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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Nov 30. 2023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라라크루 갑분글감 '시장'



우리 집에서 시장에 가면은 아이엠그라운드와 끝말잇기 인기를 능가하는 놀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운전자 바보 아빠와 이김 천재 엄마, 늘진심 열정 큰딸과 룰파괴 억지 막내까지 모두가 함께할 수 있다. 더구나 기억력 향상에도 도움을 주는 건전한 가족 오락이다. 다섯 살 때까지 무조건 자기가 이기겠다고 억지 부리며 게임폭파시켰던 막내까지도 어느덧 경쟁하며 즐기는 놀이다.



매번 시장에 가는 놀이를 시작하면 정해진 패턴이 있다. 사과와 바나나가 먼저 나와야 한다. 사과와 바나나가 없이 딸기나 생선 따위가 먼저 나오기라도 면 막내 불호령이 떨어진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지만, 두 번째 사람까지는 어김없이 바나나를 외친다. 그러고 나면 평소 시장에서 접했던 다양한 존재가 등장한다. 우선, 과일이 진을 친다. 딸기, 귤, 배, 수박, 오렌지 등 제철 과일이 등장하다가 누군가 오징어를 외치면 생선가게로 갈아탄다. 오징어에 이어서 꽁치, 갈치, 삼치, 낙지, 해삼까지 등장한다. 대략 예닐곱 개를 넘어설 때쯤이면 한계를 느끼며 평범하지도 못한 뇌를 원망하게 된다.



스물일곱 개 조각으로 이루어진 큐브 방에 사과와 바나나를 하나씩 놓아 가며 길을 따라가거나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인천 간석시장 골목을 떠올리며 오징어와 꼴뚜기를 영상으로 기억하면 무난하게 승리할 텐데, 인지 장해와 이해력 감퇴 그리고 순발력 저하까지 오기 시작한 불쌍한 심신 덕분에 초등학교 사 학년은커녕 다섯 살과 박빙 승부를 펼치며 매번 진다.



억울하지만, 다섯 살 룰 파괴자는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면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잠깐이나 뭐였지라는 주문을 외운다. 그러면 주변에서 너 나할 것 없이 손발 벗고 나서며 애플망고 같은 고급 과일이나 개불 같은 괴상한 생명체를 상납한다. 혹여나 룰 파괴자가 지기라도 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이 세상에서 아빠가 가장 싫다는 패륜성 망언까지 마구 던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운전하면서 과일과 생선, 채소 이름을 외워가며 분투하지만, 학창 시절 전교에서 아이큐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은 신뢰할 수 없는 찌라시가 된다. 결국 양치기중년 바보가 된다.



하지만 양치기중년 바보가 즐겨 찾는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바나나도 있고 열정 넘치는 큰딸도 고 룰 파괴자 막내도 있고 늘 이기는 천재 엄마도 있다. 그렇게 온갖 잡다한 존재를 기억하며 우리는 행복한 시장으로 간다.



한 줄 요약 :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바나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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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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