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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연 Jun 05. 2024

음식 단상(斷想)

자라는 중입니다. 남편의 감자조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날씨의 연속인 요즘이다.

6월 초순임에도 한여름 삼복더위 못지않은 기온을 보이다가도 아침저녁이면 쌀쌀해지니,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내내 감기를 달고 살지 않는가.

하기사,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어디 날씨뿐인가.

집값도 물가도 정치도, 연일 시끄러운 연예인 사회문제와 사람마음도 그러하다.

이렇듯 가늠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둘러싸여 중심 잡고 사는 것이 무척 힘든 요즘, 우리 집 남자는 음식조리에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하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인가, 새로운 취미를 찾고 있음일까.

왜 자꾸 주방을 들락거리며 냉장고를 뒤지고, 조리대 수납장을 쑤석이며 유통기한 지난 군것질거리를 찾아내는지.

언젠가부터는 전기 압력밥솥에 밥도 하며, 나에게는 살림 경력이 얼만데 아직 밥도 제대로 못하냐 타박이다.

하하하 허탈한 웃음으로 수긍해 주는 것이 가정의 평화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쑥불쑥 치미는 부아에 천불 나는 가슴을 홀로 이고 있는 중이다.


결혼 초에도 설거지나 간단한 음식 조리는 알아서 잘하던 남자였지만, 나이가 들며 점점 잔소리쟁이가 되어간다.

사소한 일에도 사족을 붙여가며 길게 얘기를 하고, 티브이 뉴스에 나온 정치인들이나 연예인 이야기에 핏대를 올리기 일쑤며, 편파적인 정보채널에 쿵작 쿵작 박자를 맞추고 떠들어 대는 남자.

여성과 남성이 일정 나이를 지나면 호르몬의 교체 혹은 바뀜이 일어다는 말이 정설인 것일까?

나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퉁명스러워지는데, 남편은 수다스러운 참견쟁이가 되어가니.......


얼마 전, 인터넷 쇼핑으로 감자 3킬로를 구매했다. 그런데 세상에나, 정말로 형편없는 제품이 왔다.

데굴데굴 조약돌만 한 크기의 갈색 껍질 안으로 초록색이 은은하게 깃든 알감자들이 가득 찬 상자!

껍질을 까기에도 성가신 크기에 짜증이 난 나는, 감자를 박스째 한쪽으로 밀어 놓았고, 남편은 그것이 영 신경 쓰였나 보다.

저 감자는 껍질 까지 말고 그냥 삶아서 알감자 조림이라도 하라고 며칠 내내 참견 섞인 잔소리를 했다.

건성으로 알았다 알았다 대답하며 며칠이 지났고, 어제는 글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니 세상에...!

한 냄비 가득, 간장으로 쑨 찹쌀풀 같은 무언가가 들어있는 게 아닌가.

이게 뭐냐는 나의 경악스러운 목소리에, 비죽비죽 웃는 남편.


"감자조림이 쉬운 게 아니더라고. 당신이 감자 껍질 벗기는 거 귀찮아하는 거 같길래 내가 까서 조려봤어."


안녕, 나는 한때 감자라고 불렸던 농작물이야.

네가 내게 작고 못났다며 던져 놓아서, 네 남편이 나를 이렇게 알 수 없는 형체로 만들었단다.


허허허 내 입에서 헛웃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도 허허허 웃는다.


"아직 한참 멀었나 봐. 예전에 당신이 감자조림 해 놓은 거 보면 쉬워 보였는데 이게 보기보다 까다롭네. 그래도 먹을 만은 해"


싱크대 배수구 안에 한가득인 감자껍질과 조약돌만 한 감자를 깎느라 여기저기 상처가 난 남편의 투박한 손이 보였다.


"아니, 나더러는 껍질 벗기지 말고 알감자 조림 하라며. 그 큰 손으로 이거 껍질을 다 어떻게 깠어?"

어이없어하는 나의 물음에 남편은 또 허허허 웃는다.

"당신이 껍질 안 깐 감자조림 싫어하잖아."

괜히 미간을 찡그린 나는 냄비 속 풀죽 같은 감자조림(?)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우물거리는 나의 눈에, 칭찬을 바라는 아이의 눈을 한 늙은 남편이 보인다.

"맛은... 있네."(사실, 맛이... 없었다. 간장에 퍼진 삶은 감자맛)

나의 평가에 눈에 띄게 환해지는 남편의 얼굴.

"그렇지? 이게 모양은 이래도 맛은 또 괜찮더라고. 너튜브에서 백종 O 감자조림 찾아보고 한 거야!"

입안에 있던 감자를 꿀꺽 삼킨 내게 남편은 어서 손 씻고 와서 밥 먹자 성화를 하며 식탁에 수저와 저분을 놓 아이를 불러댔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내가 조금만 더 해보면 완전 잘할 수 있어."

아니하지 마. 당신은 그냥 나가서 돈 벌어.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그저 씩 웃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아내인 나의 칭찬과 격려가 힘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 무엇이 대상일지라도, 자라나는 중인 남편의 용기와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 가족은, 그날 저녁 상 위에 오른 여러 반찬들 중 아빠의 감자조림(?)에 가장 많은 젓가락질을 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남편은 계란 프라이 외에는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는다. 아마도 요리가 아닌 다른 것이 다시 자라나는 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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