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썬라이즈 호텔에서 일주일 살기
속초에서 일 년을 되돌아보며-
1년 만에 쓰는 썬라이즈 투숙기
속초에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이 투숙기는 일 년이 지나서 기록하고 싶었다. 피부로 현재와 과거를 비교해 보고 싶었다. 일 년 전 나는 이곳 속초로 떠나온 걸 매일 매시간 후회했다. 8월의 폭풍이 지나고 모든 게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작은 파도들이 계속 몰아쳤다. 작다고 생각해서 무시했던 게 결국 탈이 나버렸다. 당시에는 몸이 무너지는 것보다 현재 벌어진 일들을 수습하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서서히 무너지던 몸은 두 달 사이 얼음이 녹 듯 빠르게 녹아내렸다.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으며, 두통이 심할 때는 화장실에서 변기를 잡고 한참을 씨름해야 했다. 육아는 물론 일상생활도 힘들었다. 별별 병원을 다 가봤지만 특별하게 내려진 진단이 없었다. 환절기에 흔히 있는 비염 알레르기와 합병증으로 인한 축농증이 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경외과도 찾아갔지만 딱히 신뢰가 가지 않는 노의사가 망치 비슷한 걸로 내 무릎을 툭툭 치더니 '괜찮아요'라고 진단을 내려줬다.
그런 와중에도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일 선물 뭐 갖고 싶어?" 부엉이가 물어왔다. 베란다 바닥에 엄마라는 이름의 미안함에 완전히 눕지도 못하고 '언제든 나는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지를 보이며 어정쩡하게 반쯤 누워 있었다. "생일이 뭐야.. 그런 걸 우리가 생각할 겨를이 있어?"라고 부엉이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쉬다 와.
"호텔 예약해 놨어"
"그냥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뱉고 있는 부엉이를 연신 쳐다봤다.
"생일 선물이야"
근처 썬라이즈 호텔에서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다며 그냥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다 오라고 했다. 원래는 보름을 쉬라고 했지만, 나에게 일주일도 너무 과분하게 느껴졌다. 육아를 해야 했기에 부엉이가 일을 잠시 접는다고 했다.
일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과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생일 주간에 나는 일주일을 밖에서 머물기로 했다. 당일 부엉이와 다인이가 내 짐을 싣고 썬라이즈 호텔로 먼저 출발했고, 나는 당분간 나의 발이 되어 줄 자전거를 끌로 출발했다. 썬라이즈 호텔은 중앙 시장과 청초호 사이에 있는 오피스텔형 호텔이었다. 개인에게도 분양을 했기 때문에 에어비앤비나 네이버로 장기 투숙이 가능했다.
짐만 옮겨 놓고 부엉이와 다인이가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가 되는 건 생각보다 빠르고 쉽게 이뤄졌다.
숙소는 생각보다 깔끔해서 조금 놀랬다. 비즈니스급 호텔이니 그냥 모텔보다는 나은 수준일 줄 알았다. 여기를 분양받으신 분이 관리를 잘하신 건지 깨끗했고, 긴 시간 머물기 부족함이 없었다. 전자레인지, 전기포트기. 밥솥, 건조대부터 인덕션과 세탁기도 같이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왔었다면 정신없이 비품과 편의시설을 체크했을 테지만 반쯤 감긴 눈으로 부엌을 쓱 훑어보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모든 적극성을 잃어버리고 싶어'
라며 한참을 누워있었다.
숫자를 셀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짐들을 정리했다. 너무 단출해서 깜짝 놀랐다. 다다와 1박 2일로 여행 갈 때는 어깨부터 팔목, 양손을 다 사용해도 짐이 넘쳐나 부엉이가 몇 번을 움직였어야 했는데, 작은 백팩 하나에 일주일 머무를 짐이 들어갈 수 있다니.. 내가 원하는 심플한 삶인데 어쩐지 조금 울적한 기분도 함께 들었다.
가장 중요한 난방기와 가습기를 부엉이가 미리 세팅해 주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런지 속초는 가을이 되면 습도를 확인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입술은 바짝 말라버리고 이미 건조해서 갈라질 대로 갈라진 내 손과 발은 따끔거리며 아프기까지 했다.
숙소는 난방이 잘 됐지만 온도를 올리면 답답해서 자꾸 발코니 문을 열게 됐다. 적당히 온도를 올리고 난방기를 틀고 가습기를 가동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를 찾았다.
하루 이틀은 그냥 누워서 일드와 밀린 영화만 봤던 거 같다. 임신 초기에 행했던 내 평생의 가장 게으른 행동들.
다시 하려니 너무 짜릿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다니 그냥 너무 즐거웠다.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영화 보기에만 몰두했다. 부엉이 전화에 시간을 확인하니 다다가 잘 시간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조금 생겨 썬라이즈 호텔 바로 밑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비수기라 그런지 로비도 거리도 한산했다.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돌아 탐색을 마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음식을 딱히 좋아하지 않다 보니 한참을 서성이게 됐다. 내가 편의점을 찾는 이유가 있다면 커피와 라면 정도 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휴식에 부엉이의 조건이 하나 걸려있었다. 라면은 먹지 않기. 종류별로 늘어진 라면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그냥 물과 주스 그리고 작은 김치 한 봉지만 사들고 다시 숙소로 올라왔다.
배달을 시킬까 하다가 집에서 가져온 삼계탕 밀키트가 생각났다. 그 와중에 건강을 챙긴 거라며 스스로 대견해했다. 부엉이에게 나는 약속대로 라면을 먹지 않고 나름 건강을 챙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인증샷을 보냈다. 부엉이는 다다의 저녁은 잘 챙겨줬고, 본인도 잘 먹고 있다는 둘의 저녁 식사 사진을 답장으로 보내왔다.
생각보다 잘 차려진 밥상 사진들을 보며 묘한 질투심과 안도감이 들었다.
이틀이 지나니 늘어져 영화를 보는 것도 점점 지루하게 느껴졌다. 새벽에 눈을 떠 청초호 감상을 마친 나는 유튜브에 '가벼운 아침 스트레칭'이라는 문구를 입력했고 대충 짧고 쉬워 보이는 영상을 틀었다. 쉬운 동작들인데 기름칠이 전혀 되지 않은 몸뚱이라 그런지 조금만 움직여도 툭툭 어디 하나 부러지는 소리들이 들렸다. 10분 동안 별걸 하지도 않았는데 땀이 송골송골 맺었다. 기분이 갑자기 너무 좋아져서 샤워를 하고 티비를 끄고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하루도 안돼서 다다를 호출 했다. "오늘 다다 데리고 오면 안 돼?" 지금 보니깐 일 년 전인데 엄청 작게 느껴진다. 새로운 집을 좋아하는 다다는 엄마 집이라며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짧게 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함께 양육을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쿨하게 다다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잠이 적은 나는 여전히 새벽에 일어났고, 발코니에서 청초호를 보다가 시내로 걸어 나왔다. 아침에 먹을 식량을 찾으러 나왔지만 대부분 문이 닫혀있었다. 아침 식사가 되는 곳은 들어가기 부담스러워 파리바게뜨가 문이 열 때까지 걷고 또 걸어 다녔다. 항상 북적거리는 모습만 보다가 휑하니 비어 있는 모습을 보니 여행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당히 낯설고 적당히 설레는 기분.
문뜩 속초 시내를 담아보고 싶었다. 내가 묵었던 층 끝 쪽에 발코니가 하나 있었던 게 생각이 났다. 사진 찍을 생각에 흥분해 발코니 문을 활짝 열었다. 한 명 서 있을만한 공간에 얇은 난간이 다였다. 그 순간 내가 약간의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생각이 났다. 손이 덜덜덜 떨렸는데 그래도 사진을 찍고 싶었다. 혹시라도 작은 움직임에 놀라 카메라를 떨어트릴까 봐 카메라 줄을 목에 칭칭 감았다. 다리는 11자를 넘어 최대한 마음이 놓일 때까지 벌려서 지탱했다. 그리고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거의 반쯤 눈을 감고 찍었다.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와 손을 보니 땀이 흥건했다. 그렇게 고층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 몇 장을 건졌다. 스스로 대견해하며 오늘 할 일은 끝났다며 다시 침대에 누워 영화를 봤다.
생일날 오전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질문에 집이라고 말했다.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이해관계도 필요했다. 그 모든 게 피곤하게 다가왔다. 적당히 잘 있다는 말이 나와 엄마의 정신 건강을 위해 최선의 대답이었다. 생일이라며 미역국을 끓여 먹었냐고 물었다. 또다시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있고,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엄마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울적한 기분이 밀려온다. 솔직하기 어려운 사이.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보며 누워있는데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속초로 비슷한 시기에 넘어와 의지하고 있는 친구 부부였다. 생일이지 않냐며 미역국을 끓였다고 했다. 호텔 입구로 나오라는 말에 놀란 나는 서둘러 밑으로 내려갔다. 조수석에서 건네 온 도시락. 주차가 어려워 서둘러 떠나며 생일 축하한다고 했다. 축하한다고 창문으로 손을 흔드는 모습과 묵직하게 쥐어진 내 두 손을 번갈아 올려봤다.
당시 결혼한 지 10년. 어느덧 생일날 미역국을 스스로 끓여먹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매번 생일날 꼭 '미역국이 아니어도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즐거우면 되지'라고 말하고 다니던 나였는데, 누군가 날 위해 차려준 밥상은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처음으로 속초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친구들과의 인연은 적당한 선에서 멈췄을지 모른다.
오랜만에 티비를 끄고 밥을 먹는데 집중했다. 청초호를 보면서 정말 한 입, 한 입 정성스럽게 먹었던 거 같다. 부엉이도 이날 내가 가장 부러웠다고 했다. 부엉이가 보쌈을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이걸 만든 친구는 정말 음식을 잘한다. 정말 정말 잘한다.
바다와 호수의 그 사이
여기 청초호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갔다 돌아오는 배들을 본다.
그 시간에 하늘과 바다색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다.
마치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듯-
지금은 비록 타인의 하루를 보며 감탄하고 있지만,
나도 언젠가 내 하루의 색을 만나고 싶다.
- 당시 썼던 일기 내용 중 일부-
순식간에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마지막 날은 여행의 마지막이 그랬듯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끌거리고 할 일 수북하게 쌓여있지만 돌아오니 또 그대로 즐거웠다.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다에게 그만 어지르라고 핀잔을 줬지만 최고의 생일 주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일 년 전 내 모습을 돌아보니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그때처럼 많이 아픈 건 아니다. 여전히 크고 작은 일들은 자주 나를 찾아오고, 내 시간이 없는 건 여전하다. 바뀐 게 있다면 그냥 내가 속초에 조금 적응했다는 것뿐이다. 무방비로 맞이했던 속초의 가을과 겨울을 조금씩 준비하고 있고, 지도 앱을 켜지 않고,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탈 수도 있다. 자주 가는 식당이 생겼고, 얼굴을 보면 눈인사를 나누는 이웃도 생겼다. 이렇게 사소한 발전을 피부로 느끼고 나니 지난 일 년이 그저 아프기만 했던 일 년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