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탕가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쉬탕가는 절대 정적인 요가가 아니다. 쉴 틈 없이 움직이고 버티고 힘을 주고 호흡을 한다. 그리하여 하면 할수록 체력이 오르고 힘도 생기는 재미가 있다. 아니, 있었다. 있었는데 없다...
하… 요즘 이상하게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 든다. 고작 마흔한 번의 요가원 출석으로 한계를 논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한계란 것은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머문다는 얘기다. 20일 차보다 더 안되게 느껴지는 날이 종종 있다. 어쩌다 한 번이면 괜찮은데 근래 일주일간 연달아 왔던 요가원에서 예전보다 더 힘이 안 느껴지고 자주 어지러움을 느끼니 이건 뭔가 내가 예전에 비해 놓치고 있는 게 많단 의미 같다.
어제까지는 복부에 힘을 주지 않아 전보다 몸이 더 흔들리고 힘이 안 느껴지는 거라 생각을 했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힘이 많이 딸리는 데에는 무언가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엔 조금씩 몸이 영글어가는 느낌과 하체에서부터 점점 강하고 단단하고 무겁게 힘이 올라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체도 상체도 힘이 완전히 빠져버린 사람처럼 헐렁거린다. 제아무리 복부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집중해도 이 가볍고 헐렁거리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이유가 뭘까?
나는 문득 최근 내가 먹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요가를 시작하던 초창기와 비교해 보았다.
‘먹는 양이 줄었네.’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나는 소화기관이 약하다. 많이 먹지를 못하고 많이 먹은 날은 잘 체하거나 탈이 난다. 그래서 때때로 체하거나 탈이날 것 같은 날은 본의 아니게 소식을 하는 간헐적 소식좌이기도 하다. 먹고 나서의 뱃속 괴로움을 알기에 탈이 나서 하루를 망치느니 차라리 조금만 먹고 마는 것이다. 속이 괜찮은 날도 많지만 이따금씩 절제하지 못하고 많이 먹기라도 하는 날은 또 여지없이 탈이 난다. 악순환이다.
하지만 요가를 시작하며 간만의 편안한 배고픔을 느꼈고, 그 알지만 오랜만이라 낯선 느낌이 너무 반가웠고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벅차게 좋았다. 이런 배고픔은 어린 시절 실컷 뛰어놀고 난 뒤의 자연스러운 식욕과도 같았다. 그렇다. 나는 식욕이 딱히 없는 채로 성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요가 덕분에 어린 시절처럼 자연스레 올라오는 식욕을 되찾았고 실제로 너무 허기지기도 해서 한동안은 상당히 잘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루 세끼 다 챙겨 먹고 밥도 그득그득 푸짐하게 먹었는데 언제부턴가 원래의 먹는 습관대로 돌아가고 있다. 소화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가 보다. 많이 먹지 않으니 힘이 안 난다. 50킬로만 갈 수 있는 연료를 넣었는데 100킬로를 가도록 스스로를 부추기는 느낌이다.
그리고 나의 두 다리 또한 요가 시작하던 시기만큼 약해지고 떨리는 것 같다. 예전엔 요가 후에도 종종 걸으러 나갔는데 춥다고 걷는 시간은 고사하고 앉아만 있는 시간이 더 늘었으니 다리가 더 힘이 안 붙는 느낌이다. 맛없다고 한동안 먹지 않았던 단백질 보충제를 다시 살짝 꺼낼 때가 된 것 같다. 나처럼 체질상 살이 잘 찌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은 단백질을 잘 먹어줘야 한다더라. 밥엔 콩을 꼭 섞어 먹어야지. 점심식사 후엔 20분이라도 걸으러 나갔다 오고 너무 춥다고 늘어져 있지만 말아야겠다.
정말이지…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내 몸 앞에 숙연해지며, 건강한 습관을 위해 생활 교정을 조금씩 해나가야겠다.
<42일 차: 울다가 빡쳐서 하러 간 요가>
명절이 지났다. 4일 정도의 연휴기간 동안 하루 정도 홈요가를 했고 나머지는 먹고 자고 가 전부였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명절 교통 체증으로 차에서 몸살을 해댔던 통에 피로가 제법 쌓여버렸다. 게다가 살며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송사에 휘말린(?) 본가의 상황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지친 상태였다. 다행히도 좋든 싫든 판결이 났고 합의에 따른 수습만이 남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족들 간의 스트레스는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닌 것 같다. 나 또한 그와 관련한 여러 이유로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가족 역학. 가족 관계성 안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 역학은 아마 나의 본가뿐만 아니라 모든, 아니 많은 수의 가족들이 남모르게 가지고 있을 일들일 거다. 그 역학 안에서, 고통스러운 외부 이벤트들이 일어나면 정말이지 감정적, 신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은 살면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느샌가 그런 당사자가 되어 있었고 나름의 고된 마음 앓이를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내가 이럴 줄이야…
이렇게 보니 삶이란 건 느닷없이 옆구리를 찌르는 이벤트들의 발생과 수습,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들이 쌓이는 일인 것 같단 생각도 든다.
일상사에 잊으며 살 땐 괜찮다가 명절에 본가를 다녀오니 괜찮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고 결국 나는 명절부터 하루 이틀을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다 연휴가 끝난 어느 아침, 세상 설움 다 가진 사람처럼 울어버리고 말았다.
'요가 가야 되는데… 지금은 울고 싶다. 안 그러면 요가할 때 눈물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이 기분으로 요가를 가서 나를 마주하면 난데없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감정을 추스르고 가자는 생각에 울기 시작했는데 이놈의 울음은 시작하자마자 숨겨뒀던 설움을 모조리 긁어모아 뿌려대기 시작했다.
'하늘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했어. 혹은 내가 뿌린 만큼 거두는 게 세상 이치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뿌린 건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일들이었고, 지금의 시련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인 것일 테지. 하지만 당장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사람과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 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 이제는 그것조차도 헷갈려. 나만 삶이 이렇게 괴로운 건 아니겠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가엾고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다.'라며 이불속에서 꺼이꺼이 울어재끼기 시작했다.
분명 이 감정 속에는 분노와 슬픔이 범벅되어 공존해 있다. 자책도 있을 것이고 후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바라본 바, 감당해야 할 선택은 분명 내 안에서 순수하게 올라왔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어리석을지라도 난 내 편이 되어줘야만 했다. 눈물을 닦고 부랴부랴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요가원으로 달려갔다. 정확히는 세상에 화가 나는 마음을 요가로 풀러 가고 싶었다.
아쉬탕가 시간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빨리 내 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요가였다. 감사하게도 요가시간이 마침 지금 내게 가까이 와 있다.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와 팅팅부은 눈을 하고 요가원 거울 앞에 섰다. 역대급으로 추레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이 시간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더불어 체력적으로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간단한 동작을 하는 데에도 머리가 핑핑 돌았다. 살짝의 기립성 저혈압이 있었지만 일부러 평소보다 조금 더 새로운 동작을 시도했다. 힘들고 아프지만 새로운 것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그 와중에도 무언가 성장했다는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며,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는 가장 어려운 선 자세를 과감히 숙련자 버전으로 도전을 했다. 흔들리고 불안정하지만 끝까지 해냈고 마지막 동작인 사바아사나까지 마치니 내 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큰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럼에도. 다 했다.'
맞다. 그럼에도 다 했다.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내 마음이, 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지금 닥쳐 있는 요가라는 상황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정리가 되었고 어리석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따른 집착들은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상황에 대한 불가피하고 순수한 선택 앞에서도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두려움을 사들여 삶을 계속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요가를 하며 엉성한 내 몸뚱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런 어리석음에 대한 두려움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랬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그냥 겪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어리석어도 괜찮고 못나도 괜찮다. 내 순수한 마음 하나 믿어주자.
이쯤에서 불러본다.
"I did it my~ way~~"
속으로 가만히 되뇌며 요가원을 나왔다. 이 정도면 요가에게 신세 진 기분이 든다.
요가를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43일 차: 선생님 말씀에 항상 귀 기울이란 말야!>
아쉬탕가와 같이 정해진 플로우를 반복하는 요가수업은 익숙해지면 어느샌가 선생님의 말이 잘 들리지 않게 되나 보다. 하라는 대로 말을 안 듣는다는 게 아니라 귀담아듣지 않는단 얘기이다. 그저 아는 동작이라고 자기 거 하기에 바쁘니 큰 틀에서는 같은 플로우를 타고 있는 듯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생님이 지도해 주시는 세부적인 이야기들은 한 귀로 흘리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동작들이 내게 힘이 들어 그 말들이 미처 내 귀에 도달 조차 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4개월 차에 접어든 지금은 힘들어서 버티느라 정신없는 정도는 아니니 그냥 내가 선생님 말씀을 잘 귀담아 안 듣고 있는 것 같다. 혼자 속으로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는 데에 급급하다.
무작정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닌데 여기서 성격이 드러나나 보다. 고집이다 고집. 자기가 다 해보겠다는 고집. 요령과 방법이 도처에 널리고 바로 옆에서 알려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내가 굳이 찍어보고 맛보고 알아야겠다는 고집.’ 그렇게 해서 자기 스스로 터득하면 다행이지만 잘못된 방법을 옳다고 믿거나 대단히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방법을 취할 수도 있으니 요령껏 남의 이야기도 참고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참 부족하다. 그러니 때때로 어리석고 멍청하게 보일 때가 있다. 아니다. 사실 머리가 나쁘다.
그러나 오늘은 이야기가 다르다. 늘 하던 전사자세(비라바드라아사나)를 하던 때였다. 나는 늘 이 구간에서 몸이 자꾸 흔들거려 살짝씩 주춤거리곤 한다. 시선이 손 끝으로 가는 동작들이다 보니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들어 올린 팔과 함께 느껴지는 상체의 흔들거림. 나는 늘 보이는 이 불안정함이 싫어 팔과 하복부 쪽의 상체에 더 신경 쓰며 안간힘을 주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갑자기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왔다.
“하체에 단단하게 힘을 주고 상체에는 힘을 빼세요.”
'어라? 하체에 단단하게… 이… 이렇게 주면 되는가?'
나는 몸의 하중을 하체에 묵직하게 주려 노력했다. 굽힌 다리와 뻗은 다리 그리고 지면에 밀착되어 있는 발바닥에 묵직한 단단함을 주며 커다란 뿌리가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의식이 자연스레 하체로 향했고 상체엔 비교적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와. 확실히 덜 흔들리네! 가만,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이 시간마다 늘 빠짐없이 하셨던 것 같은데 새삼 내게 와닿아 들리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스스로 생각에 갇혀 멋대로 혼자서만 하려 했던 건지 알 것 같아.'
내심 무언가 깨달은 느낌이었다. 아. 이래서 멘토라든가 스승이 필요한 걸까. 선생님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멘토이다. 앞으로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지 말고 내게 필요한 부분을 잘 캐치하여 적용하도록 눈과 귀를 활짝 열고 많이 배우고 흡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에라도 이런 부분을 깨닫게 되고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다.
<44일 차: 새다리 같은 내 허벅지>
비트요가 시간이다. 하하. 원래는 원장님의 빈야사 요가인데 이번달엔 빈야사 대신 비트요가가 이 시간을 차지했다. 크흑.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비트요가가 무섭다. 막판에 휘몰아치는 복부운동! 극기훈련에 가까운 복부 다지기! 끝날 무렵엔 ‘아 혹시 나도 모르게 입에 거품을 무는 실례를 범한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비트요가.
그러나 인간은 정말 무섭도록 적응하는 능력을 가진 것 같다. 나란 인간의 적응력에 스스로도 감탄하고 말았다. 맵디 매운 복부 운동에 어느덧 적응을 하여 예전처럼 복부가 찢어질 듯이 아파서 중간에 쉰다던지 어지러워 쉰다던지 하는 일이 없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집에서 따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약간은 비루한 운동 생활인데도 이렇게 몸이 적응해 간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이 극한이라 생각했던 것에 조금씩 적응을 하고 다음의 극한을 기다리며 또 성장해 나가려고 준비한다는 게 이렇게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나 새삼 놀랍기까지 하다. 그냥 꾸준히 했던 것들인데 된다. 아. 그래서 운동에 심취한 사람들이 생기는 건가! 예전엔 꼬박꼬박 운동을 나가고, 땀 흘리는 것에 중독이 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젠 좀 알 것 같다. 몸에 가져다주는 이득이나 개인적인 자신감, 의도치 않은 성장 같은 것들을 가장 손쉽고 정직하게 얻을 수 있는 게 운동임을 이제 나도 조금은 체감을 했다.
그러나 복부를 어느 정도 다지고 나니 이번엔 다른 곳의 약한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건 바로 허벅지이다! 비트 요가 동작중에 한쪽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나머지 한쪽 다리는 앞으로 든 채 버티는 쪽의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움직이는 동작이 있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견디는 건데 구부렸다 폈다 할 때마다 버틴 다리의 허벅지가 정말 볼품없이 달달 떨리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 진짜 볼품없다…’
거울로 마주하는 내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되도록이면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다른 한 곳을 응시하며 허벅지에 힘을 주는 연습을 하는데 이게 또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복부에 힘을 줘도, 허벅지에 힘을 줘도 다리가 달달 떨리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선천적 쭉정이 인간. 허벅지가 얇다 못해 빼짝 말라있다. 동작을 하는 내내 떨리는 내 다리를 보면 마치 조류의 다리가 생각난다. 내 콤플렉스 중의 하나이다.
‘아. 허벅지 살이 좀 붙어야 근육도 붙으려나? 살을 찌워야 되나?’
사실 잘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근육을 만들기엔 내 체격은 한계가 있는 것 같고 좀 더 두꺼운 근육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살이 좀 쪄야 될 것 같다. 물론 나는 운동 전문가가 아니므로 공부하고 알아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살을 더 찌워서 나쁠 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몸뚱이임은 확실하다. 문제는 살 찌우는 게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란 것. 체질상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 있다던데 내가 그 체질 같다. 웬만큼 먹는다. 어디 가서 소식한단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 그럼에도 살이 안 찌는 건 소화력이 못 받쳐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주 체하고, 자주 배탈이 난다. 그러니 장 속에서 영양흡수가 제대로 안되어 먹는 것 대비 살이 찌지 않고 에너지도 내지 못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로 치면 연비가 최악인 거다. 다이어트를 준비 중인 누군가에겐 부럽고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말라도 건강한 체질이 아니라 에너지가 없고 늘 골골대는 나 같은 사람은 또 나름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옷을 입어도 태가 나지 않고 일을 할 때에도 금방 지쳐버리니 남들에겐 보통의 일상일지라도 내게는 체력으로 인해 쉽게 부대끼곤 한다.
허나 이대로 계속 살 수는 없다. 요가를 하면서 본격적인 식사량 늘리기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아무래도 요가를 하면 몸이 따뜻해지고 순환도 잘 되므로 소화기관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소화가 잘 되면 예전보다 좀 더 먹어도 덜 부담스러울 테고 영양흡수도 더 잘 될 것 같다. 단백질도 평소보다 열심히 챙겨 먹어야지. 그래서 언젠간 나도 꼭 새다리 같은 허벅지가 아닌 닭다리 같은 허벅지를 만들 것이다!
꼬꼬댁.
<45일 차: 알수록 어려운 아쉬탕가>
아쉬탕가 시간이다. 조금씩 사점을 넘기고 안되던 것들이 수월히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 선생님은 고런 시점을 귀신같이 새로운 동작들을 추가하신다. 물론 나 혼자 받는 수업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 다른 회원님들 간의 레벨을 보고 결정하시는 거겠지만.
애송이는 멋도 모르고 도전했다가 자신의 몸에 비루함을 느끼고 헛웃음을 띠며 풀썩 주저앉고 만다. 나와는 달리 가뿐히 해내는 다른 회원님들을 보는 나의 눈동자와 얼굴의 모양은 분명 ‘아니 저게 된다고?’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회원님들을 보며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 무언가 또 한 스텝 한 스텝 넘겨 재미를 느끼고 싶다.’의 마음도 들었던 건 사실이다. 머리서기도 잘해보고 싶고, 오늘 본 파드마 마유라 아사나나 마유라 아사나 같은 것들도 언젠간 잘해보고 싶다. 그러려면 내 팔과 복근이 잘 받쳐줘야 할 것 같은데 여즉 벌벌대고 흔들리는 몸을 보면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나는 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종종 걱정하는 성격이다 보니 온갖 다치는 경우를 머릿속으로 먼저 떠올려버린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도 상당히 느리게 도전하는 편이다.
뭐, 그런들 어떠랴. 내 몸 수준이 그 정도는 안전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판단이 될 때에 자연스레 조금씩 시도를 해보고 싶다. 못해도 상관없다.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아 끝내 시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무렴 어떤가. 잘하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니까 괜찮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보고 싶다면! 차근차근 배움을 착실히 쌓아 나갈 것이다.
처음 접하는 동작들이 생길 때마다 명칭을 어렵게 기억해 내어 검색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 동작에 가지치기된 여러 생소한 동작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렇게나 많은 동작들이 있었다니… 정말이지 아쉬탕가의 세계는 무궁무진한 것 같다.
일단 계속해보자. 아마 100일 요가일지(를 빙자한 일기)가 끝나도 저런 동작들은 엄두가 안 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냥 해보는 거다. 어차피 못할 거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보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