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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Nov 23. 2021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는 어디로 흐르는가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오수완), 아픔이 길이 되려면(김승섭)

가끔 그런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지만 무언가 할 말이 있습니다. 손에 닿지 않는 단어들이 어둠 속을 떠돌고 있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더 알맞은 표현을 찾기 힘드네요. 오수완 작가의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해야 할 말이 입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행간에 쌓여있는 그 많은 배경들, 작가의 삶과 시대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한참 읽다가도 무엇을 읽고 있었는지 맥락을 놓쳐 몇 장이나 앞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하다 보면 급격히 피로가 몰려듭니다. 하나하나 깊이 살펴 숨은 의미를 찾아내고 체계를 세우고 제 나름의 질서를 부여해보려 해도 이미 늦었다는 좌절감, 한때는 즐거움이었지만 지금은 지난한 작업이 된 이 독서라는 유희가 결국 제가 살아가는 하루 일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회색 감정이 찾아옵니다.

         

예전에 흠뻑 빠져들었던 세계가 지금은 터무니없이 작아진, 오래된 놀이공원처럼 바래져 보입니다. 작고 오래된 다락방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책들, 껴앉고 잠들던 그 소중한 책들이 먼지 가득 쌓인 종이 더미로 느껴집니다. 책에 대한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고 있으리라 애써 위로하려 해도 결국 독백으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절망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만의 도서관을 아무리 꼼꼼하게 채운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가, 쓸모없는 책들의 도서관일 뿐’         

 

이런 상념에 사로잡혀 글이란 녀석을 저만치 치워두고 그저 일상을 반복하던 어느 밤, 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 그리고 그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어디에도 없는 책들”이라니 무슨 말장난일까요? 이 수수께끼 같은 단어가 설명하는 대상은 “사가본” 책입니다. 개인이 소장용으로 만든, 요즘 유행하는 자비출판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자비출판이라는 최소한의 출판 형식조차 갖추지 못한 책, 개인이 노트나 종이에 기록하고 표지를 만들고 책 모양으로 묶은 이야기들이죠. 이런 사가본 수집을 특화사업으로 진행하던 호펜타운이라는 작은 지역의 도서관은, 관광 수입을 우선하는 경제논리에 밀려 폐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폐관을 앞둔 도서관의 유일한 사서는 한 기증자의 컬렉션을 카탈로그 북으로 남깁니다. 총 서른두 권에 달하는 책의 장르는 다양합니다. 상영되지 못한 발레극의 극본부터, 꿈을 기록한 일기, 도발적인 사진집에,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키는 오컬트물, 그리고 무한의 기원을 다룬 수학책까지. 사서는 애인이 꼼꼼히 스케치한 표지와 함께 한 책당 대여섯 페이지 정도로 작가와 내용을 소개하고 평론가의 평이나 자신의 감상을 간략하게 덧붙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곁들이죠. 전임 사서, 도서관 시설을 관리하는 부부, 그리고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하는 지역주민들이 나름의 사연으로 얽힌 책들과 함께 등장하여 각 장의 주인공이 됩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다루는 장르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며 나름의 매력을 뿜어냅니다. 그중에서도 이야기와 독자의 관계를 다룬 "프로스페로의 꿈", "무한의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계속 변해가는 기억을 기록하는 "찻주전자가 있는 정물화"라는 이야기가 제겐 인상 깊었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책을 구할 수만 있다면 꼭 읽어보고 싶더군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책이 마음에 드실지 궁금해기도 하네요. 아무튼 그렇게 독특한 서른 두 개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함께 이어지다가 폐관식을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어디에도 없는 책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가죠.    

      

그리고 며칠 뒤, 정리되지 않은 감상을 남겨둔 채 오래전 전자책 서가에 담아놓은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을 펴보았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도 의사가 되지 않고 사회역학자 라는 생소한 길을 선택한 학자의 올곳은 삶이 오롯이 담겨있는 책이죠. 오수완 작가가 그려내는 환상적인 이야기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트랜스젠더, 그리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 등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상처 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데이터로 만드는 작업을 해나갑니다. 대기업과 권력기관 등 이익집단이 자신의 요구에 맞추어 가공하는 데이터, 소외된 이들의 상처를 교묘하게 가리는 조작된 통계를 거부하고, 학자로서 자신이 믿는 과학적 합리성을 지켜가며, 가려진 사회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갑니다. 차분하지만 열정이 담긴 글을 읽어나가다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지식욕으로 쌓아두었던 책을 생각 없이 뒤적거리다 그간 피해오던 무거운 이야기를 제대로 만났다는 걸 말이죠.          


그런데 이 무거운 이야기를, 엄밀한 숫자와 그래프 아래로 꾹꾹 넘칠 듯 눌러 담은 희망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읽고서 저는 왜 오수완 작가의 책이 다시 떠올랐을까요? 데이터를 무기 삼아 사회의 무관심과 편견에 맞서는 학자의 조근조근한 목소리와, 어디에도 없는 서른두 권의 책들을 표지까지 공들여 차근차근 묘사해나가는 작가의 목소리가 왜 제게 겹쳐서 들려왔을까요?         

 

두 책의 저자는 이야기가 끝나고 책을 덮으려 할 때 문득 목소리를 바꾸어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먼저 학자는, 책의 마지막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후배들에게 수년 전 띄운 편지를 다시 독자에게 보내죠. 편지에서 그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이렇게 바꾸어 던집니다.    

      

‘     

꽃이 필 것이라는,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대 없이 어떻게 나는 계속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          


그리고 작가는, 어디에도 없는 책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사서를 통해 마지막 장에 밝힙니다. 그렇지만 제게 더 큰 반전은 이렇게 시작되는 작가의 말이었습니다.      

    

“     

이 이야기를 쓴 2019년에는 작가를 그만두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두 사람은 그때, 각자의 벽 앞에 서게 된 것이겠죠. 의학도로서,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 소외된 이들 편에 서서 함께 걷고자 하는 양심이 부딪힌 사회의 무관심이라는 벽,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읽히기를, 그래서 그 독자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를 바라는 작가의 오랜 꿈이 맞닥뜨린 출간이라는 벽. 하지만 그 커다란 벽 앞에서 그들은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 길을 오랜 시간 묵묵히 걸어왔을 테죠,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전혀 다른 두 권의 책, 내용도 어조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견고하게 버티고 선 벽을 뚫고 그 너머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닿으려는 고독하고도 치열한 전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너무나도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억지춘향식 해석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제게는 두 목소리가 낮지만 단단한 하나의 울림으로 들려옵니다. 이렇게 말이죠.


“이 이야기는 바로 지금, 벽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바로 ‘당신’에게 들려주려고 쓴 이야기랍니다.”          

 

마지막으로 인용문 두 개로 제 멋대로 붙인 글 제목에 대한 대답을 해볼까 합니다. 먼저 책을 덮고도 마음을 한참 서성이게 했던 오수완 작가의 말입니다.          


“     

당신이 어떤 책을 찾고 있는데 그 책이 세상에 없다면 그 책을 써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는 것     

”          


그렇지만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이야기는 어딜 향해 흘러가는 것일까요? 캐나다의 노작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그러니 작가가 글을 쓰는 건 바로 ‘독자’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아닌, ‘당신’인 독자를 위해. ‘친애하는 독자’를 위해     

”          

- 마거릿 애트우드, 「글쓰기에 대하여」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새 바람이 매서워졌더군요.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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