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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Oct 26. 2021

작은 기억들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안녕하세요. 아침저녁으로 많이 쌀쌀해졌네요.

오늘은 「눈 먼 자들의 도시」로 유명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작은 기억들」이라는 책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포르투갈 출신의 대문호가 생의 말년에 자신의 뿌리인 유년기를 회고하며 쓴 산문집이죠.

유년기의 에피소드들이 장 구분도 없이 200페이지 넘게 주욱 이어지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박정훈 번역자가 이 책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쓴 '옮긴이의 말'에서도 언급했듯이 1920~30년대 포르투갈이라는 낯선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끊임없이 등장하는 낯선 지명과 이름들이 머릿 속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일본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으며 일본 지도를 수도 없이 들여다보고 주요 등장 인물들의 이름을 한자 공부해가며 외우던 그 열정이 이제는 무뎌졌다고 해야할까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배운 점도 있죠. 책을 꼭 공부하듯 정독하며 읽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아무튼 머리를 멍하니 비우고 되는대로 읽어가다보니 낯선 발음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이런 문장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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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기어가는 뱀, 밀 까끄라기를 이고 가는 개미, 여물통에서 먹이를 먹는 돼지, 굽은 다리 위에서 흔들거리는 두꺼비. 그리고 바위, 거미줄, 쟁기 날이 일으켜놓은 밭이랑, 버려진 새 둥지, 복숭아나무 줄기에 붙어 있는 수지의 마른 눈물, 땅에 달라붙은 풀 위에서 빛나던 서리, 혹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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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하나하나를 뒤이어 서서히, 그러나 생생히 살아나는 풍경들.
그 기억 속 풍경이 그저 단조로운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린 지금의 고향을 바라보며 작가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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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내가 궁금한 건 이것이다. 도마뱀들은 과연 어디 몸을 숨길 수 있을까?

 한때 나였던 아이는 훗날 오만한 키를 가진 어른이 되어 살피듯 풍경을 대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소년기 내내 늘 풍경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풍경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야! 장관이구먼! 전망이 멋져!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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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풍경의 일부였습니다. 제가 동네 아이들과 헤집고 다니던, 아스팔트 사이로 잡초가 솟아올라있는 아파트 앞 조그만 공터의 일부였던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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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그 순간에는 영혼, 의식, 정신, 어떻게 부르건 간에 우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그것들이 어떤 충일감을 맛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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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작가는 잊을 수 없는 유년기의 한 순간을 마치 마술사처럼, 그 어떤 마법보다 환상적으로 그려냅니다. 그 문장들을 다 옮기지 못해서 아쉽네요. 그러나 마법은 끝나고, 글은 10대 소년의 일상으로 곧 돌아옵니다. 가족들, 친척들, 거리의 풍경들과 아가씨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포루투갈의 일상이 유유히 흘러가다가 글의 마지막 무렵, 노작가는 불쑥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유년기를 함께 보냈던 어린 사촌의 죽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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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디니스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유년의 황금기가 끝난 뒤에 각자는 자기 인생을 찾아 떠나야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어느 날엔가 아지냐가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마리아 엘비라 이모에게 불쑥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주제 디니스는 어떻게 지내요? 그러자 그녀는 군더더기 하나 붙이지 않고 대답했다. 주제 디니스는 죽었단다.

 우리는 이런 식이었다. 안으로는 상처받지만 겉으로는 강했다. 세상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 누군가 지금 태어나고, 그 뒤에 살다가, 결국 죽는다. 그러니 빙빙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 주제 디니스는 세상에 왔다가 떠났다. 그 순간에는 눈물이 흘렀지만 죽은 사람들 때문에 계속 울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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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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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쓰이지 않는 한 오늘날 주제 디니스를 기억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믿고 싶다. 우리 둘이 수확기 발판에 올랐다가 그만 균형을 잃어버리고 밀밭 이곳저곳 마구 휘저은 일이 있었다. 그때 이삭이 어떻게 함부로 잘려나가는지, 우리가 어떻게 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게 되었는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태주 강변에서 함께 먹은 녹색 껍질의 수박, 그 최상품 수박을 여전히 기억할 수 있는 사람도 내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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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억은 모국어를 떠나 그가 발음하기도 힘들 언어를 거쳐 제 앞에서 펼쳐졌습니다. 함께 먹은 수박, 그 수박이 자란 강변 풍경부터, 목을 타고 흘러내리던 과즙까지, 두 아이의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그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 어떻게해도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제멋대로지만,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 순간, 눈을 책장에서 들어 두 아이가 뛰어다니는 풍요로운 강어귀 한 켠에 함께 가만히 머물러봅니다.


매번 늦어지는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 편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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