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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Feb 02. 2023

화를 다스리려다가 정전, 마르세유 시내 숙소이야기.

프랑스 마르세유 이야기 04.

나는 요즘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 프렌치 남편은 T다. 나는 F다. MBTI 같은 걸로 정형화시키는 게 한국에서 유행한 지는 꽤 된 걸로 안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내 남편은 엠비티아이가 뭐냐는 질문을 그렇게 많이 받았고, 그 이후로 한국인들이 요새 혈액형 이후 가장 집착하는 콘셉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둘 다 사람을 정형화시켜 몇 가지의 가짓수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은 한다.

아무튼 T와 F의 가장 큰 차이라면 F는 슬픔과 화남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생각하고, T는 슬픔과 화남을 나누면 슬프고 화난 사람이 둘이 된다는 것.


내 남편이 왜 여태 내가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야기하면 공감을 못하고, 본인이 더 스트레스를 받는지 이해가 되었다. 무릎이 탁 쳐지는 순간이었다.


-너가 이래서 그랬구만? 이랬더니 남편이 한숨을 푹 쉬며 제발 그런 이론들에 현혹되지 말란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내 스트레스를 온전히 흡수해서 기운이 다운되는 남편을 보고 최대한 일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한다. 예전 사업을 같이 시작하고 관둔 이후로는 우리 둘이서 업무 시간 이외에 사업 및 일 관련 이야기를 금기시 한지는 꽤 오래되긴 했다. 남편 말로는 이런 직장에서의 사소한 갈등이 싫어서 자기 일을 하는데 마치 내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가 회사를 다니는 것 같이 느껴져 싫다고 했다.


내심 서운하긴 했다. 그래도 맞는 말이니 내가 최대한 고치기로 했다.


마르세유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오전근무만 하고 오후에는 일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러 날 실패를 거듭했고,  매일 저녁 맥주를 들이켰다. -아, 참 회사는 회사일 수밖에 없구나-를 되뇌며.


I cannot do this shit anymore. (나 도저히 이 짓 못하겠어.)를 백 번은 속으로 되뇌고 오십 번은 밖으로 내뱉었던 것 같다.


내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1. 화가 나는 순간 노트북 덮고 창문밖 쳐다보기.

2. 운동하기

3. 술 마시기

4. 집안일하기

5. 그림 그리기 등등


보통 무언가에 몰두하는 일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번 마르세유 숙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술 마시기와 집안일이었다. 벌건 대낮에 미팅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 집안일을 택했다. 베를린에서처럼 똑같이 했다. 세탁기를 돌리고, 부엌을 치우면서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젖은 빨래들을 빈 방에 걸고 난방을 세게 돌렸다.


나름 나만의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잘했구나 싶었다.



이제야 한숨을 돌리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커피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핸드폰 와이파이가 잡히지를 않았다.


일에 집중하던 남편이 소리쳤다.


"쀼땅! putain!"


인터넷이 끊겼다. 노트북 충전기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전등을 켜봤다. 전기가 나갔다.


오래된 집이 많은 마르세유 중심가에 숙소를 잡고 있었다. 집은 레노베이션되어있었지만 여러 전기를 한꺼번에 쓰는 일은 자주 없었나 보다. 전력량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전원 오프. 건물 전체는 아닌걸 보니 집 문제였고 숙소 에이전시에 전화를 걸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마르세유에서 전기공을 한 시간 안에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기로 운영되던 난방들이 모두 나갔고 숙소에 금방 냉기가 돌았다. 이불을 칭칭 둘러 감고 배터리 잔량이 얼마 남지 않은 노트북을 부여잡고 씩씩 대며 일을 했다. 회사 일도 일대로 꼬였는데, 여행까지 와서 상황이 이렇게 되니 화가 났다. 남편은 왜 전기를 함부로 다 쓰냐고, 여기 오래된 건물인 거 모르냐고 쏘아붙였다. 나는 한국에서 아파트에서 살고, 베를린에서 당연히 하던 일과였으니 생각도 못했다, 나는 이런 오래된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다며 우겼다. 사실은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싸웠다. 여행 와서 10일 만에 처음 싸웠으니 오래 버텼다 이번엔.


에이전트 말에 의하면, 마르세유 중심가에는 몇 백년 된 아파트들이 많고 낡아서 아무리 레노베이션이 진행되어도 전기가 나가는 일이 잦다고 했다. 요새 들어 파리같은 곳에서 이곳을 와 우리처럼 리모트잡으로 집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아직은 드물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낮에는 사람들이 일터에 나가다보니 하루 전력소모량이 많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낡은 아파트인탓에 그대로 들리는 층간 소음은 일상이랬다.


에이전트가 와서 문제 해결을 해주고 다시 숙소가 따뜻해졌다. 친절했던 에이전트 덕에 화도 좀 누 그라 들었다. 숙소에 사둔 맥주를 꺼내 병뚜껑을 따고 남편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건넸다. 아까 폭발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말했다.


- 나 회사 관둘 거야, 나한테도 너한테도 너무 좋지 않은 영향만 주고 있어.


언어앱으로 "아기가 잠을 잡니다, " "이 남자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라는 문장을 한국어로 쫑알대던 남편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제발, 우리의 평화를 위해 그렇게 해줘.


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제 정말 퇴사하기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려나 싶은데 막상 그렇지도 않다. 나에게 일주일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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