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액션 무비의 올타임 베스트(all time best)이자 게임 체인저로 평가받는 『매트릭스』 (1999) 초반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속이 빈 책 (장 보드리아르의 『시뮬라크라와 시뮬레이션』) 안에 감추어둔 디스크를 꺼내 “최”라는 성을 가진 방문자에게 건네줍니다. 그러자 최는
“할렐루야! 네가 나의 ”구원자“(Savior)야! 나 만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라고 외칩니다. 그러다가 네오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최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깨어 있는지 꿈을 꾸는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어?”
이 시작장면은 영화의 이야기가 철학적(장보드리아르)이고 종교적(“구원자”)인 방향으로 진행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오늘은 워쇼스키 자매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매트릭스』 (1999)가 전하는 철학적 종교적인 메시지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 의미가 매일 시국선언이 터져 나오는 요즈음 들어 더욱더 뼈저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네오(NEO) 인류를 구할 One 즉 그분을 상징한다.
네오의 보물창고 역할을 하고 있는 『시멀크라와 시뮬레이션』(Simulacra and Simulations)(1981)은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장 보드리아르의 철학서입니다. 워쇼스키 자매가 매트릭스 출연진들과 스태프들에게 모두 읽어보라고 권했다는 바로 그 책입니다. 프랑스 철학자는 이 책에서 “하이퍼리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에 좋은 예가 영화 쥬라식파크입니다. 멸종된 공룡은 실체도 원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룡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속에 묻혀있던 공룡의 뼈를 근거로 살을 붙여 재구성한 가짜 공룡을 토대로 그리거나 제작한 공룡의 복제/복사본입니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발달은 복사된 공룡이 진짜인지 이미테이션인지 구분조차 불가능한 진짜 같은 공룡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쥬라식 파크의 공룡들입니다. 이 쥬라식 파크가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안 되는 허구의 공룡들이 사는 가상의 공룡테마 파크입니다. 디즈니랜드처럼 원본 없이 재현된 가상 세계이며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먼 세계입니다. 컴퓨터 그래픽과 인공지능의 발달은 가상현실을 더욱더 현실처럼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가상과 현실을 혼동하게 만들고 나아가 점점 더 현실과 단절된 삶을 강요합니다. 장 보드리아르는 우리 사회는 허구와 진실의 경계가 사라지고 리얼리티의 체험이 점점 더 불가능한 사회, 그의 용어를 다시 쓰면, “실재의 사막”(“the desert of the real”)으로 변한다고 경고합니다.
네오가 살고 있는 매트릭스는 장보드리아르가 언급한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입니다. 추정상 서기 2199년의 먼 미래이지만 인공지능은 매트릭스 시스템을 완벽하게 1999년의 세계로 구현 이곳에 갇힌 사람들을 20세기 마지막 해로 착각하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들은 시스템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노예라는 사실조차 인식 못하는 기계의 노예들입니다. 그렇게 살던 네오는 어느 날 자신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는 최에게 질문했듯이 자신이 “깨어 있는지 꿈을 꾸는지?” 의문이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헷갈려합니다. 네오가 아무 의심 없이 가상현실에 갇혀 불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최가 네오를 보고 언급한 “구원자” 는 주인공이 앞으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구원할 보다 큰 인물 즉 “지저스 크라이스트” 콘셉트로 발전할 것임을 시사합니다. 네오(NEO)의 스펠링을 다시 조합하면 One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뿐인 “그분”을 의미하죠. 그러나 영화는 남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깨달아야 한다는 불교식 접근을 선택합니다. (영화가 양대 종교를 포용하려 애쓴 결과입니다) 자신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 없이 어떻게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무지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말이며 그 시작은 자신이 속한 매트릭스 세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모피어스 (Morpheus) 꿈을 상징하는 이름. 그는 매트릭스에 갇힌 인류를 구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매트릭스(가상세계)의 비밀을 아는 인물은 네부카드네자르이라는 이름의 우주선(현실세계)을 타고 반 매트릭스 단체를 이끄는 모피어스입니다. 네오를 안내(매트릭스의 정체를 알려주고)하고 그에게 세례(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재탄생)를 줄 모피어스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보낸 세례 요한인 셈입니다. 모피어스를 찾아 현실세계인 우주선에 탑승한 네오. 그에게 모피어스는 매트릭스에 대한 정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매트릭스는 사방에 있어. 심지어 이 방에도 있지. 창문 혹을 텔레비전을
통해 볼 수 있지. 일하러 가도 교회에 가도 세금을 낼 때도 느낄 수 있어. 그건
너를 진실로부터 가리기 위해 네 눈 위에 덮어 쓰인 세계이지.
무슨 진실이냐는 네오의 질문에 모피어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네가 노예라는 사실. 네오, 넌 다른 사람들처럼 속박의 상태이며
냄새도 맛도 촉각도 느낄 수도 없는 감옥에서 태어난 거지. 마음의 감옥이지.
매트릭스가 만들어낸 가상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우화적 표현입니다. (장 보드리아르는 자신의 책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모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영화는 가상세계(매트릭스)와 현실세계(우주선)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자신의 의도를 반영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즉 플라톤의 동굴우화에 등장하는 동굴에 더 가까운 세계입니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는 동굴인들처럼 매트릭스 거주자들도 자신에게 제시된 가상의 세계를 진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문명의 발달로 벽에 비친 공룡의 검은색 그림자를 보는 게 아니고 100인치짜리 LED 스크린에 투영된 그러나 너무 진짜 같아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살아있는 공룡을 봅니다. 진짜가 아니라고 믿기가 어려운 세상에 산다는 말입니다. 매트릭스는 의식 없이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상을 빗댄 것입니다.
가상이 아닌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매트릭스/동굴에서 벗어 나와 실재와 가짜를 구분하는 마인드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자신의 의심부터 걷어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너의 마음을 해방시키려고 해. 그러나 나는 문만 보여줄 수 있어.
네 스스로 걸어 나가야 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해. 두려움, 의심,
불신들을 말이야. 마음을 해방시켜.
그러나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컴퓨터가 만든 마인드 훈련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가상세계에 들어간 네오가 “왜 내 눈이 아프지?라고 묻자 모피어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눈을 쓴 적이 없어서 그래.”
매트릭스 시스템이 보여주는 가짜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어떻게 눈을 써야 진짜의 모습이 보이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제 네오는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느끼고 보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는 훈련에 매진합니다.
사이퍼 (cypher) : 의식이 사이퍼 즉 제로같은 인물의 상징.
그러나 매트릭스의 노예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더 좋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사이퍼입니다. 그는 돈에 매수되어 네오를 매트릭스 하수인들인 스미스 요원(로마 병사)에게 밀고 “구원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롯 유다의 역할입니다. 그의 인생 모토는 “무지는 축복” (Ignorance is bliss). 그의 머리는 자신의 이름 사이퍼(cypher)의 뜻(제로)처럼 텅 비어있습니다. 제로 의식상태에서 매트릭스의 노예로 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실세계에 온 것을 후회하는 인물입니다. 영화는 사이퍼를 통해 문제는 매트릭스가 만든 가상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외부나 환경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허구를 허구로 못하게 방해하는 건 우리의 물질적인 욕심(desire)이고 무지(ignorance)입니다. 그러나 네오의 행동은 문제의 해결책 역시 우리에게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 나오려 적극적으로 빨간약을 먹고 내면의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붉은 색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경고하는 사인.
우리 주변에는 세치 혀와 그럴듯한 PPT, 영상자료까지 만들어 우리에게 천국, 명예, 부, 행복한 노후 등 달콤한 가상세계를 팔아먹는 천재적인 사기꾼들로 넘쳐 납니다. 이마 이 분야의 공식 기록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단연 기네스 감입니다. 사이비 교주, 부동산 분양업자, 투자 상담사 등 이들의 말만 들어도 벌써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얻고 한 달에 월세만 삼백씩 들어오고 내가 투자한 돈은 자고 나면 이스트를 친 빵반죽처럼 쉽게 불어납니다. 이렇게 늘어난 자산으로 구입할 고급 아파트와 외제차가 벌써 머리에 떠오릅니다. 물질적 욕망에 약한 인간이 자신의 뇌에 스스로 주입하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상세계 조작 분야 탑 오브 더 탑은 정치인입니다. 이들이 소속된 정당은 말이 정치 조직이지 하는 일은 가상세계 전문 설계 시공 건설 분양 홍보팀입니다. 게다가 팀을 전국 단위로 운영 신문과 텔레비전 유튜브 등 온갖 미디어 매체를 다 동원하여 국민들을 현혹합니다. 우리나라는 온전히 “법과 원칙”으로만 운영되고 “낙하산 인사”는 없을 것이고 정치는 오로지 “국민의 안전과 민생”만 챙길 거라 약속합니다. 정치인이 약속하는 이러한 가상세계는 너무 그럴듯해 생각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4 년에 한 번 혹은 5 년에 한 번 경험하는 진짜 같은 가상현실입니다. 공정과 상식이라 명명된 가상세계가 건 집단 최면에서 이제 깨어나는지 국민들은 지금 속았다고 광화문에 모이고 교수들은 매일 시국선언을 쏟아내며 난리도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가상세계의 유혹을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스스로의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뿐입니다. 그 시작은 영화 초반에 네오가 던진 바로 그 질문입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가?”
우리들이 끊임없이 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의 운명 때로는 나라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