서 그 지역의 밥들을 먹었다. 부산, 대구, 강원도, 충청도, 대전, 전남까지. 지역색이 물씬 풍기는 그 밥들이 잊히지 않는다. 지역이 겪는 어려움은 닮은 데가 있었다. 처지가 비슷해서 그랬을 것이다. 경제투어에서 만난 밥들은 가장 맛있는 밥이면서도 가장 많은 숙제를 떠안게 되는 밥이기도 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우리 지역의 문제들을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청와대 구내식당 밥도 좋았다. 늘 싱싱한 야채가 많이 나왔고, 맛있는 사과는 ‘1인 1쪽씩’이라는 엄중한(?) 원칙도 즐거웠다. 그것은 대통령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었다. 대통령님이 내어주시는 밥은 영빈관 식사와 상춘재 식사, 그리고 관저 식사가 있다. 영빈관 식사는 국빈 방문, 혹은 국정 파트너들, 중요한 기념일에 귀빈을 초대해서 밥을 먹는 공간이다. 상춘재는 원래 식사하기 전에 잠깐 머물던 스몰 토킹의 공간이었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대통령과 직원들이 현안을 보고드리고, 의논하며, 격려하는 ‘밥 먹으면서도 일하는 곳’이 되었다.     


관저에서의 마지막 밥상

관저 식사는 설날과 추석날, 그리고 임명장을 받거나, 퇴임할 때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는 밥이다. 나 역시 청와대 근무자로서 마지막 밥상에 앉게 됐다. 대통령님과 여사님, 그리고 비서실장이 함께하는 밥상이다. 맛있는 밥과 반찬에 청주가 곁들여졌다.

두 시간 가까운 식사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간다. 내가 올리는 말씀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힘이 들어가는 것은 국가균형발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광주 이야기다. 이제부터는 '균형발전 특보'라는 생각으로 온 힘을 기울여보겠다는 내 말에 대통령님은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러면서 ‘선점’의 중요성에 대한 경험의 말씀을 주신다. 광주에 지금 돌아가는 것이 결코 빠른 것이 아니라는 결심같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생각해보니 2016년 내가 독일로 떠나기 전, 당시 문재인 후보님과 5.18국립묘역을 참배한 후 무돌주막에서 짚불 돼지고기와 두부, 막걸리로 점심식사를 했을 때도 대통령님은 먼저 준비하는 정치에 대해서 말씀을하셨다. 전망을 갖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깊이 고개가 숙여진다.      


무등산으로 돌아오다

무등산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내 마음의 고향이 무등산인데 청와대 생활을 하다 보니 무등산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멀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광주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무등산이다. 8월의 무더위도 겁나지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무등산은 나를 쉽게 안아주지 않는다. 마치 산이 나를 밀어내고 내가 오르는 것을 막아서는 것처럼 숨이 차고 힘에 부친다. 한발 한발 오르는 것이 천근만근 짐을 지고 오르는 느낌이다. 너무 힘들고 포기하고 싶다. 그래서 무등산을 한참 동안 가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고 몸이 하기 쉬운 일들로 소일하며 산을 피해 빙빙 돌았다. 하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무등산이 버티고 있다. 애증일까. 산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로부터의 작은 변화를 꿈꾸다

내 정치의 이유는 광주의 변화다. 언제나 광주를 꿈꿨고, 광주의 변화를 수도 없이 고민했다. 한순간도 변함없이 내 마음은 늘 그러했다. 그렇다면 광주의 변화를 고민하는 나의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고심 끝에 술을 끊었다. 언제까지라는 작정은 없지만 술을 참는다. 술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던 시절들을 지나왔다. 술이 있어야 정치도 있다고 생각하는 측면도 있었다. 술 없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두려움도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아니다. 술은 끊었으되 술자리는 즐긴다. 오히려 그 자리가 무척 흥미롭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보이고, 내 옆자리 사람의 말이 들리고, 그 사람과 마주한 또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린다. 술에 취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인다.

다음 날 아침에도, 술자리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말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흐릿한 거미줄처럼 아련하던 기억이 소낙비가 쏟아지고 난 뒤 여름날처럼 명료하고 시원하다. 술을 잃고 두 귀를 얻었다.

그리고 살이 빠지기 시작한다. 게으름의 상징처럼 불룩했던 뱃살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몸이 가볍다. 비행기를 타는데, 주민번호를 확인한다. 주소를 다시 묻는다. 왜 그러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사진이 달라진 것이다. 옷도 맞는 것이 없다. 몸이 가볍고 정신이 새롭다. 즐거운 변화가 시작됐다.      


다시 무등산을 오르며 변화를 생각하다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무등산 정상을 오른다. 숨쉬기가 편하다. 어느 길로 가도 산이 나를 품어 준다. 팔개월여 매주 토요일마다 산행을 계속하고 있다. 무등산 중독이라고 해야 할까. 급기야 요즘처럼 더운날도, 비오는 날도 빼지않고 오른다.가벼운 비를 맞으며, 또 쏟아붇는 비에 우산쓰고 걸으며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시노라면 머리속이 깔끔 상쾌해져 온다.

내 몸의 작은 변화를 겪으며 광주를 생각한다. 광주는 어떻게 변화할까? 광주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꿈꾸고 있을까. 대통령은 상상의 정치를 주문하셨다. 내 상상의 그물은 자치와 분권에 펼쳐져 있고 몇년전부터 그려보던 광주성장이 다시 상상의 시작이다. 그를 위해 작은 차이는 넘어서고 크게 상생하는 도시연합을 그려본다. 나의 상상력으로 증명하자. 원대한 큰 그림, 치밀한 밑그림을 그려가며 광주의 미래를, 광주의 변화를 생각하자.     


청와대 밥상이야기 연재를 마치며

청와대에 있는 동안 써 내려간 일기를 계산해보니 원고지로는 1만 5천 장이 넘고 페이지로 250장에 달한다. 그저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퇴근이후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메모 한 것뿐인데. 한글 11포인트 작은 글씨로 25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기록이라니. 사실 못다 한 이야기가 더 많고, 놓친 이야기들이 더 많을텐데, 머릿속을 기록함으로써 정리하는 오랜 습관이 남겨둔 두툼한 일기들 가운데서 ‘밥상’만을 추리고 기억을 덧붙여보았다.

여기에 담아둔 밥상뿐 아니라 많은 밥들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차마 숟가락을 들 수조차 없던 날들이 있었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밥알을 삼켰던 날들도 많았다. 그래도 모두가 고마운 날들이었다.

정치란 하루하루의 밥상을 행복하고 넉넉하게 하는 일이고, 미래의 밥상까지 잘 준비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늘 한다. <강기정의 청와대 밥상이야기>는 그런 고민들을 담아보았다. 소찬이지만 맛있게 드셔주길 바란다.  


   



그동안 <강기정의 청와대 밥상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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