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포기의 과정은 온전히 나만의 것일까
사람들은 늘 선택의 기로의 놓인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포기할지,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에 맞추어 결정해야 한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에게 있어 이러한 선택의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미소는 자기가 좋아하는 담배와 술, 그리고 남자친구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래서 미소는 돈이 부족해지자 과감하게 자신이 살고 있던 방을 빼버린다. 남들이 봤을 때 미소의 이런 선택은 미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작 담배와 술 때문에 안락한 안식처를 버린다는 것이 어찌보면 무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소에게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잠은 어디서든지 자면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3가지만 계속 충족하면 된다.
방을 뺀 미소가 하루하루 버티는 곳은 과거 밴드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의 집이다. 친구들의 집에서 짧게나마 머물면서 미소는 친구들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결혼 후 시집살이에 지친 모습, 이혼 후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 남편에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 부모님의 영향으로 결혼하고 싶어하는 모습 등··· 친구들은 사회적으로 평범한 삶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미소는 친구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이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힘들어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만 할 수 있다면 이런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들이 미소의 선택을 이상하게 여겨도 미소는 아무렇지 않아한다.
미소가 좋아하는 것들만 마음대로 다 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런 미소를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그동안 잘 머물던 친구의 집에서는 친구와의 불화로 인해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고, 담배와 위스키 값은 올라서 더욱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남자친구는 갑작스럽게 해외로 떠나고, 가사도우미 일마저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끝까지 자신의 취향을 지킨다. 백발이 되지 않기 위해 먹었던 약과 소통의 수단인 핸드폰도 끊고, 텐트에서 생활하면서 말이다.
이런 미소의 비현실적인 선택은, 우리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즉, 내가 ‘자의적으로’ 원해서 선택했다고 판단되었던 것들이 정말 나의 의지만 포함되었던 것인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미소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취향을 유지하지만, 점점 더 그 취향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자신의 취향을 위해 좋지 않은 사회적 시선들과 (의도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은)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감내하는 것은 쉬운 일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고, 일정 부분을 포기하면서 삶을 조율해나갈 것이다. 미소 역시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미소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마지노선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 생활은 전혀 미소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이는 곧 삶과 죽음의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삶을 원한다면 그토록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던 미소도 어느 정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소가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미소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삶의 지속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 무조건적으로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사회적 삶의 유지가 가능한 쪽을 선택한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이루지 못한 진짜 꿈에 대해서 동경을 갖게 되는 우리들은 영화 ‘소공녀’를 보면서 미소를 응원하게 된다. 영화 속 미소는 끝까지 아주 담담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다 하면서 지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미소가 텐트에서 지내는 마지막 장면은, 미소의 최후를 암시한다. 죽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포기하면서 삶을 유지해나가거나. 어느 쪽이라도 좋은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 같아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선택의 숨겨진 이면인 것 같아서 담담한 미소를 보는 나는 오히려 씁쓸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