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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기정 May 10. 2021

간절한 사람이라야
비빔밥을 잘 비벼낸다

밥상 둘



요리책은 아닙니다만
모두의 밥상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밥알은 탱글하게, 나물들도 윤기나게 

무등산 주변에는 보리밥집들이 많다.  푹 삶아 보드라운 보리밥에 싱싱한 제철 나물들과 무생채, 고사리나 감자순 같은 건나물을 골고루 넣고 고추장 한 숟갈,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려 쓱쓱 비벼 먹는 소박한 음식이다. 외지인들에게 무등산 보리밥을 대접하면 우선 상다리가 부러지게 가득 나오는 나물 퍼레이드에 한번 놀라고 만원이 안되는 가격에 다시 한번 놀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람들마다 비비는 게 조금씩 다르다. 골라넣는 나물 종류도 다르지만 비비는 솜씨도 조금씩은 다른 것 같다. 자랑같지만, 사람들과 함께 비빔밥을 먹을 때, 유독 내 비빔밥이 맛있어 보인다는 평을 받곤 한다. 밥과 나물들이 잘 섞이게 해야 하지만 밥알이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 힘 조절을 하는 게 노하우인데, 핵심은 젓가락이다.  숟가락으로 눌러 비비지 않고 젓가락으로 비비면 밥알은 밥알대로 탱클하고 나물들도 윤기가 나면서 먹음직스럽다. 생각해보니 내가 서로 다른 것들을 잘 어우러지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것도 같다. 정말이다.


국가적 난제를 대화로 풀어낸 최초의 모델이라는 평가   

한국 정치사에서 협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은 2015년 공적연금개혁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이다. 당시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던 나는 혼란의 정국을 끝낼 길을 고심했다. 너무나 첨예한 이해관계가 뒤엉켜있는 상황을 잘 비벼내는 '비빔밥 요리사'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시작은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새누리당의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발의였다. 새로운 연금법 개정안으로 공무원사회는 물론 정치권에 큰 파장이 일었다. 여야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계속됐다. 우선 연금개혁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 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공무원 연금뿐 아니라 공적연금 전반을 동시에 개혁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논의 끝에 2015년 1월 6일 국회 특위와 정부, 공무원노조,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대타협 기구가 구성됐다. 민주당도 공적연금 발전 TF를 구성했고 내가 위원장을 맡았다. 200여 일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치열한 논의가 계속됐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대장정 끝에 기여율과 지급률을 단계적으로 조정하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잠정 합의안을 도출해냈다. 국가적 난제를 대화로 풀어낸 최초의 모델이자 공적연금 강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언론과 정치권에서 쏟아졌다.   

정무수석 임명을 앞두고도 강기정은 너무 강성이 아니냐는 평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 갈등의 현장에 있어 보지 않고 어떻게 갈등을 풀어낼 수 있겠냐, 강기정이 연금문제를 풀어낼 때부터 지켜봤다는 대통령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어려운 일들을 풀어갈 때면 늘 든든하게 지지해주셨던 대통령님 모습이 떠올랐다.    


꼼수가 아니라 진심양보는 통 크게  

협상을 풀어낸 소회를 기자들이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꼼수가 아닌 진심으로, 채찍질 아닌 인내심으로, 불통이 아닌 소통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답을 했을 뿐이다. 

꼼수가 아닌 진심으로 난제를 풀어낸 경험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2006년 노무현 정부,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보건복지위원회의 간사였던 나는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65세 이상 전체 노인 인구의 60%에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는 것이 골자였다. 

나중에는 '대한민국 대표효자'라는 칭찬과 박수를 받았지만 발의 당시에는 여러 곳에서 반대 논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내 마음은 간절했다. 기초노령연금법이 얼마나 우리 삶의 불안을 줄여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일일이 반대자들을 만나고 설득해나갔다. 진심을 다해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늘 한방이면 되는 특효약은 없는 것 같다. 반대 논리를 펴는 상대를 인정하고, 양보할 부분은 확실히 양보하면서, 진정성을 갖고 임할 뿐이다.     


아름다운 상춘재의 비빔밥 오찬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협치에 큰 무게를 두셨다. 특히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는 우리 정부 협치의 상징이며 대통령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여야 대화의 틀이었다. 하지만  2018년 11월 개최 후로 난항이 있었다. 1년 반을 멈춰있던 여야정 대화를 복원하기 위해 새로이 선출된 여야원내대표부터 만나야 했다.   

주호영, 김태년 두 원내대표와 함께 하는 오찬은 청와대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간인 상춘재에 마련됐다. 상춘재는 1983년에 지어진 청와대 부속 건물인데 주로 외빈 접견에 사용되는 한옥 공간이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에도 청와대 본관 정상회담 뒤에 환담을 나눈 장소다.  광주 MBC 오일팔 40주년 특집으로 기획된 <내 인생의 오일팔>의 대통령 인터뷰 녹화도 이곳 상춘재에서 가졌다. 

분위기도 아늑하고 딱딱하지 않은 공간이라 상춘재에서 차를 마시면 창밖의 녹음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대통령님은 상춘재를 참 좋아하셨다. 상춘재에서 차를 마시면 창밖의 녹음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풀어주는 것 같아 나 또한 상춘재가 좋았다.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의 활기찬 복원을 상춘재에 이는 바람에 빌어보았다. 이날의 회동이 코로나 위기와 공수처법 등 여야 협력이 필요한 사안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협치의 제도화가 이뤄지는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비빔밥과 탕평채, 모둠 해물 사태찜  

여야 원내대표의 이날 오찬도 역시 비빔밥이다. 앞서 2년전 있었던 5당 원내대표 오찬 회동 때는 각 정당의 상징색을 활용한 오색비빔밥이 나왔고, 첫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출범 성격으로 열렸던 세 번째 회동에서는 탕평채가 메인 메뉴로 나왔다고 했다. 

나도 몇차례 먹어본 적이 있는데, 탕평채 또한 협치의 소망을 담은 음식이다. 오죽 당파싸움과 갈등이 극에 달했으면 임금이 나서서 탕평채를 권했을까 싶긴 하다. 영조 임금은 공식적으로 당파를 거론하지 못하도록 했고 탕평채라는 음식을 유행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주재료는 흰 청포묵이다. 묵을 가늘게 썰고 미나리, 숙주나물, 쇠고기 볶음, 달걀지단과 구운 김이 한 그릇에 담겨 나온다. 다른 색깔의 재료를 버무려서 먹도록 한 것이다. 영조시대에는 다양한 색이 들어간 색동 주머니와 다섯가지 맛이 어우러진 오미자차도 유행이었다고 한다.   

오월 하순, 초록이 눈부신 상춘재의 원내대표 밥상에도 역시 계절 채소 비빔밥과 능이버섯 잡채가 올랐다. 소박하고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쉬운 음식이지만 정치의 밥상에 오르면 그 의미가 각별해진다. 함께 모여서 비빔밥을 잘 비벼먹는 것만으로도 메신저 음식 비빔밥의 역할은 훌륭하다. 두 원내대표가 회동을 마치고 가실 때 김정숙 여사님은 손수 마련하신 모둠 해물 사태찜을 선물로 싸서 건내셨다. 해물과 사태와 온갖 재료들이 잘 어우러진 이 음식에 협치의 소망을 정성스럽게 담으신 것이다. 

  

협치에도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야 원내대표는 상춘재에서 비빔밥 식사를 하시고,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셨다. 산책 코스는 상춘재에서 청와대 관저 뒷산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불상 석조여래좌상, 조선시대 정자인 오운정(五雲亭)으로 이어졌다. 청와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2018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청와대 내부의 명품 문화재다. 가톨릭 신자이신 대통령님과 불교신자인 주호영 원내대표, 기독교 신자인 김태년 원내대표가 석조여래좌상에 함께 고개를 숙이셨다. 이 역시도 협치로 가는 연속 선상일 것이었다. 만남이 있다 보면 반드시 성과가 나온다. 기브 앤 테이크를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꼬이지만 그래도 만나다 보면 요구가 있고, 요구가 있다 보면 소통이 시작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안다. 

'패스트트랙 정국'으로 여야가 경색되고, 몸싸움까지 가는 상황에서도 여야의 여러 의원님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분열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대화를 자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과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신뢰’를 쌓아가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과정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보았던 협치와 연정의 시스템

사실 정치는 도처가 갈등의 지뢰밭이다. 협치의 방식과 디테일은 매우 섬세해야 하고, 또한 시스템화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독일에 머물 때도 눈여겨본 부분이 협치와 연정의 시스템이었다.  독일 정치에서 연정의 전통은 독일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나치를 거치고, 극렬한 좌우대립과 승자독식 구도가 가져온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면서 독일은 연정이 가능한 선거와 정당구조를 제도적으로 만들어냈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이래 세 번을 연임하는 동안 집권당인 보수성향의 기독민주당- 기독사회당 연합과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과 함께 대연정 정치를 펼쳐가고 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1당이 과반을 넘지 못하도록 제도화되어있기에 다른 정당과의 연립이 필수적이다. 정당끼리의 연정이 깨지지 않기 위해서는 정당 간 협치와 견제 구조가 중요하다. 공존과 협치의 교과서로 독일 정치가 주목받는 이유다.

어렵게 제도화된 연정은 독일 정치의 건강성을 지키고 정당 정책의 실효를 거두는데 기여한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른 분당과 탈당, 다수당의 횡포 앞에 절망했던 상황들을 돌아보면 독일식 연정, 협치 시스템이 부럽다. 대통령 중심제에 양당 구도 하에서는 이러한 연정과 협치가 자리잡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낮은 단계에서라도 협치와 연정의 제도화를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 정치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와 보복 정치의 피해자는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메르켈이 슈뢰더의 정책을 이어가듯

협치와 연정은 어쩌면 지방정부에서 더 중요할지 모른다. 지방정부의 재정여건은 아직도 열악하다. 그 열악한 여건속에서 시작된 괜찮은 정책이 시정 주체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단절되어서는 안된다. 정말로 좋은 정책은 다음 시장이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애꿎은 시민들이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시절, 상황실장으로 호남의 대선공약을 만들었다. 이제 구체화되는 한전공대와 광주형 일자리 정책, AI산업, 전남의 해상풍력 등이 대표적이다. 내가 만든 대선공약들에는 지역민들의 염원과 지역의 미래가 담겨있다. 이 정책들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여러모로 애를 썼던 까닭이다.  

사실 독일 정치에서 제일 부러운 점을 하나면 꼽으라면 이 부분, 정책의 연속성이다. 빌리브란트에서 콜 수상으로 슈뢰더에서 메르켈로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이어받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시키고 완성시켜간다.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비빔밥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간절함만이 비빔밥을 끝까지 잘 비비게 한다는 것이다. 밥을 먹는 방식은 다양하다. 비빔밥 밥상을 차려낸 고생이 무색할 만큼 대충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밥을 끝까지 잘 비벼야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제대로 비벼내야지, 하는 간절함을 가진 사람만이 비빔밥을 잘 비벼낼 수 있는 게 아닐까. 대충 배만 불리면 된다는 유혹에 빠지기 않고 제대로 맛있게 밥을 비벼내려는 노력은 소중하다. 골고루 넣고 제대로 비벼야만 모두에게 영양가 있는 밥상이 되기 때문이다.     



 


<강기정의 청와대 밥상 이야기>는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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