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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연 Jun 28. 2024

음식 단상(斷想)

두루뭉술 함께 김밥

이런저런 일에 오래 치이다 보면

뇌가 제 기능을 못할 가 있다.

해야 할 일도 급히 닥친 일도 또는, 약속되었던 일도 모두 머릿속 뇌수 위에 한 뼘쯤 떠 있는 느낌.

살다 보면 몇 번씩 닥치는 문제라고는 하지만, 이번 고민과 고심은 그 무게가 꽤 무거웠다.

일상이 버거울 정도로.......

그렇게 해갈되지 않는 갈증처럼 혹은 풀 수 없는 난제처럼,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들로 짧지 않은 시간을 끙끙대며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어느새 신경질적이고 못된 엄마가 되어 있다.

출구 없는 미로는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내게 있어 그 출구는, 있더라도 너무나 먼 곳에 있는 듯하여 나는 이 미로의 벽을 부수기로 했다. 결심하고 나니 조금은 차분해진 머릿속.

복잡했던 머릿속에 폭력적인 결론을 담고

난 오랜만에 식구들 먹일 김밥을 준비한다.

아무 생각 없이 김밥 속재료를 만들고, 갓 지은 밥에 참기름과 소금 간을 하고 김밥용 김을 꺼냈다.

그렇게,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들던 김밥이 한 줄 두 줄 완성되며 나의 단상(斷想)이 시작다.


내 머릿속 상태와 똑같은 먹빛 김을 도마 위에 올리고, 여러 문제를 적을 종이 같은 흰 밥을 펼친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하나 문제를 적듯

김밥 속 재료들을 올려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머릿속 맨 끝을 잘 잡아

그 속을 가득 채운 여러 문제들이 삐져 나오지 않고 터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잘 눌러가며 단단하고 야무지게 말아갔다.

그렇게 무한이라고 느껴지는 반복.

생각을 펼치고 고민을 하나씩 하나씩 담고 터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단단하게 말고.......

트레이 위에 있던 김과 보울에 있던 밥이 모두 소진되고서야 끝이 난 나의 생각말기.

답을 찾으려 고민했던 그간의 시간들이 번뇌였다면

문제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생각 속에 담고 담고 담아 한쪽으로 치우는 시간들은 성찰이었을까.

고민이 가득 담긴 작고 까만 김밥기둥을 잘 벼린 칼로 썰고 보니 그 모양이 밉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모두 가시 같고 늪만 같던 그 고민들이

김밥 속에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허탈한 웃음까지 났다.

부숴버리자 산산이 흩어놓고 가벼운 조각만 들고 세월 속에 묻혀가자 결론 냈던 나의 생각 폭력이,

두루뭉술 함께 놓고 관조(觀照)하는 것도 괜찮겠다

그냥 둬봐도 되지 않을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잠시 방치하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부술 필요까지 있어?라는 결론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두루뭉술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내가

두루뭉술한 김밥을 앞에 놓고 두루뭉술해져 갔다.


내 속도 모르고, 커다란 접시에 올려놓은 김밥을 맛있게도 먹는 식구들.

말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속엣말을 외쳤다.

나는 우리의 일상 중 하나를 부숴버리자 주장하려 했다고! 그걸 밀고 나가려 했다고!

엄마는 안 먹냐는 아이들의 물음에,

내가 그동안 번민하며 생각했던 결론카드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소리치지 않고.

두루뭉술한 김밥을 우물거리던 식구들의 입질이 뚝하고 멈췄다.

그리고는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본다.

가장 큰 아이 둘째 아이 그리고 나의 눈에도 습기가 어렸다. 입 안에 가득 찼던 김밥을 삼킨 큰 아이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둘째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우린, 나 혼자 번뇌했던 문제들에 대해 알록달록한 얘기들을 나눴다.


출구 없는 미로는 없다고 했던가

아무리 많이 꼬이고 엉키고 헷갈리는 미로라 해도, 입구가 있으면 반드시 어딘가에는 출구가 있다.

나는 무심코 싼 김밥을 통해 생각의 폭력적 결론을 정화시켰고, 식구들은 내가 두루뭉술 말아놓은 김밥을 먹으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도저히 보이지 않던 출구 대신, 출구의 어딘가 있는 간이 휴식터에 우리 식구는 앉았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저 멀리 너무 멀어서 작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출구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로 했다.

지금은 비록 그 출구가 너무 멀어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출구 밖으로 나가면 환한 빛과 넓은 땅이 분명 존재할 것이기에.


이야기를 마치고서야 겨우 김밥 꼬투리 하나를 집어드는 내게 아이들 모두가 소리치듯 말했다.

엄마도 이쁜 거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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