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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Dec 23. 2022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것들.

10년 차 유럽생활.

사람이 바글바글한 파리의 한 바에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남편은 블랑쉬 (blanche), 나는 블론드 (blonde). 프랑스의 늦은 오후는 해피아워시간이다. 보통 오후 5시에서 오후 8시까지인데 해피아워를 써놓은 바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술을 조금 더 저렴한 값에 즐길 수 있다. 그렇게 늦은 해피아워에 동참해 8시쯤 맥주를 마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으러 가려는데 들이붓는 비. 날씨도 추운데 비까지 오고, 우산이 없던 우리는 재킷 후드를 대충 뒤집어쓰고 비를 추적추적 맞으며 예약해둔 식당으로 들어섰다.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서는 우리를 이상한 듯 쳐다보는 웨이터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나의 불만 성토대회가 시작된 것 같다.


기차까지 파업해서 돈은 돈대로 들고, 가뜩이나 명절은 별로 쇠고 싶어 하지도 않는 내가 너를 만나 프랑스 시골까지 갈 일이냐, 너는 몸살기운도 있는데 차라리 베를린에서 쉴 걸 이게 뭔 개고생이냐, 여기 웨이터들은 왜 베를린만큼이나 불친절하냐, 파리의 이 좁은 테이블마저 짜증이 난다, 역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등등. 크리스마스 때마다 종종 있는 일이기에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나를 타일렀다.


그리고 내가 좀 진정되어 보이자


'네가 그렇게 원하던 파리에서 둘만의 시간이지 않냐, 조금 즐겨보는 건 어때, '라고 덧붙였다.


생각해보니 우리 둘이 크리스마스에 파리에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다.


남들은 "크리스마스는 역시 유럽, "이라며 부러워할 마당에 나는 한 잔에 한국 돈으로 7천 원밖에 안 하는 퀄리티 좋은 와인을 마셔가며, 예쁜 파리 한복판에서 맛 좋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오, " 라며 화가 잔뜩 나 있었다.


한 번은 내 직장 동료가 그랬다.


"나도 내 파트너 덕에 틈만 나면 파리에 가서 예쁜 것 보고, 맛있는 걸 먹으면 좋겠다, "라고.



남들은 오고 싶어도 잘 못 오는 곳에 오면서 나는 왜 그렇게 심통이 났을까. 내가 치러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좋아하라 하던 바르셀로나만큼 파리를 좋아하지는 않아서였을까.


이제는 나에게 너무 당연한 일상이랄지라도, 내가 이런 "일상"을 가지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보이지 않는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떠올려야 정신을 차리려나.


이제는 너무 당연한 파리의 모습이 예전에는 교과서나 인터넷에서나 보던 한 폭의 그림에 불과하지 않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되려나.


유럽에 오래 살다 보니 무뎌진 것도 있겠다. 여행객의 입장에서만 보는 예쁘고 아름답기만 한 유럽을 10년 가까이 몸소 체험한 이후에는 항상 이곳이 아름답게 보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돌아보면 나에게 전혀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일상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프랑스인 남편을 통해 프랑스의 와인, 음식, 생활방식 등등의 이모저모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는 것, 과테말라, 콜롬비아 친구와 스페인어로 떠들며 점심으로 일본 라멘을 먹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일상.


스페인, 이스라엘, 캐나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루마니아, 조지아 등등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온 직장 동료들과의 미팅으로 이루어진 나의 하루. 그리고 그 하루가 끝나면 한국 친구들과 함께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과 나누는 맥주 한 잔. 주말에 친구 집에 가서 대접받는 생 전 처음 먹어보는, 그러나 그 친구의 나라에서는 너무 평범한 음식. 이 모든 것 하나도 한국에서 태어나 20 평생을 자란 나에게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당장 내일 새벽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시골로 내려가야 하는 나의 심정이 "아...."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이란... 간사하다.  


어쨌든 모두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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