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아니라 꿈을 쫓는 창작자라면 만들고 싶은 것을 가슴에 품고 사회에 진출합니다. 그러나 그걸 이루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경제적 여건이나 수요층의 특성, 유행 등등 이유는 많습니다. 이때 만약 모든 여건이 충족되고 꿈꾸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창작자든 열정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수능을 마친 수험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던 모범생이 시험을 끝내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언가에 몰두하곤 합니다.
누구든 하나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런 모습을 [P의 거짓](이하 피구라)에서 느꼈습니다. 초반부에는 세계관을 소개하고 플레이 방식을 가르쳐주기 위해 친절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습니다. 특히 뒤에서 습격할 때 잡기 공격을 하려면 정확한 각도를 찾아야 하는데, [피구라]에서는 그걸 시각적으로 알기 쉽게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소울류 게임에선 유저가 직접 감으로 터득해야 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선 본 작품이 꽤 친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초보자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좋은 기술을 잘 가르쳐 준다는 건 그만큼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악의적인 레벨 디자인이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이렇듯 본 작품의 개발자는 지금껏 작업하면서 습득한 기술과 철학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 하고 싶은 것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피구라]에서 모범생이 어떤 일탈을 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히려 이성보다 욕망이 이긴 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후방 페이탈 어택으로 적의 동료를 빠르게 해치우지 않으면 힘들어지는 전투
복잡해보여도 이해하기 좋은 레벨 디자인
BM이나 운영 등을 제외하고, 콘텐츠와 기획을 봤을 때 우리나라 게임은 유저에게 꽤 친절한 편입니다. 온라인 RPG에서 퀘스트를 할 때를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만약 NPC에게 임무를 받으면 지도에 목표를 자동으로 설정해주고, 플레이 화면에 위치도 띄워주고, 퀘스트 목록 창에 해야 할 일도 알려줍니다. 길을 너무 잘 알려줘서 탐험과 모험을 느끼기 힘들 정도입니다.
요즘은 대화를 스킵해도 퀘스트를 깰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개발진은 패키지 게임인 [피구라]의 맵을 복잡하게 만들면서도 우리나라 게임 특유의 친절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필드를 직접 탐색하는데 서투른 유저들도 학습시킬 정도로 능숙하게 유도했습니다. 튜토리얼 지역인 크라트 기차역에서는 우회로와 숏컷을 알려주는 순간이 있습니다. 계단에서 내려왔을 때 정면에 숏컷을 보여주고, 창까지 띄워주며 설명도 해줍니다. 보스는 그 다음 주변을 돌아봤을 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 플레이어는 길이 복잡하지만 입체적이라고, 중간 지점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동일한 문이지만 한쪽에서만 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해쳐나가면서 만나는 몬스터와 무기의 배치 순서가 매우 절묘합니다. 초반에 인형들에게 시달린 후 그들의 약점인 전격 무기를 상점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당 챕터 보스에겐 전격 무기가 안 통하지 않습니다. 이는 [피구라]가 한 무기로만 진행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이후 베니니 공장을 클리어하여 화염 속성 리전 암, 무기, 연마석을 얻고 카커스를 해치우러 갑니다. 카커스는 화염 속성에 취약하기 때문에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챕터 초반부에는 산성 무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마침 그때 보스가 인간형이라서 무기 파괴가 가능합니다. 그 외에도 무기를 적절하게 배치한 부분은 많습니다.
무기를 먼저 준 후 사용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는 편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유저가 무기를 다양하게 쓰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화염 무기를 얻은 직후 만나는 보스는 화염에 내성이 높습니다. 그 다음에 만나는 보스는 화염에 취약하지만 무기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무기를 강화할 때 들어가는 재화도 넉넉하게 주는 편이 아니라서 유저는 선택을 소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강화 재료를 앞으로 얼마나 얻을지 예측하기 힘들다
나쁜 것도 잘 배운 레벨 디자인
게임에서 스트레스는 다양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소울류에서는 위협 방식을 유저에게 각인시키는 기능을 가지기도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패턴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왕의 불꽃 푸오코라는 보스의 경우 오른손으로 내려치는 공격을 주로 합니다. 이때 엇박도 심해서 유저가 당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래서 오른쪽으로 돌면서 피하는 파훼법이 터득할 수 있습니다.
생김새로도 공격 방식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매번 되는 것도 아닙니다. 푸오코를 만나기 전 유저는 삽 인형과 최소 한번은 대치합니다. 그의 패턴도 보스처럼 내려치는 공격이 많아서 거리를 벌리거나 옆으로 피하면 됩니다. 그러나 삽 인형이 등장하는 곳은 좁은 길목이거나 원거리 적이 근처에서 대기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유저는 몇번 죽음을 겪으면서 해법을 어렵지 않게 알아내지만, 몇몇 요소 때문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파훼법을 방해하는 장소 선정
이렇듯 소울류에서 봤었던, 악독한 레벨 디자인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적을 외나무 다리에 배치한 경우도 많고, 난간이 살짝 튀어나온 절벽에서 유저에게 내려가라고 하기도 하며, 사각에서 습격하기도 합니다. 이런 레벨 디자인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건 개인적으로 성 프란젤리코 대성당에서 올라가는 구간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외나무 다리가 많아서 조심해야 하는데 정면이나 대각선에서 적이 원거리 공격을 합니다. 가드를 해도 주인공이 뒤로 조금씩 밀리기 때문에 낙사 위험은 여전히 높습니다.
지름길 찾기 전까지 꽤 고생해야 한다
특이한 건 이런 요소가 초반 스테이지에선 잘 안 보인다는 겁니다. 평소 습관대로 설명도 친절했고, 유저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대성당부터 점점 악랄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번 게임에서 모범생의 일탈이 느껴진다고 한 건 이 때문입니다. 마치 자기가 당했던 걸 유저들에게 똑같이 주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전 문단과 합쳐서 정리하자면 [피구라]의 레벨 디자인은 파악하기는 쉽지만 헤쳐나가기는 어렵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게임에서 본듯한 풍경
변수를 만드는 전투
수능을 끝낸 수험생은 지금껏 못했던 것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맵이 소울류 게임에서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개발자가 가장 정성을 쏟은 곳은 역시 전투 파트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액션 게임의 꽃이기 때문입니다. 본가라고 할 수 있는 프롬 소프트웨어 개발사에서도 각 작품마다 유도하는 전투 플레이가 다 다릅니다. 옛날 작품은 비교적 수비적이었다면, 요즘은 점점 공격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편입니다. [피구라]의 전투는 그 중 하나에 치중된 것이 아닙니다. 수동성과 능동성을 둘 다 잘 수행하여 자신의 변수를 제어하고 적의 변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피구라]의 전투는 패턴 파악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통 유저는 상대방의 공격에 대응하고, 빈틈을 파고들어 공격합니다. 이때 대응이 수동성, 공격이 능동성입니다. 그리고 [피구라]에서 이들을 잘 수행했을 때 만들어지는 변수로는 가드리게인과 무기 내구도, 펄스 전지 회복, 그로기 등이 있습니다.
페이지로 잘 설명해준다
우선 가드리게인과 무기 내구도, 펄스 전지 회복은 주인공의 변수입니다. 캐릭터가 상대방의 공격을 가드로 막았을 때 피해량이 가드리게인으로 전환되는데, 그 희미한 게이지가 사라지기 전에 공격하면 체력을 일정량까지 회복할 수 있습니다. 무기 내구도는 유저가 공격이나 가드를 성공했을 때 소모됩니다. 어느 정도 떨어지면 위력이 감소하고 무기가 튕겨나가기 때문에 적의 빈틈을 잘 봐서 장비를 연마해야 합니다. 펄스 전지는 체력 포션 같은 것으로, 전부 다 썼을 때 공격을 일정량 성공하여 1개를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가드나 공격에 성공하면 좌측 상단에 있는 체력이 변한다
주기적으로 무기를 갈아야 한다
펄스 전지를 전부 썼을 때 공격해야 회복된다
적의 변수로는 대표적으로 그로기가 있습니다. 유저가 강공격이나 퍼펙트 가드로 게이지를 다 쌓으면 적은 그로기 가능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때 다시 강공격을 하거나 페이블 아츠를 명중시키면 적은 모든 모션을 종료하고 일정 시간 쓰러지는 그로기에 빠집니다.
그로기를 성공적으로 걸면 적이 쓰러진다
앞서 나열한 변수는 전부 유저에게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그로기를 성공시키거나 가드리게인으로 체력을 회복하려면 공격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그때 무기 내구도도 떨어져서 역전당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도 공격을 통해 펄스 전지를 회복하거나 그로기에 성공하면 반전의 기회가 생깁니다. 결국 [피구라]의 전투는 변수의 연속입니다. 유저에게 안 좋은 변수는 최대한 억누르고, 유리한 건 어떻게든 끄집어 내야 합니다. 그 상황 제어를 위해 가드와 퍼펙트 가드, 회피를 상대의 패턴에 따라 잘 선택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적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유저의 공격 기회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창출되는 변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소울류 게임은 대부분 정답 맞추기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는데, [피구라]에서는 그게 기본으로 깔려야 전투가 제대로 돌아갑니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이번 게임의 전투는 소울류 게임보다 [몬스터 헌터]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로기를 빨리 걸어야 펄스 전지를 많이 회복하지만 그만큼 무기 내구도가 위험한 상태
이것만 보면 [피구라]의 전투가 굉장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p기관이라는 업그레이드 요소가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면 공격으로만 가능했던 가드리게인을 퍼펙트 가드로도 할 수 있게 되고, 변수와 관련된 수치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즉, 변수를 발동시키는 트리거를 다양하게, 그리고 하나의 트리거로 더욱 다양한 변수가 일어나도록 바꾸는 겁니다. 이를 통해 유저는 게임을 진행할수록 변수를 더 잘 다루게 됩니다.
변수 창출과 이에 따른 보상 위주다
참고로 다른 변수도 있습니다. 퍼펙트 가드로 적의 무기를 파괴하는 것과 유저가 공격에 여러 번 성공하여 상대에게 속성 상태 이상을 거는 것입니다. 다만 무기 파괴는 무기를 든 적에게만 해당하고, 속성 상태 이상은 유저가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디버프가 아니라서 부가적인 변수로 남아있습니다.
차원의 나비는 필드에서 발생하는 변수이다
모범생의 욕심
필자는 게임의 재미란 본인이 잘한다고 느껴질 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소울류 게임의 재미는 정답을 맞추는 것, 즉 개발자의 의도를 알아낸 후 알맞게 수행할 때 일어납니다. 포괄적으로 설명해서 그렇지, 사실 소울류에서 요구하는 정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어떤 공격에는 오른쪽으로 회피하고, 다른 공격에는 가드하는 등 각 패턴에 알맞은 대응을 하는 것입니다. 필드를 뒤져서 좋은 아이템을 찾거나, 함정을 파악해서 극복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런 장르의 게임에선 오답일 때엔 막심한 손해를 주지만 정답을 맞추면 큰 혜택을 안겨줘서 유저를 원하는 방향으로 잘 이끌어감갑니다.
차례대로 가드, 퍼펙트 가드, 회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피구라]에서 창출해야 할 변수는 플레이어의 행동을 적절하게 유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변수가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에게 그로기라는 변수를 발생시키려면 우선 공격을 이어나가고, 그로기 가능 상태로 만들어야 하며, 이때 강공격이나 페이블 아츠를 써야 합니다. 이 세 단계가 금방 지나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생각보다 길고 까다로운 과정으로 느껴집니다. 원체 난이도가 높은 게임이다보니 죽지 않으면서 전투를 이어가는 1단계부터 힘듭니다. 어찌 저찌 그로기 가능 상태로 만들었다고 쳐도, 적이 계속 움직이는 바람에 강공격이나 페이블 아츠를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상대가 패턴을 쉬지 않고 구사하는 바람에 기회를 날린 경험을 필자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변수라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우면 추구할만한 가치로 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패턴 대응에만 급급하다가, 거기에만 집중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적이 그로기 가능 상태에 걸려도 유저에게 공격 타이밍이 안 나오면 기회만 날린다
물론 그렇다고 그로기 가능 상태의 장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 시스템은 유저의 긴장감이나 집중력, 변별력 등을 효과적으로 자극합니다. 그리고 적이 그로기 가능 상태에 걸렸을 때 투포환이란 아이템을 사용하면 바로 그로기에 걸립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단점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유저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정답을 만드는 과정이 단순하고 원초적일수록 유저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로기 가능 상태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걸 던지면 바로 그로기를 걸 수 있지만...
추천
개인적으로 [피구라]는 소울류 게임에 관심이 있는 초보자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뒤에서 습격할 때 알맞는 각도를 잘 가르쳐 주거나, 맵의 구성이 알기 쉬운 것이 너무 편했습니다. 다만 이번 추천에 확신이 들지 않은 이유는, 현재 [피구라]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패치 내용 중 일부
이 게임은 [피구라]는 23년 9월 27일과 11월 15일에 패치를 하여 난이도를 하향 조정했습니다. 필자가 이 게임을 시작한 건 9월 중순이고, DLC를 기다리기 위해 3회차 플레이를 잠시 중단한 건 11월 15일 이전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피구라]를 시작하신 분들과 저의 경험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걸 감안하여 구매를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9월 27일 패치 직후 인형왕을 잡았기에 개인적으로 난이도 변화를 크게 느꼈다
다음편 예고
개인적으로 필자는 [배틀 그라운드] 이후 우리나라에 패키지 작품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인디 게임이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을 뿐, AAA게임은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구라]는 필자에게 꿈만 같은 작품입니다. 욕심이 다소 과해 그르친 부분은 분명 있었지만, 그게 원동력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 믿습니다. 다른 게임 개발사에서도 창작욕을 멈추지 않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실패와 부도를 거듭하고, 파산 위기도 겪고, 세금까지 개발비에 쏟아부은 그들은 올해 최고의 작품을 개발했습니다. 1974년 출시한 [던전 앤 드래곤]을 컴퓨터에 넣기 위해 약 50년간 수많은 이들이 노력하여 최고의 완성도로 만들어낸, 다음에 다룰 작품은 [발더스 게이트3]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