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인 산업과 IT 프로덕트 생태계의 공통점
패션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쉽게 가진다. 비슷한 듯 늘 다르고, 변화의 유속도 굉장히 빠르다. 그래서 재미있다. 패션 산업은 늘 새로운 자극으로 가득 차 있고, 비주얼적으로도 만족스럽고, 결정적으로, 마스터피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굉장히 흥미롭다.
단 하나의 프로덕트를 만들기 위하여, 유무형의 영감과 스케치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피륙이며 실낱, 부자재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여러 소재 중 무엇 하나 디자이너의 영혼이 담기지 않는 것이 없다. 게다가, 입체적인 인간의 신체에 얹어질 피륙들을 평면 패턴으로 만들어 원단을 조각하고 실로 연결해 덩어리를 만들고 다림질하여 형태를 조형하는 모든 창조는 한낱 직물 덩어리를 인간의 삶 속으로 용해한다. 의복은 인간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함으로 시작되어 꾸밈의 목적까지 충족하도록 발전해 왔고 종국에 그것은 인간의 정숙을 지키기 위해서도 쓰이는가 하면 반대로 비정숙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하는, 다시 말해 정말로 인간마다 그 가치와 용례가 천차만별인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만들어진 '패션'은 결국 인간의 착의로써 완성된다. 그리고 그 순간 디자이너의 영감과 손길, 숨결 따위의 숭고한 것들은 의복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내 꿈은 어릴 적부터 패션 디자이너였다. 어딘가에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행복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이었고. 우리 엄마 옷장 속에는 엄마의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옷이 있다던데 내가 만든 옷이 그렇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흥분되기까지 했다. 지금 이 문장을 적는 순간조차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것을 특별히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는 대학생 때 인턴으로 일했던 패션 트렌드 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아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직했다. 제안은 그쪽에서 먼저 주었으나 내가 트렌드 회사를 선택한 것은, 트렌드를 읽는 것이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패션 회사에 들어가 막내부터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나이의 내가 판단하기에 단순히 회사를 다니며 디자인 '업무'를 할 것이 아니라 '패션 디자인'을 할 거라면 감성과 트렌드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비교적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된 지금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한계는 이르게 찾아왔다. 빠르게 흘러가는 패션 업계 특성상 짧은 시간에도 세미나, 컨퍼런스, 컨설팅, 데이터 분석 등 정말 많은 기회가 찾아와 배운 것은 참 많았지만, 결국 '트렌드'라는 것은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내가 기대한 '새로운' 부분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트렌드는 결과가 아니라 흐름이다. 그리고 그 흐름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은, 최신 트렌드를 분석하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인지하고 척박한 땅에서 먼저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고 싶었다.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알리는 내비게이션보다는, 일단 내가 가 볼 테니 맘에 들면 따라오라고 말하는 탐험가이고 싶었다.
게다가 소위 '업계 문화'라는 말로 잘 포장된 갑질, 열정페이, 상명하복식의 업무구조는 정말 넌더리가 났다(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겠지만, 그때는 그런 곳이 훨씬 더 많았다). 이런 곳에서는 절대 크리에이티브한, 내가 사랑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업무와 전혀 상관 없는 대표의 개인 심부름을 하며, 앞으로 무엇이 되어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했던 그때가 아직도 떠오른다.
이후 방황 끝에 도착한 곳은 어린 시절의 내가 꿈꾸던 화려한 런웨이가 아니라 어두컴컴한 백스테이지였다. 바로, 감히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을 꾸는 스타트업에 가게 된 것이다.
운 좋게 백스테이지에서 세 시즌 정도 일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두근거림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패션쇼 런웨이와 달리, 백스테이지는 정신없이 바쁘고 어둡다. 도도한 걸음걸이로 런웨이를 활보한 모델도 백스테이지에 들어선 순간 자신의 행거로 달리는 동시에 옷을 갈아입는다. 스테이지 연출에 영향이 생길 수 있어 최소한의 조명만 켜두고 휴대폰 플래시를 비춰가며 떨어진 귀걸이를 찾는 일도 허다하다. 완벽한 쇼 연출을 위하여, 백스테이지에서는 양면테이프나 스테이플러처럼 말도 안 되는 도구를 사용하여 옷을 수선하기도 한다. 하나의 쇼를 완성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모든 존재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백스테이지의 바로 그런 점이, 빠른 PMF 검증을 위해 MVP를 추구하며 몇 번이고 피보팅을 감수하는 스타트업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IT 스타트업은 프로덕트로 하여금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우리의 비전을 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세상에 없던 솔루션을 제공하여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프로덕트와 비전을 가진 스타트업을 찾아 헤매다 결국 프로덕트 오너라는 PO 직무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물론 요즘 스타트업은 백스테이지보다 런웨이에 가까운 유니콘 기업들도 많이 있지만, 나는 아직 따라와 주는 이가 많지 않지만 확신 하나로 모험을 감행하는 탐험가에 가까운 스타트업을 더 선호한다.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심어, 아무도 몰랐던 땅에 누군가 발자국을 남기는 일을, 그리고 꽃과 열매는 얼마든지 가져가게 해서 누군가 그로 인해 행복해지는 일을, 가슴 벅차게 좋아한다.
비전에 공감해 주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낀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하여 얻는 효능감과, 여럿이 한 팀이 되어 한 몸으로 움직일 때의 든든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나는 스타트업에 반하게 되었다. 물론, 말한 것처럼 부푼 꿈뿐만이 아니라 차가운 현실 역시 존재하기에, 스타트업이 망하는 경험, 그로 인한 좌절과 절망도 겪어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타트업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패션밖에 모르던 과거의 내게 얘기하면, 절대 믿지 못할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내가 사랑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바야흐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패션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내가 사랑하는 것과 가장 유사하거나 혹은 가장 유사했다고 내가 착각하거나 쉽게 믿어버린 것이다. 여전히 패션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나는 이제 명확히 알고 있다. 내가 사랑했고 또 사랑하는 건, 자극이다. 성취라는 이름의.
지금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은 프로덕트이지만, 훗날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타인의 삶 속에 용해되기 위하여 오늘도 프로덕트 오너의 삶을 살아간다.
내일의 나는 뭐가 될까.
오늘의 나는 그것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더이상 불확실한 미래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거다.
나는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될 거고,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