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롤라 Jul 27. 2022

V

이건 비밀인데 말야

이건 비밀인데 말야, 태어나기 전에 난 이미 이름이 있었어. 정민수라는 이름. 첫 아이였거든. 정씨 집안의 항렬에 맞추어 부모님이 골라놓으신 이름이야. 하지만 나는 딸로 태어났고 외할아버지께서 급하게 이름을 다시 지어주셨지. ‘지초 지’자에 ‘연꽃 연’자, 향기로운 풀과 연꽃 같은 사람이 되어라! ‘민첩할 민’에 ‘물가 수’보다 마음에 들긴 해.
 
지독한 난산이었다고 해. 가정 분만으로 아이를 많이 낳던 때였는데 나는 발가락에 탯줄을 감고 있는 바람에 병원으로 이송되었지. 구급차 간이침대 위에서 어머니는 이대로 배가 부른 채 평생 살아도 좋으니 이 고통이 제발 멈추었으면 하셨다고 했어. 태반과 아기를 함께 기계로 꺼내고 얼굴엔 눌린 자국이 있었대. 눈과 귀 사이에 상처가 나고 앞이마에는 조그맣게 브이 자 모양 자국이 생겼다나. 얼마나 흉했는지 아버지가 보면 놀랄까봐 외할머니는 출산 소식을 듣고 일터에서 병원에 온 아버지를 돌려보냈다고 해. 상처는 곧 아물 테니까 나중에 보면 된다 하셨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 딸. 환영받지 않는 존재로 세상에 나온다는 기분은 어떨까. 꼭 불청객 같았을 거야. 다행히 어머니는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대. 혹시 딸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예쁜 아이를 낳으려고 정윤희 사진을 화장대 옆에 놓고 보신 보람이 있었다고 말하곤 하셨지.


2세대 트로이카, 1970년대에 데뷔하여 한국 연예계를 주도한 세 명의 여배우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 중에 어머니는 정윤희가 제일 좋으셨다고 하니까 그리 실망스러운 자식은 아니었을지 몰라.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반 뒤에 진짜 민수가 태어난 거지. 진짜 민수라니 그럼 나는 가짜였단 말일까?
 
어머니가 몸조리를 하면서 신생아도 돌봐야 했으니까 두 살배기인 나까지는 보살피긴 힘드셨나봐. 산후 조리를 하는 한 달 동안 나를 외가댁에 맡기셨대. 그래서 그런가? 내게는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정서가 있어. 세상에 내 거 같은 건 아무것도 없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계속 기다리는 마음이야. 내게 일어난 일이 무언지도 모르는 두 살 배기가 갑자기 엄마와 떨어진 기분이 어땠을까. 환경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세상이 다 바뀌었겠지. 내 자리를 동생에게 뺏긴 거야. 아늑하던 엄마 품에는 이제 다른 아기가 안겨있어. 엄마를 더 이상 볼 수도 만날 수도 닿을 수도 없다. 하룻밤, 이틀 밤, 사흘 밤, 나흘 밤이 지나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오지 않아. 어른에게는 고작 한 달이었겠지만 유아에게는 일 년만큼 길었을 시간, 처음엔 기다리다가 나중엔 포기했겠지.
 
그런데 더 큰 비밀은 무언지 알아?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이 지어져있는 일이 아주 흔하다는 거야. 아들 기대하는 자리에 태어난 딸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해 봐. 진짜를 기다리는 자리에 태어난 무수한 가짜들, 불청객들이 말이야. 뱃속에 있을 때 받았던 이름을 빼앗긴 이들의 단체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야. 지금이라도 동료들을 찾아 이런 기분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니까. 삶에서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조연으로 밀려난 당황스러움을 말이야.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다 뒤늦게 알았을 때 뒤통수 맞은 느낌이랄까.
 
그래서일까. 나는 딸을 낳고 싶었어.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은 한 번도 없었는데, 딸은 꼭 낳고 싶더라고. 그래서 아이를 가졌을 때 뱃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가 딸이길 간절히 바랐어. 아들을 낳는다는 건 왠지 상상조차 안 되더라고. 운 좋게 남편도 딸만을 바랐어. 아들이 태어나면 자기는 안 키울 거라나. 그래놓고 남편은 그런 말을 한 적 없대. 그저 아들이 태어나면 당신이 키우라고 했다는 거야. 이 정도면 우리가 얼마나 딸을 바랐는지 알겠지. 과거를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마침내 딸이 태어났다! 부모가 오직 딸만을 기대했기 때문에 가짜 아닌 진짜로 태어난 딸. 세상의 환대를 받으며 태어난 딸의 기분은 다를까 궁금해. 조연 아닌 주인공으로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아갈지 계속 지켜볼 거야.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구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만든 가족이 있으니까. 내가 초청하고 나를 원하는 사람들을 계속 사랑할거야. 내가 태어났을 때 이마에 난 작은 브이 자국은 아마도 승리의 브이였나 봐.

작가의 이전글 진짜 내 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