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는 것
‘나중에‘라는 말을 싫어한다.
나중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나중에 하려고 했던 것들을 모두 할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가 퇴원하시면 가까운 포항이라도 가려고 언니랑 숙소를 알아봤었다. 할머니와 함께 가면 좋을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여행을 다닐 때 좋은 곳에 가면, 맛있는 것을 먹으면 여전히 그리고 한결같이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매가 진짜 좋아했겠다.” , “할매랑 여기 올 생각을 왜 못했을까.” 지나고 나니 해드린 것보다 못 해 드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할머니와 함께 이곳에 있는 상상을 한다. 짧은 몇 초라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일상에서도 여행에서도 할머니가 써주신 손글씨가 각인된 반지를 끼고 있다. ‘할매가 아라 사랑해’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마음의 위안이 된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느낌이 들어서 든든하기도 하고.
할머니는 나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웃으며 잘 받아주었다. 8년 전 할머니, 언니와 함께한 제주여행의 기록을 훑어보았다. 그때의 나는 할머니를 참 귀찮게도 굴었더라.
“할매, 여기 서 봐! ”
“할매, 웃어봐 웃어봐”
“할매, 브이 해봐”
나의 귀찮음 덕분에 수많은 사진 속 할머니는 환히 웃고 계신다. 나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할머니의 사진만큼은 억지로라도 웃는 모습을 담고 싶었나 보다. 그때의 나는 안 걸까? 훗날 이 찰나가 사진으로 남아 힘겨운 모습보다 좋았던 모습의 할매의 모습으로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머니도 좋아해 주었다. 어느 겨울날에는 언니의 파란색 마티즈를 몰아 할머니와 목욕탕에 갔었다. 초보 운전인 내가 큰 결심을 하고 집에 가는 그 길에 바로 스타벅스로 향했다. 밖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따뜻한 돌체라테 한 잔과 생크림 카스텔라를 주문했다. 할머니는 내 생각처럼 맛있다고 잘 드셨다. 그날의 기억이 유독 진하게 남는다. 집에서 고작 10분 거리인 곳에서 만난 커피와 빵을 참 좋아하셨던 할머니. 지금은 마티즈보다 더 큰 차를 겁 없이 몰고, 3시간 이상의 장거리 운전도 가능한데 내 곁에 할머니가 없다. 지금 할머니가 계셨다면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모할머니가 계신 대전도 자주 다녀왔을 텐데,
할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온점이 아닌 반점으로 끝맺는다. 아쉬움, 죄송함, 그리고 또 무엇으로 표현이 될까. 마음 깊이 남은 할머니와의 추억으로 나는 오늘도 위로를 받는다. 할머니가 나에게 남긴 유산 중 하나는 나중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