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관계에 필요한 것
적절한 무관심, 적당한 거리
결혼 후 신혼집을 꾸미는 방법의 하나가 집안 곳곳에 예쁜 식물 화분을 들이고 키우기였다. 날이면 날마다 들여다보면서 혹여 목이 마를까 물도 주고 영양제도 사다 뿌려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잎들은 꺼멓게 변하며 죽어갔다. 이때는 몰랐었다. 왜 죽어가는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식물 초보 집사들이 식물을 죽이는 가장 많은 원인이 과한 습도라고 한다. 지나친 애정과 관심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요즘 우리 집에서는 한 다육식물의 기세가 놀랍다. 이름하여 천대 전송. 아몬드 모양의 초록 잎들이 사이좋게 다닥다닥 붙어 자란다.
몇 달 전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손가락 크기만 했는데 어느새 제 키와 잎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허리가 휠 정도로 자랐다. 지지대를 받쳐주려다 잎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헉! ''미안해''를 연발하며 잎들을 주워 모았다. 생기를 잃지 않은 통통한 잎들을 그대로 버리기에는 아쉽고 미안하기까지 했다. 혹시나 하고 비어 있던 화분 흙을 고르고 씨앗이나 되는 양 슬쩍 흙을 덮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여다본 화분 안에는 포도씨 만 한 작은 잎이 자라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자연히 떨어져 있거나 실수로 떨어뜨린 잎들만 보면 빈 화분들로 옮겨놓게 되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서 찾아가 보면 여지없이 삐죽이 새잎을 올려내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물을 주고 가끔 바라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새로이 자리 잡고 자라난 화분들이 벌써 다섯 개가 되었다. 식물들에게 최고의 환경은 적절한 무관심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내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같이 울고 웃어줄 사람이 주위에 있는 사람은 행운아임이 틀림없을 테다. 하지만 마냥 부럽지만은 않다. 지나친 애정과 관심이 식물을 죽이듯 인간관계에서 다툼을 만드는 광경을 종종 마주했기에.
예전에 남편 회사 발령으로 인해 부산에 살면서 볼링 클럽에 가입한 적이 있다. 처음엔 회원 간 우애가 돈독하다고 느꼈다. 볼링 게임 후 식사를 마친 뒤에도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서 다과를 즐기며 수다 떨다가 저녁까지 먹고 나서야 흩어지곤 했다. 그러다 회원들끼리 소위 '지지고 볶는' 상황이 펼쳐졌다. 서로 간 거리가 너무 가깝고 관심이 지나쳐서 간섭도 많았기 때문이라 보였다.
서울로 이사 오자마자 들어간 볼링클럽은 올해로 13년째다. 우리 9명의 회원은 매주 목요일에 만난다. 10시 반부터 시작해서 두 시간 정도 볼링을 즐긴 후 점심을 먹는다. 식사 후엔 커피를 마시며 수다 떨다가도 2시경에는 꼭 헤어진다. 일부러 만든 게 아닌, 긴 시간을 같이 지나오면서 자연스레 정착된 규칙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헤어지면 일주일 동안은 서로 감감무소식이다.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9명의 회원이 다툼 없이 잘 지내온 비결은 적절한 무관심과 적당한 거리임이 틀림없으리라.
사람들은 좋아하는 만큼 가까이 있으면서 많은 걸 알고 싶어 하고 공유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서 상대방의 자유를 제한하고 부담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사실 적절하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과 적당하게 거리를 둔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관심을 줄일수록 거리도 멀어지게 마련일 테니.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좋은 거리.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지만 잊지 않고 한 번씩 돌아봐 줄 수 있을 만큼의 관심.
만나면 그저 반갑고 만나지 않는 동안에는 잠시 잊고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