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의 은밀한 동기...
나의 최종 학력은 박사 중퇴, 즉 박퇴이다. 대학원에서 바이오 관련 전공으로 석사를 마치고 나서, 박사 과정에도 들어가긴 했지만 내 생활도 없이 밤늦게까지 계속 연구를 하는 것도 싫었고, 대학원 선배들 그리고 지도교수님과 함께 깡소주를 마시고 하숙집에 돌아와서 형들에게 주정부리며 토하는 것도 싫었다. 결국 지도교수님이 미국에 출장을 가셔서 연락이 안되는 틈을 타서 과사무실에 이미 허락받았노라고 둘러대고 거의 야반도주하다시피 해서 휴학을 했었기 때문이다. 휴학 이후 자연스럽게 퇴학 조치가 되었고, 지도교수님과는 정년퇴임하시는 시점에 찾아뵙고 야반도주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이런 내가 직접 창업까지 할 거라고, 또 이만한 규모의 임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꾸려나갈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약사에서 연구개발 기획, 벤처기업에서 사업개발을 경험하고, 투자기관을 공동 설립해서 바이오벤처에 투자도 해보면서 결국 최종 선택지로 정한 것은 창업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경험했던 업무 중에 투자업무에 대해서는 가장 관심이 많았고, 사회생활 초기부터 여러 차례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인연이 닿지 않거나 다른 취업 기회에 밀려서 무산되기 일쑤였다. 결국 의기 투합해서 투자기관을 직접 설립하기까지 하고, 맘에 드는 바이오벤처에도 신나게 투자해봤지만 정작 재미는 없었고 내 흥미도 금세 식어갔다. 아마 사업개발이나 경영에 내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적고,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기만 하는데 머무르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뭏든 그렇게 지루해하면서 사무실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중에 친구가 나에게 지방에 소재한 연구소에나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 연구소에 흥미로운 신약기술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친구 자신은 이미 다른 기술로 2번째 창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내가 들어보고 관심이 있다면 직접 창업을 해보는게 어떻냐는 제안이었다.
연구소를 방문했을때 기술 개발자 분들은 이미 연구소 기업 형태의 창업을 종용하는 다른 투자기관의 심사역, 파이프라인 도입에 관심이 많은 국내 제약사 연구소 관계자, 그리고 중견 바이오기업을 퇴사해서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경영진 등 많은 경쟁자로부터 구애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기꺼이 우리를 위해 그 신약기술을 소개해주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그 기술 분야의 매력도와 사업성을 확신할 수 있었고, 어떻게 하면 이 기술을 이전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전략까지 이미 생각이 흘러가고 있어서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다음 미팅에는 구체적인 제안을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투자기관 사무실로 복귀한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제안서 작업에 몰두했다. 결국 연구소의 기술 개발자 분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를 파악해야 했고, 나는 무슨 차별화된 역량이 있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기술을 사업화할 것인지 보여주는 청사진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경쟁자들로부터의 제안을 물리칠 수 있도록 장단점을 비교하는 표도 꼭 필요했다.
다음 미팅에서 나는 준비한 제안서를 발표했고, 결국 그 기술을 이전받는데 성공했다.
가끔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외부 업체분들을 만나면 종종 듣는 질문이 창업을 결심하게 된 동기나 계기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처음부터 창업을 할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지도 않았고, 그것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것도 아니었다. 바이오 전공자로서 인생 테크트리를 타고 있던 와중에 창업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매력적인 기회를 포착했을 뿐이었고, 다만 지금까지의 내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한번쯤 시도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조그마한 자신감, 나를 도와줄 든든한 조력자의 존재 등이 나의 최종 결심을 앞당겼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