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ybacchus@naver.com] ‘아치의 노래, 정태춘’(고영재 감독, 5월 18일 개봉)은 생활에 찌들어 일시적으로 망각했던 인권과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아쉬웠거나, 아름다웠거나, 혹은 암울했던 시절의 추억과 기억을 소환해 주는 정말 소중한 다큐멘터리이다. 정태춘(68)과 박은옥(65)은 불멸의 포크 부부이다.
두 사람은 1978년과 79년 1년 차이로 각각 데뷔했다. 70년대의 대한민국 문화는 분노와 저항의 사조가 강했다. 민중의 항거는 이승만의 독재를 무너뜨렸지만 박정희가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마땅할 군대를 이끌고 강제로 권력을 찬탈했고, 이에 뜻있는 문인과 예술인들은 비분강개를 쏟아 내었다.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태춘은 타고난 음악성 덕에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지만 집안 사정 탓에 음대 진학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한다. 그리고 작사, 작곡 능력을 인정받아 78년 ‘시인의 마을’, ‘촛불’ 등이 수록된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스타덤에 오른다.
박은옥은 그의 ‘회상’과 ‘윙 윙 윙’을 받아 이듬해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역시 유명 가수가 된다. 두 사람은 시작부터 솔메이트이었고, 영원한 음악의 동반자였다. 그가 무겁고 탁한 톤이라면 그녀는 맑고 낭창했다. 뛰어난 시인이자 작곡가와 대단한 핑거링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와의 만남.
정태춘이 위대한 뮤지션인 이유는 대중음악 가사라기보다는 전통 정서를 함유한 현대시라는 표현이 더 걸맞은 시상의 노랫말과 포크, 록, 국악 등을 포괄하는 음악 세계에 있다. 게다가 다소 탁한 자신의 보컬을 물 흐르듯 유연하게 펼쳐 나가는 솜씨가 유려하다. 횔덜린 같은 아티스트의 아티스트이다.
데뷔 직후 스타덤의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1980)에서 불교를 도입했고, 3집 ‘새벽길’(1982)은 국악과 악수함으로써 스스로 상업적 실패의 길로 우회했다. 그럼에도 84, 85년 부부의 이름으로 ‘떠나가는 배’와 ‘북한강에서’로 거푸 성공했다.
부부는 지구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서울음반, 성음, 아세아레코드, 서라벌레코드 등 토종 메이저 레이블이 시장을 장악했던 1988년 당당하게 독립 레이블 ‘삶의 문화’를 설립하고 6집 ‘무진새노래’를 발표하며 인디 뮤직의 시대를 선언한다. 서울올림픽으로 글로벌에 들떠 있을 때 ‘우리 것’을 외친 것.
그리고 1990년 대중음악사는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를 세운다. 정부 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에 정면 도전한 7집 ‘아, 대한민국’을 발표한 것. 독재 정권은 공륜의 사전심의제도를 통해 대중문화 콘텐츠를 제 입맛대로 철저하게 통제해 왔다. 마음대로 필름을 자르고 금지곡을 정해 왔다.
독재 정권 시절 가요 음반에는 ‘건전 가요’ 수록이 의무였다. 그런 암울했던 1983년 ‘국뽕’ 건전 가요가 등장하는데 바로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었다. 정태춘의 동명이곡은 바로 그런 현실을 비꼬고, 개탄하며, 획기적인 혁명을 부르댔다. 93년 같은 맥락의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발표한다.
이런 저항과 구체적인 소송 결과 95년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이듬해 시행되며,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결국 사전심의제도는 군사독재정권시대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정태춘의 공적은 이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니기에 위대하다.
방송에 출연하며 제도권에서 인기와 부를 누려도 될 위치의 그는 그러나 정부와 방송사의 사전 심의에 반발해 그런 천박한 기득권을 과감하게 내던진 채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체질에도 안 맞는 밤무대에 서기도 한다. 그러다 85년부터 ‘얘기노래마당’이라는 소극장 콘서트 프로그램을 만든다.
그 전국 순회공연으로 대중과 호흡을 함께하며 사상과 이념을 확고하게 정립한 뒤 청계피복노동조합 후원을 시작으로 전교조 합법화 지지 투쟁에 참여한다. 참교육 실현을 위한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로 전국을 순회하며 투쟁을 지원하기도. 또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에도 참여한다.
“인간이 발명한 금융이라는 발명품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잔인하게 약자를 짓밟고 잉여 생산물로 인한 과잉 소비가 초래한 빈부 격차와 환경 오염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미래를 거부하고, 문명화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라고 소망을 밝힌 그는 자신을 이상주의자라고 규정짓는다.
그는 학생 운동가도, 노동 운동가도 아니다. 정치 운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사회 운동가이다. 그는 1990년 3월 한겨레신문 사회면에서 작은 박스 기사 하나를 보게 된다. 마포 한 연립 주택 지하의 화재로 5살, 4살 남매가 질식사한 것. 맞벌이 부모는 남매를 보호하기 위해 문밖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곡을 만든다. 정말 참혹하고, 처절하고, 비참하며, 사무치는 장송곡이자 진혼곡이다. 현대는 이른바 네오-리버럴리즘의 시대이다. 대한민국은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정태춘의 시대에는 대학생이든 공장 노동자이든 젊은이는 거의 진보 성향에 자유 추구 정신이 강했다.
그런데 현대 젊은이에게서는 정치적 성향이 안 보이거나, 보수 우익인 경우가 흔하다. 그들의 관심의 최전방이 오로지 경제이기 때문.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라는 흥분제로 온 세상에 최면을 건 결과이다. 정태춘은 이 시대의 네오-마르크스, 네오-장 자크 루소가 아닐까? 걸작 다큐의 탄생! 손수건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