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연 Jun 07. 2024

음식 단상(斷想)

그 많던 반찬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깍 까악 깍깍 까악 까악’

창 밖, 목련 나무 가지 위에 앉은 까치가 꽁지깃을 방정맞게 들썩이며 요란하게 울어댔다.

만색과 하얀색이 위아래로 대칭을 이룬 듯한 멋진 몸을 가진 녀석이 계속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댄다.

손님이라도 오시려나.”

말해 놓고 보니 집에 올 손님이 있을 리 만무,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다.

가족들은 모두 제 갈 곳을 향해서 아침 일찍 나가고, 집에서 작업을 하던 나는 슬슬 고파오는 배에 책상을 짚고 일어나 주방으로 나왔다.

고개를 들어 주방에 걸린 작은 벽시계를 보니 어느덧 열 한시, 아침을 거른 나는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간단히 뭘 좀 먹을까.”

옅은 노란색 불빛으로 환해진 냉장고 속, 반찬들을 담아놓은 사각의 유리용기들이 보였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만들어, 가득가득 채워 놓았던 밑반찬 대부분이 용기 속에 바닥을 보이며 남아있었다.

호박나물과 멸치볶음, 콩나물과 무생채, 양파볶음과 무말랭이 무침까지.......


저 많던 반찬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버리기도 뭣하고 덜어놓기도 애매한 양의 반찬들을 보며, 나는 적당히 작고 둥근 그릇을 꺼내 남은 반찬들을 모두 쏟아 넣었다. 그러고 나서 참기름과 고추장 그리고 밥 한 공기를 넣고 슥슥 비빔밥을 만들었다.

양념 찌꺼기만 남겨진 채 싱크대 안에 들어찬 여러 개의 반찬통들을 곁눈질하며, 나는 선채로 비빔밥 한 숟가락을 푹 떠서 한 입 가득 욱여넣고 씹기 시작했다.

우적우적우적

고소하고 기름진 각각의 밑반찬들이 모두 하나로 합해져서 내 입 안에서 춤을 췄다.  

 “맛있네!”

아무도 없는 거실과 주방, 마치 누군가에게 말하듯 혼자 중얼거린 말.


끼니때마다 작은 반찬그릇들에 소담하게 담아 각각 내놓았던 반찬들을 떠올리다 보니, 밥을 차린 후에도 늘 서서 동동 대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보 물

 -엄마, 나는 국 싫어 주지 마.

 -엄마, 계란 프라이 해줘.

 -엄마, 이거 맛있네?

 -여보, 아버지 국 더 달라셔.


식구들의 주문과 성화에 마치 가정부처럼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던 나의 모습들이 눈앞에 떠올라 갑자기 컥 하고 목이 막혀왔다.

나는 선채로 먹던 비빔밥을 작은 양푼째 들고 식탁에 와 앉았다.


 많던 반찬들을 누가 다 먹었을까? 


한 방울 툭 하고 떨어진 눈물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고 입에 있던 밥을 다시 우적우적 씹었다.


짠맛이 난 것 같았던 비빔밥을 다 먹고 나니, 양념찌꺼기만 남은 반찬통들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슬몃 치밀어 오른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아.

 정수기에서 물 반 컵을 받아 꿀꺽꿀꺽  마신 다음, 수세미에 주방세를 꾹 눌러 짰다.

벅벅 주물러  거품을 낸 후 성난 손길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은 그릇과 수저, 그리고 씽크대 속 여러개의 반찬통들을 닦으며 생각했다.


누가 다 먹긴 누가 다 먹어.

내가 먹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먹었지.

누굴 탓해. 내가 좋아서 했던 반찬이고 내가 좋아서 먹인 사람들인데.

 스스로 챙기지 못 놓고 왜 애먼곳에서 서럽다고 난리람.


거품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 낀 손이 툭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왜 그랬지?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월급 받는 가정부도 아닌데 나는 왜 그랬지?

누구에게 인지 모를 눈흘김후 나는 다시 그릇들을 닦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먹자.

이제부터는 밥상을 차린 후, 절대 식탁에서 일어서지 말고 나도 스스로를 사랑해 주자.

엄마 밥 먹잖아. 물은 네가 떠다 먹어.

우유? 꺼내서 따라먹어. 국? 더 먹고 싶은 사람이 떠다 먹자. 반찬 부족하면 냉장고에서 꺼내와.

이렇게 얘기하자.

가끔씩은 나도 수박의 가장 맛있는 가운데도 파먹어보고, 갈치의 가장 통통한 가운데 토막도 내 앞접시에 놓을 거야.

소고기 뭇국 속 고기도 듬뿍 떠서 내 국그릇에 담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도 두어 가지씩 만들어야지.


참 별 것 아닌 것에서 스스로 못나게 굴었던 오후의 단상

이제, 비워진 반찬 그릇을 채우기 위해 장을 보러 가야겠다. 

식구들 좋아하는 소고기버섯볶음과 새우마늘종볶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더덕장아찌도 좀 사 와야겠다.

사랑하는 내 사람들의 입을 행복하게 해 줄,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반찬을 만들기 위해 찬거리를 사러 나서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무척 가볍다.

작가의 이전글 음식 단상(斷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