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모여 룰북으로 진행하는 역할 놀이입니다. 이때 역할은 단순히 누가 전사나 마법사 같은 직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판타지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나 자신입니다. 가족의 복수를 원하는 귀족 출신 무희나, 이성에게 인기가 많지만 본인만 모르는 성직자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역할이 하고 싶은 걸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저는 역할에 최대한 몰입하고, 게임 마스터와 소통하며 어떻게 진행할지 고심해야 합니다.
최초의 RPG이자 [발더스 게이트]의 근간인 [던전 앤 드래곤]
다만 이걸 컴퓨터에 옮기는 건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CRPG의 시스템은 개발자가 정한 행동 내의 것들만 허락하지만, TRPG의 게임 마스터는 유저가 적에게 듣도 보도 못한 방법으로 괴롭혀도 재량으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통한 상상력을 컴퓨터가 전부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발사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게임에 없습니다. 유저가 자유롭다고 느낀 행동은 전부 개발자가 만들어둔 것들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는 무조건 고블린을 처치해야 한다
이 속임수는 작품의 방향성이나 장르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이하 젤다 왕눈)의 자유는 현실 속 물리법칙과 화학 작용을 유저가 직접 활용할 때 나타납니다. 조나우 기어나 스크래빌드, 울트라 핸드 등은 이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발더스 게이트3](이하 발더스3)는 다른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것도 TRPG를 할 때의 자유를 느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발더스3]이 유저에게 어떤 거짓말로 자유를 주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유저의 자유로운 선택은 개발자의 손바닥 안에 있다
다양한 행동과 논리성
우선 TRPG식 자유를 위해 유저가 생각할 법한 건 최대한 구현해야 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떠돌아다니다가 어떤 싸움을 목격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역할에 따라 유저는 도와주고 싶은 진영의 편에 가세할 수 있고, 갑자기 마음에 안 든다며 배신할 수도 있고, 그냥 귀찮다고 전부 몰살시키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 더 많은 행동을 원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흐름을 틀어버리는 분기점이 많을수록 게임 개발은 매우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개발진은 TRPG 경험을 위해 수많은 경우의 수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NPC와 대화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대부분 상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며, 그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즐기는데 주인공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이는 아이템 활용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점으로는 주인공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논리성이 필수적이라는 점입니다. TRPG에서 게임 마스터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을 말하여 실행할 수는 있지만, 기상천외할수록 그를 제대로 설득해야 합니다. 이 논리성은 게임적 허용보다 현실성이 더 앞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활용법이기도 합니다.
폭약이 가득 찬 곳을 불 마법 하나로 다 터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발더스3]에서의 던지기 행동은 한 턴에 한번이라서 폭탄을 하나씩 투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상자에 모든 폭탄을 넣어두면 그 상자 하나만 투척하여 수많은 폭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설사 폭탄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무겁기만 해도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발더스3]에선 단순한 던지기 행동에도 무궁무진한 활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투 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필자는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파티원에게 변신 마법을 걸어 적진을 무사히 통과한 적도 있습니다.
변신 마법이 생각보다 잘 쓰였다
제약
[발더스3]의 자유도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제약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게 왜 필요한지는 다음 문단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 2가지 제약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제약은 행동 기회의 횟수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행동이라면 평소에 편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투에 들어가면 각 행동마다 제약이 걸립니다. 우선 모든 행동은 소모하는 코스트가 걸려있습니다. 기본 행동, 보조 행동의 코스트는 처음부터 하나씩 제공되며 턴마다 회복됩니다. 강한 마법을 쓰려면 그에 필요한 주문 슬롯의 레벨을 따져야하고, 코스트를 회복하려면 긴 휴식을 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은 거기다 짧은 휴식이나 긴 휴식을 해야 재사용 가능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전투를 할 때 원하는 행동을 여러번 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두 번째 제약은 정보의 제한입니다. [발더스3]에선 캐릭터의 스킬이나 행동을 직접 선택하여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상자에 폭탄 넣어서 던지기 등을 직접 알려주진 않습니다. 적이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유저가 직접 추측을 통해 알아내거나 공략을 따로 찾아봐야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퀘스트나 기믹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들이 열심히 만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도 괜찮다는 배짱인지, 혹은 커뮤니티를 믿은 것인지, 아니면 다회차를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자유를 위한 무지였음은 확실합니다.
로딩 중 나오는 팁도 미묘하게 쓸모 없다
다양성과 제약의 시너지
미끄럼틀에서 놀아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처음엔 평범한 방식으로 타며 즐깁니다. 그러다 질리면 엎드리거나 서서 타기도 하고, 미끄럼틀을 장애물 삼아 누군가와 숨바꼭질을 하는 등 좀 더 다양한 놀이를 찾게 됩니다. 미끄럼틀의 형태를 바꿀 수 없다는 제약이 있지만 다양한 활용법은 인정되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창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실에선 이게 자연스럽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게임의 흐름이란 현실성보다 자기만의 논리, 즉 게임성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포켓몬스터]에서 타입별 밸런스를 위해 상성을 억지로 맞춰둔 경우처럼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게임에 너무 많습니다.
[포켓몬스터]에서 고스트 타입 공격은 악 타입에게 반감되지만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그러나 [발더스3]는 그렇게 진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게임의 근간은 TRPG이고, 거기선 게임 마스터를 현실적인 논리로 설득할 수 있어야 미끄럼틀로 여러 놀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의 행동과 결과에 현실성이 꼭 있어야 하며, 이 덕분에 유저는 해당 게임에 익히기 전부터 활용법을 무궁무진하게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젤다 왕눈]이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물리 법칙과 화학 작용이 현실과 비슷하기 때문에 새로운 조나우기어를 발견해도 스스로 활용법을 빠르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 물리 법칙과 화학 작용에서 벗어나지 않는 퍼즐
[발더스3]에서 유저가 물과 얼음을 다룰 수 있을 때 빙판길을 만들어 적을 넘어트리는 전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TRPG 게임 마스터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논리력을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때 중요한 것 중 첫 번째는 다양성을 전부 가르쳐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까 언급했듯 본래 게임은 게임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유저일수록 게임은 응당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며 스스로 한계를 만들곤 합니다.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인터페이스나 튜토리얼, 레벨디자인 등으로 간파하는 겁니다. 그러나 [발더스3]은 다릅니다. 가르쳐주는 것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유저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 적들이 사용하는 걸 보고 플레이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추측을 시작함합니다. 물 웅덩이를 얼린 자리를 지나가다가 넘어질 수 있다면, 피를 얼려도 같은 일이 일어날까? 애초에 피를 향해 서리 광선을 쏜 적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발더스3]의 전투에서 공격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면 그 전략을 충분히 실험해 볼 겁니다.
작은 구멍을 통과하기 힘들면 몸집이 작은 종족으로 변신하면 된다
두 번째로 중요한 건 마음껏 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거는 것입니다. 마법을 한 턴에 여러번 쓰기 힘들다면 생각할 수 있는 전략은 줄어들고, 전세에 영향을 줄 행동이 무엇인지 큰 고민을 해야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적은 코스트로 고효율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발더스3]이 현실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면, 현실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몇 없는 행동 기회로 최대한 많은 이득을 취하려고 합니다. 이때 스스로 만든 전략이 성공한다면 스스로 만든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적이 들어올 만한 통로에 단검 구름만 설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러면 주문 슬롯 하나만 소모하여 적 진영 대부분을 해치울 수 있습니다.
수비적인 전략이 잘 먹히는 편이다
[발더스3]의 자유는 여기서 나옵니다. 게임적 허용보다 현실성을 더 중요시 하기 때문에 스스로 만든 한계를 뛰어넘는 전략이 계속 나옵니다. 설사 그 모든 행동이 개발진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것일지라도, 유저가 착각하게끔 만들어둔 거짓말일지라도, 그 순간의 경이로움은 플레이어에게 큰 자유를 줍니다.
살인 사건의 단서를 찾는 방법 중 하나
TRPG 경험
이를 모두 충족하려면 개발 난이도가 상당한데, [발더스3]는 이걸 충분히 구현했습니다. 이걸 단순히 개발사가 미쳤다고 설명하기엔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서 각자만의 사정을 안고 모인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개발진들끼리 해온 TRPG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발더스3]가 만들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게 없으면 이제껏 파헤친 기행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레이젤이나 섀도하트처럼 생생한 캐릭터는 실제로 그들이 플레이했던 설정을 기반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지도 그들이 직접 했던 걸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부도나고 파산 위기를 겪어도 직원이 버텼던 것도 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개발자도 사람이기에 회사가 힘들면 이직을 고려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재미있게 즐긴 TRPG 경험을 기반으로 CRPG를 만든다면 도망칠 마음이 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출시만 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단 자신감도 넘치는데, 행복했던 게임 경험을 스스로 배신하기도 싫었을 겁니다. 게다가 같이 게임을 자주 한 사이라면 이직을 마음 먹기도 힘듭니다. 특히 마음 맞는 사람이 많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그 역할 놀이에 심취했을 거라고 예상됩니다. [발더스3]을 직접 해본 유저라면 이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이 게임엔 개발자의 어마어마한 불꽃이 느껴집니다.
개발사 대표는 저 갑옷을 입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추천
2023년은 게임 대작이 쏟아져 나온 해입니다. 무엇이 최고인지는 가리기 힘들겠지만, 최소한 [발더스3]이 언급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정도로 이번 게임은 좋은 완성도와 재미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누구에게 추천하기 어려운 게임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TRPG를 경험해 본 사람도 적고, 턴제는 인기 없고, 너무 높은 자유도는 초보자에게 권하기 어렵습니다. 감성도 동양권과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든 매력을 가진 게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발더스3]을 게임 몇 번 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초보 유저의 유연한 사고력이라면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의 경이로움을, 혹시나 했던 것들이 실제로 유효했을 때의 놀라움을 느끼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많이 즐긴 분들일수록 [발더스3]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거로 생각합니다.
맘 같아선 모두 한번쯤 해보면 좋겠다
다음편 예고
[발더스3]은 [던전 앤 드래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기스양키와 디스플레이어 비스트처럼 설정이 들어간 것은 물론이고, 민첩에 따른 우선권이나 공격을 받았을 때의 내성 굴림 등 자동으로 계산되는 것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베이스를 좋아하는 매니아가 있다면 아마 흡족하며 즐겼을 겁니다. 익숙해지기도 쉽고, 묘하게 반가운 기분도 들 수 있습니다. 게임개발사 닌텐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걸 찾을 수 있습니다. 워낙 다양한 시리즈가 많아서 그런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고, 게임성 공식을 공유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확신처럼 느끼게 된 계기는 어느 게임 때문입니다. 그것에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의 레벨 디자인, 닌텐도 게임 특유의 비주얼 철학 등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하지 않나 싶은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안정적인 재미를 선보여 2년이 넘은 지금까지 1.0.0 버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패치나 업데이트도 필요 없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다음에 다룰 작품은 [별의 커비 디스커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