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하나
요리책은 아닙니다만
모두의 밥상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허무했던 그 날의 소고기국
무를 넣고 푹 끓여낸 소고기 뭇국을 참 좋아한다. 깊고 개운한 소고기 국물에 부드러우면서도 칼칼한 무와 대파가 잘 어울린다. 뜨끈한 소고기 뭇국 한 그릇이면 속이 제대로 풀리고 어쩐지 따뜻한 위로를 받은 기분마저 든다. 거기에 쌀밥을 한술 말아먹으면 구수함이란 게 추가된다. 진심 마음 깊은 곳까지 채워주는 음식이 소고기국이다.
이 맛있는 소고기국에 따라오는 기억이 있다. 기억 하나는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8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던 때였다. 소고기국에 쌀밥이야 늘상 귀한 음식이었지만 교도소에서는 명절에나 맛볼 수 있는 특식 중의 특식이다. 안동교도소의 추석날 아침, 제발 많이 담아달라 사정사정을 해서 건더기가 제법 푸짐한 소고기국과 쌀밥을 배식받았다.
간만에 마주한 소고깃국에 밥을 말아 요즘 표현으로 그냥 ‘순삭’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나친 ‘순삭’은 탈을 부르는 법, 금세 속이 틀어 올랐다. 급체를 한 것이다. 결국 그 귀한 소고기국과 쌀밥을 다 쏟아내고 말았다. 그 허탈한 심정을 말로는 다 못한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도 소고깃국 아까운 생각만 들었으니 말이다.
소고기국이 놓인 밥상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다
또 하나의 소고기국 이야기는 2020년 봄, 코로나 정국에서다. 2020년 5월 26일, 주요 일간지에는 전통시장 축산물 지수가 전월 81.3에서 122.5로 큰 폭으로 상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재난지원금을 받은 시민들이 가족들을 위해 모처럼 소고기 국거리를 샀기 때문이라 했다. 이 소식을 접하신 문재인 대통령님은 가슴이 뭉클하다 하신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허리띠를 졸라맸던 국민들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셨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가슴이 뭉클했다. '세금 낸 보람을 느꼈다',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댈 데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 헌정사상 최초의 재난지원금을 받은 사람들의 여러 소회들이 이어졌다. 평소에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국가라는 존재를 재난지원금을 통해 다시 생각해보았다는 말인 것 같았다.
나 역시 살아오는 동안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국가권력이 시민들을 짓밟는 불행한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과연 국가가 무엇이길래 이런 일들을 자행하는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도 그런 물음의 연장선상이었다. 국가란 무엇이며 정치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소고기국이 놓인 단란한 가정의 밥상을 떠올리며 다시 그 질문을 던져본다. 삶이 흔들릴 때 국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창고를 지킬 것이냐, 풀 것이냐
지금도 코로나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당시 상황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국경이 막히고 거래가 끊기는 초유의 사태였다. 감염병의 공포는 일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거리의 버스킹이 사라지고, 지역축제가 취소됐다. 수출길은 막히고, 소비는 말라갔다.
아마도 청와대 20개월 중에 단일 사안으로 가장 많은 회의를 했을 것이다. 수석과 실장, 보좌관들 전원이 참석하는 회의, 당정청 회의, 시작했다 하면 두세 시간을 넘기는 격론의 장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소비 진작을 위한 마중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견이 갈렸다. 창고를 지킬 것이냐 풀 것이냐, 취약 계층을 두텁게 보호할 것이냐, 넓게 지급할 것이냐, 우리의 재정 능력과 재정 건전성을 충분히 검토하되 국민들의 마음이 꺾이지 않을 집단지성의 결론이 도출되어야 했다. 재정건전성을 유지해 창고가 아무리 잘 지켜진들 당장 코로나 때문에 국민들이 나가떨어지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평소에 재정건전성을 양호하게 지킨 이유는 바로 위기일 때 쓰자고 함이다. 옛 춘궁기나 홍수에 구휼미를 푼 까닭이다.
상춘제 앞에 봄꽃은 피었건만
어느 날인가 목이 타들어 가도록 장시간 격론을 마치고 나오는데 상춘제 주변에 봄꽃들이 보인다. 동백과 목련이 화사하다. 시절은 이토록 어려운데 봄은 어김없이 제 할 일을 한 것이다. 노영민 비서실장과 잠시 산책을 하느라 뒤뜰로 방향을 트는데 문재인 대통령님도 함께 걷는다. 대통령님의 눈길도 이름 모를 꽃에 머물러 계신다. 잠시 꽃 앞에 멈춰 무슨 꽃인지 아느냐 물으신다.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 하는데, 깽깽이라고 하신다. 언제 저런 야생화 이름까지 알고 계셨을까 싶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꽃들이 피어나는 무서운 속도가 다시 마음에 어떤 시그널처럼 다가온다. 꽃이 피어나는 일을 미룰 수 없듯 생활이 돌아가는 일 또한 늦출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일은 그 어떤 이유로도 잠시 뒤로 미룰 수가 없는 문제다. 대통령님이 강조하신 재난지원금 지급의 3대 원칙은 긴급성, 소비 진작, 국가의 격려다.
그 가운데 긴급성을 생각하면 100% 지급이 답이다. 선별할 때 드는 비용과 시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부 지급 한 후 상위 30%가 자발적으로 고용기금으로 내놓는다면, 김대중 정부에서 처럼 금모으기가 이뤄진다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이름이 좋겠다는 의견도 함께 올렸다. 정례성도 아니고 일회성도 아닌 데다, 시급성을 다투는 지원금이니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이름이 적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화두, 불안을 덜어줄 사회적 안전망
2006년 국회의원 시절, 기초노령연금법과 장기요양보험법 제정을 추진하면서 했던 고민이 ‘사회적 안전판’이었다. 골자는 민간보험보다 공적보험을 늘리자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개인에게 삶의 안전판이 있다면 조금은 덜 내몰리는 사회가 될 수 있겠다.
자식들이 용돈으로 주거나 사적 보험으로 노후를 책임져 가던 일을 공적보험으로 돌리는 일을 독일 같은 나라는 비스마르크 때 이미 시작했다. 1880년대 비스마르크는 기업인과 관료들을 설득해 법정 노동시간제한과 일요일 휴무, 아동노동 제한을 비롯한 노동시장 규제를 도입한다. 이와 함께 ‘질병보험법’을 도입,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을 만들었다. 공적보험이 취약한 미국이 코로나 상황에서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필요성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잔혹하게도 재난은 사람을 가장 많이 차별한다고 하지 않던가. 특히 취약계층이 받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비상경제 3차 회의 모두 발언에서 대통령께서는 ‘곧바로’가 아닌 ‘신속히’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도 국민들의 고통을 아시기 때문이리라. 잘하고 있는 해외 대응사례를 배우라는 말씀과 더불어 우리가 이나마 방역대응을 해나가고 있는 것은 메르스 때의 경험과 교훈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메르스에서 코로나까지
2015년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을 때 메르스 사태가 터졌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께서 민주당 대표를 맡고 계셨다. 메르스 대책 마련을 위해 여야 회담이 열렸다. 회담의 주요 내용은 정부가 재난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아 방역 대책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는 여야 합의문이었다. 정책위 의장이었던 나와 원유철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 합의문의 문안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합의문에는 신종 감염병 환자 진료 등을 위한 공공병원 설립 및 격리 대상자 수용을 위한 자원 확보 방안과 후속 대책이 담겨있다. 또한 메르스 확산으로 피해가 극심한 평택 등에 대한 별도 지원 대책,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실크로드 경제 2015 등 국제행사 지원책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 메르스 관련 실무자로 만났던 분이 지금의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다. 문재인 대통령님은 정은경 청장을 그 때부터 눈여겨 봐 두셨는지도 모르겠다.
코로나의 대응 과정에서 지방을 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황을 점검하고 보고서를 만들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대응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이 전주시가 벌이는 착한 임대인 운동이었다. 구리시에서도 30% 임대료 인하 운동이 시작됐다. 시민들끼리 어려움을 나누는 상생의 모델이자 지자체가 세금 지원으로 힘을 보태는 방식이다. 지자체에서 들어오는 이런 소식들에서 희망이 보였다. 시민들의 삶을 지키려는 지방의 대응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이 발생하면 실제로 대응을 하고 복구해나가는 현장은 지역이다. 지자체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고 재난지원금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무수석실은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를 상대로 긴급 설문조사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지자체별 재정능력을 파악하고 전국적인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마련해야만 지자체가 선지급, 정부가 나중에 보전하는 현실적인 집행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허약한 우리의 자치분권
이렇게 지자체의 현실과 대응력을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레 지자체별 역량이 비교되어 보였다. 적극적으로 대책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는 지자체가 있는가 하면 대책이 없거나 따라가기 급급한 지자체가 보였다. 위기상황에서 더 선명하게 차별화가 되는 것이 리더의 철학과 판단력이었다.
하지만 리더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우리의 허약한 자치분권이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이다. 재난관리기금을 사용하여 재난지원금을 주고 싶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정안전부의 동의와 협의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정부에서는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선 재난지원금 지급 후 기금사용조례 개정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정부의 역량은 키우되, 지방의 권한을 높여야 한다. 우리가 풀어가야 할 소중한 숙제를 다시금 느낀다.
어려움을 건널 때마다 우리 사회는 진화하고 있는 걸까
'사회적 역량'이란 걸 생각해본다. 메르스에서 코로나로 이어지는 어려움을 겪어내며 우리 사회는 얼마큼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경우를 먼저 돌아본다. 당시 메르스 대응은 국회에서 했던 일들이라 어떤 면에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의 코로나 대응은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대응이다. 전면적 봉쇄냐, 부분적 봉쇄냐 부터, 특별기를 파견해 교민을 우송하고, 지자체를 설득해 격리시설을 마련하는 일까지 맞춤형 선례는 없었다. 마스크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터지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다음을 생각하고 가야 했다. 고통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사회의 진화이기 때문이다. 우리정부가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격상시키는 정부조직법을 개편한 것도 그런 이유다.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또 다른 이름의 감염병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다. 감염병 예방법을 수립하고 권역별 질병센터를 두고, 감염병연구소를 설치하는 일이 다 그렇다. 우리 광주에 공공의료원 설립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늦었지만 그 일환이다.
국민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고, 앞으로도 또 다른 이름의 감염병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다. 그래도 어려움을 건널 때마다 진화하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을텐데, 우리 사회는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을 이겨내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꿈은 원대하고 하루하루는 조마조마하다.
<강기정의 청와대 밥상 이야기>는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