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풍요와 정서적 빈곤
아이를 키우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나의 위치가 조금 조정되었을 뿐인데, 마치 몽유병을 앓다 갑자기 잠에서 깬 것처럼 내가 서 있는 여기 이곳이 당황스럽다.
나는 전업주부인 엄마 밑에서 자랐다. 아침, 저녁 엄마가 정성스럽게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하원, 하교 후에는 그날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얘기하는 것이 소소한 일상이었다. 친구와 속상한 일이 있을 때에도 집에서 나를 맞이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있었기에, 마음속 응어리를 휘적휘적 풀어가며 다음날을 아무렇지 않게 시작했다. 엄마와 대화하지 않더라도 엄마가 있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나면 다시 다음 날을, 어려운 문제를 대면할 에너지가 푸근히 충전되었다. 물론 나와 다섯살 터울인 어린 동생과 돌아가며 우리집에서 지냈던 친척들도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나만 바라보지는 못하셨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에 엄마라는 존재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내 내면 깊은 곳에 무게중심이 묵직하게 자리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회사와 육아를 병행하기 버거워 부모님께 퇴사를 할까 고민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은 "왜 이렇게 무책임하니?"였다. 물론 어렵게 공부해서 얻은 커리어를 놓아버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섞여있었지만, 아이에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은 엄마로서 무책임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삶에서 아이와 가족이 우선순위였던 엄마가 했던 말이었기에 나에게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엄마가 나를 키울 때는 당연했던 것이 내가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까.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회사 때문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적어 너무 아쉽고 '이게 맞나'라는 혼란스러움이 있지만 나중에 아이에게 사교육이나 더 좋은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계속 맞벌이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 총 GDP는 내가 태어났을 때보다 9배 넘게 증가했는데, 우리는 예전보다 더 경제적 빈곤'감'에 허덕이고 있는 것 같다.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진 사회인데, 왜 예전과 다르게 맞벌이하지 않으면 아이 하나도 키우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벌지 않으면 가정경제가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당연히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커리어에 욕심이 있고 일이 주는 가치가 크다면 당연히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아이를 내 손으로 직접 키우고 싶지만 '돈'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고 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고백하자면 사실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우리의 기준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9배 성장한 물질적 풍요를 이룬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리조트 같은 신축 아파트, 길거리에 자주 보이는 외제차, 휴가를 내고 떠나는 해외여행, 브랜드 옷과 신발, 영어유치원, 명문대를 보내기 위한 사교육 등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 욕망의 크기를 키워나간다.
그런데 문제는 기준이 높아진 것들 대부분이 수치화하기 쉬운 것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서적인 것들 또는 무형의 것들은 '합리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계량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똑똑한' 현대인의 관심에서 빠져나가나기 쉽다. 아이의 반 등수, 학원 테스트 레벨, 대입 결과, 학교 순위, 아파트 가격, 평수, 연봉, 회사 순위, 자동차 가격, 옷 브랜드 등등. 이런 것들은 너무 명확하게 눈에 보이니 관심을 안 두기 어렵다. 내가 남들과 비교하여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로 표시되는 것들은 대부분 그렇듯이 1등이 아닌 한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1등도 영원한 1등이 될 수 없다. 그리고 1등일 수 있는 항목들은 이 세상 사물의 개수만큼이나 무한하다. 어느 위치에 있든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고, 더 부유할 수 있고,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더 큰 평수의 집이 있고, 더 좋은 차가 있고, 더 좋은 학교나 직장이 있고, 더 좋은 옷이 있다. 게다가 SNS와 인터넷의 발달로 더 '높은' 곳이 잘 보이고, 그래서 우리의 기준은 자꾸만 높아져간다.
하지만 사람에게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기에, 이런 숫자에 골몰할수록 숫자가 아닌 것을 등한시하기 쉬워진다. 가족이 다 함께 모여 대화하는 시간, 오래 두고 기억할 추억, 어린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소소한 일상 속에서 감사함과 행복함을 느끼는 것, 소중한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가는 시간, 세심한 다정함을 주고받는 것, 그런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얻게 되는 만족감, 자존감, 신뢰감, 안정감, 연결감, 회복탄력성, 주체성, 개성 그리고 사랑. 30년 동안 이런 계량화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기준도 과연 높아졌을까.
이런 가치들은 수치로 표현하기 어려워 얼마나 늘었는지 또는 줄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 1990년 자살률이 7.6명(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이었음에 반해 2020년 자살률은 25.7명으로, 30년 동안 자살율이 3배 넘게 증가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물질적인 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가 숫자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높은 연봉과 자산이 있을수록 자유로운 시간을 얻을 수 있고 그 시간 동안 무형의 가치들을 더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모두 균형 있게 가져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높아진 경제적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이 계량화하기 어려운 가치들을 등한시하게 된다면 갑자기 은퇴한 시점부터 이 가치들은 누릴 수 있게 될까. 오랫동안 잘 쓰지 않은 근육은 나중에 운동을 해서 그 근육을 키우려고 해도 그 근육이 어디 있는지, 그 근육에 어떻게 힘을 주어야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렵다. 우리 자신과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을 나누는 근육 역시 몇십 년동안 쓰지 않는다면 갑자기 어느 순간 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인지 생각하며, 나와 내 소중한 것을 사랑할 줄 아는 근육을 키워나가고 싶다. 숫자와 관련된 기준만 키워가는 공허한 삶은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하루하루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힘껏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나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조금씩 바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워킹맘, 워킹대디도 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누리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치가 아닌, 당연한 시대에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