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은 Apr 20. 2022

홍수 난 김에 피서 갈 뻔

80년대 강남 살기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허리를 낮춰 집 안의 물을 양철 양동이로 쉴 새 없이 퍼낸다.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줄지어 있는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가을 추수 광경 같기도 하다. 허리를 굽혀 겨울엔 눈을 치우고, 허리를 낮춰 봄에는 새싹을 캐고, 여름엔 허리를 접고 물을 퍼낸다. 매년 그렇다. 홍수는 매년 여름 어기는 일 없이 온다.


매년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작은 가전이나 물건을 위로 위로 옮기고, 모래주머니로 둑을 쌓고, 옷가지로 문틈을 막는다. 물이 쥐 나 바람이나 먼지도 아니고…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을 옷가지로 막는다는 발상은 보통 참신한 게 아니다.


매년 벌어지는 상황이어서 자료도 많을 텐데, 올해도 기상캐스터는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현장을 찾아가 홍수 피해 상황을 속보로 내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알았으면 미리 좀 대비할 것이지. 학생들에게는 미리미리 예습, 복습을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면서 어른들은 줄곧 복습만 한다.


그나저나 이미 다 젖었는데 팔다리는 왜 걷어 젖히고 저럴까? 저 양동이나 양재기로 물을 퍼낸다고? 콸콸콸 계단 아래로 경쾌하게 내달려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를 보니 턱도 없다. 가만있자, 그런데 왜 매년 물이 들어오는데 이사를 안 가고 거기 살지? 올해도 내년에도 수년 후에도 장마철마다 홍수가 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한 치 앞을 못 보면 또 몰라, 한 치 앞을 매년 보면서 이사를 안 가고 재난을 기다렸다는 듯 맞이한다.


집에 물이 들어오면 저 동네 얘들은 학교를 안 가나? 우리 동네에도 물이 들어차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학교에 안 갈 텐데 말이다. 하지만 삼성동에서 홍수 때문에 학교를 안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매년 재난재해를 뉴스로 접하고 홍수나 태풍이나 장마가 끝나면 피해 성금 모금이나 옷가지나 구호 물품 등 모은다. 홍수 피해를 입은 시민들은 학교 강당이나 체육관에서 물이 빠질 때까지 모여 지낸다. 알록달록 널린 옷가지와 돗자리, 삼삼오오 모여 노는 아이들, 한편에 쌓여 있는 음식물들은 흡사 창경원 꽃놀이 장면과도 같다. 나도 저기 가고 싶은데…

하지만 삼성동에서 그렇게 모일 일은 없다.


1984년 그해는 조금 달랐다. 뉴스에서는 기록적인 호우로 강남도 잠긴다고 시시각각 속보가 나왔다. 잠수교가 찰랑찰랑하더니 꼴딱꼴딱 자맥질을 한다. 그렇게 잠기고 나서 한참을 올라오지를 못한다. 잠수교가 잠기다니... 아빠는 늘 625 같은 전쟁이 발발해도 잠수교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반포대교가 잠수대교 위에 지어졌으니 폭격에도 잠수교는 안전할 거라고 했다. 강북에서 일하는 아빠는 여차하면 잠수교를 건너 강남에 있는 우리에게로 온다고 했다.


이북에서 피난을 온 아빠는 늘 비상사태에 대한 반응이 날카롭다. 그런 잠수교가 잠긴 지 오래고, 그 위 반포대교 다리에 표시된 위험수위가 시시각각 기록을 갱신한다. 옆 동네 잠실도 이미 침수 피해에 허덕인 지 며칠 째다. 압구정도 잠긴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었다.


1984년 홍수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북한에서 우리나라로 구호물품을 보내왔다. 북한 쌀이 어떻다느니, 옷가지가 어떻다느니… 물이 빠지자, 홍수 피해 얘기는 쏙 빼고 북한에서 보내온 구호 물품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아빠는 고향에서 보내온 쌀을 먹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성동에서는 북한 쌀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망원동 유수지 수문이 붕괴되며 사재기가 시작되었다. 홍수가 나면 물도 불도 안 들어온다. 날로 먹거나 편하게 먹는 먹거리가 필요하다. 라면이며 식료품들이 매대에서 사라지고 구멍가게도 닫는다. 아빠는 수완이 좋다. 어디선가 라면 한 박스와 담배, 과자 등을 들고 들어온다. 쑥색 미제 캔 음식도 박스도 잔뜩 들고 온다. 스팸이며 캔 소시지, 캔 정어리, 초콜릿, 껌… 그리고 여기저기 집구석 구석을 정비한다.


아주 어릴 땐 아빠가 남파 간첩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생각한 적이 있다. 산을 탔고, 비상사태에 대한 대비나 대처에 매우 능했으며, 군용 물품을 좋아했고, 이북 사투리를 사용했으며, 일반적이지 않고 어딘가 사회와 부적합했고, 무엇보다 얼굴이 까맸다.


우리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전투나 피난 태세를 갖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가 지하실에서 검정 고무 뭉텅이 두 개를 가지고 올라온다. 언니와 나에게 주며 주유소에 다녀오란다. 주유소에 가서 바람 넣으러 왔다고 말하면 여기에 바람을 채워 줄 거라고. 여차하면 우리 모두 이 튜브에 올라 타야 하니 빨리 채워 오라고. 주룩주룩 비를 맞으며 오천 주유소로 갔다. 상황이 이러하니 도로에는 다니는 차량도, 오천주유소에는 주유하는 차도 한 대 없다.


“아저씨, 바람 넣으러 왔는데요”

고무 뭉텅이에 바람이 슉슉 들어간다. 한참을 들어간다. 바람을 다 채우니 동그란 튜브 모양이 잡힌다. 시커먼 군용 튜브다. 크기가 얼마나 큰지, 바로 세우니 내 키를 훌쩍 넘는다. 그나저나 저런 게 왜 우리 집에 있지? 언니와 내가 군용 튜브 하나씩을 들고 뒤돌아서는데 주유소 아저씨가 혼잣말한다. 혼잣말을 들으라고 한다.

“아이고, 이 날씨에 피서를 가는 사람이 다 있네”

이건 피신용이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런 튜브를 피신용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창피한 건지, 이 난리 통에 피서를 가는 것이 더 창피한 건지 짧은 순간, 계산해 봤다.

아무 말 안 하는 것을 택한다.






언니와 나는 다시 비를 맞으며 집 쪽으로 걸었다.

바람을 넣은 군용 튜브는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어깨에 이고 지고 몇 걸을 옮기다가 포기한다. 튜브를 몸 앞쪽으로 놓고 굴렁쇠 굴리듯 내 앞으로 굴리고 따라간다. 언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었다. 언니와 뭔가를 같이 하면, 어느새 나 혼자 언니를 상대로 내기를 하고 있다. 언니를 이기려고 튜브를 힘껏 굴린다. 이런,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찬 군용 튜브가 걸음아 나살려라 앞으로 치고 나간다. 죽을힘을 다해 다다다다 따라간다. 같이 가~, 기다려~ 누가 봐도 재미있어 보였을 듯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혀를 끌끌 차는 할머니 한 분과, ‘어이구 이 난리 통에’하는 탄식하는 아주머니와, ‘아무리 철이 없어도!’라는 아저씨들의 소리를 서라운드로 들었다.

이 난리 통에 비를 맞으며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시는지…


1984년 여름, 삼성동에서 장마 통에 튜브 가지고 피서를 가려하는 가족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좀 억울하다. 대피용이었다고 지금이라도 꼭 말하고 싶다. 우리 가족은 홍수를 피해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엄한 아빠는 많다. 능력 있는 아빠도 많다. 좋은 아빠, 나쁜 아빠, 이상한 아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엉뚱한 아빠를 가져 보지 않은 사람은 주위에 별로 없는 것 같다.


살면서 겪을 수 없는 많은 일을 겪은 가족이 있었다.

장마나 홍수처럼 예측은 가능하지만, 결코 대비할 수 없고, 싫으나 좋으나 같이 해야 하는 그런 아빠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역사 바로 잡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