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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도비 Feb 15. 2023

<400번의 구타> 앙투안은 반항하지 않았다.

프랑수아 트뤼포 ‘400번의 구타’ 영화 리뷰

 세상은 누군가의 행동이 왜곡된 것으로 가득하다. 친구의 폭력이 사소한 장난으로 왜곡되기도, 애인의 가스라이팅이 거대한 사랑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동정 없는 세상을 향한 이유 있는 반항.' 400번의 구타의 주인공인 앙투안(장 피에르 레오)의 행동을 설명해 놓은 포스터의 문구도 위의 예시들처럼 왜곡된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 이름을 찾는 사소한 장난과 거대한 사랑처럼 앙투안의 행동도 제 이름을 찾아야 마땅하다.





1. 앙투안은 반항하지 않았다.


 영화는 교실에서 친구들과 선생님 몰래 성인 잡지를 돌려보다 혼이 나는 앙투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선생님의 말과 친구들의 반응으로 볼 때 앙투안은 교실에서 제일 말을 듣지 않는 반항아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반항아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들은 모두 다 하고 다닌다. 아버지의 물건을 훔치고, 학교에 빠지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하지만 이건 포스터 담당자와 어른들, 그리고 세상이 바라보고 해석한 앙투안의 행동일 뿐이다. 앙투안은 반항아가 아니다. 앙투안은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은 의도를 가져야 한다. 선생님의 지휘를 추락시키고자 하는 의도, 부모님을 수치스럽게 하고자 하는 의도, 세상의 체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의도.


 하지만 이 의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만의 것이다. 앙투안의 가장 친한 친구인 르네가 바로 이런 아이다. 르네는 선생님이 앙투안의 에세이 과제 표절을 운운하며 그를 교실에서 (또) 쫓아내고 정학 처분을 내리자 “저는 교실에서 쫓겨나도 아무 상관 없어요. 하지만 학생을 교실에서 내쫓는 건 불법이에요.”라고 얘기하며 앙투안을 지지하고 선생님의 권력에 도전하는데, 이때 선생님은 처음으로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인다. 이러한 르네의 명확한 의도가 담긴 진짜 반항은 그가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고 앙투안을 내쫓는 선생님의 행동이 선생님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르네는 누군가의 행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도출됐는지 알고 있고 때문에 의도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앙투안은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혼란스럽다. 세상의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자신이 잠에 들 때면 자신을 키우기 싫다며 언성을 높이는 부모님도, 자신의 잘못에만 크게 질책하고 기대를 단념한 채 직접 쓴 에세이의 진심을 알려고 들지 않는 선생님도. 따뜻하게 잘 곳도, 마음 편하게 먹을 곳도, 재밌게 놀 곳도 제대로 마련해주지 않는 세상도. 그들이 자신에게 그러는 이유를 모른다.


 오프닝 시퀀스,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거대하고 압도적인 파리의 풍경은 앙투안이 느끼는 세상의 시점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학교를 빠지고 르네와 함께 놀러 간 곳에서 앙투안이 타는 통 놀이기구는 끊임없이 돌아가며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앙투안의 앞에 있는 사람들의 형상을 일그러뜨린다. 세상을 향한 앙투안의 감상과 꼭 닮았다.



 따라서 앙투안은 의도 있는 반항이 아닌 자신에게 닥치는 액션에 대한 본능적이고 일차원적인 리액션을 했을 뿐이다. 자신을 버거워하고 미워하는 부모님을 피해 가출하고, 자신을 교실에 들여보내주지 않는 선생님을 피해 결석하고, 아무도 구제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타자기를 훔치고.


 시종일관 무표정인 앙투안의 표정은 반항이 즐거운 의연한 말썽쟁이의 표정이 아닌 자신에게 닥쳐오는 수많은 세상의 고난과 매질이 혼란스러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의 그것이다. 앙투안은 표정조차 결정하지 못한 채 고난에 맞서고 매질하는 방망이를 피하거나 부쉈을 뿐이다. 반항은 세상이 왜곡하여 본 앙투안의 행동일 뿐, 앙투안은 반항하지 않았다.




2. 최초의 반항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앙투안은 세상에 대해 이해한다. 르네가 청소년 교화시설에 갇힌 자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고, 엄마에게서 부모님이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허탈 뒤에 찾아온 건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앙투안은 그제야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한 탐구를 마친다. 이제 그는 그가 사는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 안다.



 탐구를 마친 앙투안은 그제야 진짜 반항을 한다. 아무렇지 않게 축구를 하다 창살 밖으로 나가 달린다. 그건 친구가 부추겨서도 아닌, 액션에 대한 리액션도 아닌, 앙투안이 시작하고 앙투안이 방아쇠를 당긴 그만의 최초의 반항이다.




3. 반항의 끝에


 앙투안은 창살 밖으로 나간 뒤 정말 한참을 달린다. 그리고 자신이 꿈꿔왔던 장소인 바다에 도착한다. 앙투안이 바다에 당도한 건 청소년 교화시설이 바다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부탁 같지도 않은 부탁 때문이 아니라 꿋꿋하고 망설임 없이 나아간 앙투안의 걸음걸음 덕분이다. 세상에 대한 최초의 반항은 앙투안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영화를 보며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계속 생각났다. 그래서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과 400번의 구타 속 앙투안의 공통점을 나열해 보자면,

영화 내내 두 사람 다 탈규범적인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지만 고의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얼마나 반항적인가, 불순응적인가에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기보단 그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더 신경이 쏠린다. 이로 인해 그들에게 연민을 갖게 되고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 진다.

경찰이나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권력적으로 우월한 사람한테 뒷덜미를 잡히고 끌려다니는 장면이 많다.

호송차 장면의 연출이 인상 깊다.


 *제목이 오역이라는 말이 많던데 왓챠피디아에 나와있는 원제는 Les quatre cents coups이다. 일단 직역하면 400번의 구타가 맞다... 어떤 사람은 직역해서 문제라 하던데 프랑스의 '아이들은 400번을 맞아야 제대로 큰다.'라는 속담까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잘못 번역한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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