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틈에서 이 기자는 살아 있는 권력과 여러 차례 충돌하면서 기자란 국민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고,
기자가 지켜야 하는 가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했다.
『기자 유감』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혐오다.
'바이든 날리면' 사태, 도어스테핑 충돌, 홍어 논란(특정 지방 비하), 세월호 참사, 살인 예고 등 기자로서 경험하고 느낀 여러 혐오를 공유하면서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
이기주 기자는 다시는 위와 같은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함께 머리를 맞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1. 어느 날 갑자기 기자가 되었다. - 15쪽
이기주는 2008년 6월 광우병 사태에서 곤봉과 방패를 보고,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힘겹게 기자의 세상으로 들어온 이기주 기자는 2023년 5월 31일, TV 뉴스에서 한국 노총 간부 김준영 씨가 7미터 위 마루에서 경찰봉에 머리를 맞고 - 시뻘건 핏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동료들이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항의해도 경찰은 곤봉 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망루에서 외친 요구는 '포스코 하청 노동자의 노동삼권 보장'이었다.
김준영 씨가 쓰러졌을 때, 이기주 기자는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그만하라도 외치던 2008년 6월 광우병 사태로 촉발된 그날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기주 기자는 경찰의 곤봉질을 다시 본 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무력감이 찾아왔다.
백남기 농민 사망 때도, 쌍용차 사태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똑같이 느꼈던 그 기분, 기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는 허상일 것 같은 불쾌한 그 느낌. 때리면 때렸다고, 맞으면 맞았다고 중계하는 것 그 이상을 해내지 못했다는 무력감이었다.
그런 무력감이 어디 이기주 기자뿐이었겠나!
우리 같은 소시민들도 그런 무력감을 느꼈다.
세상이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이 흔들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그 무력감을 매일매일 깨닫고 있는 것 몹시 힘들거나, 외면하거나.....
2009년 1월 20일 아침, 용산역 맞은편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철거민과 경찰이 충돌했다.
용산 4 구역 재개발 보상 문제 때문이었다.
특공대원들이 크레인을 타고 옥상 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 불이 나, 6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당일 저녁부터 열린 용산대책위가 주최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수습기자였던 이기주는 현장 상황을 선배 기자에게 모두 보고 했는데, 그는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보이는 깃발 수를 세고, 깃발에 적힌 단체명을 모두 적어서 보내라는 지시와 함께 '박석운'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박석운은 2008년 여름 '광우병국민대책 회의' 지도부를 역임한 인물로 당시 이명박 정권 입장에서는 반정부 성향의 인사였다.
일단 지시받은 대로 보고하면서 철거민이나 화재 원인 취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지만, 전국철거민 연합회 같은 외부 세력에 집중하는 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 날 이기주 기자 이름이 병기되어 실린 한국경제 TV 기사는, 기자 생활을 갓 시작한 그에게 커다란 상심을 안겨주었다.
<용산대책위 알고 보니 '광우병 대책위'>라는 제목으로 "모두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관련 불법시위를 주도했던 단체들"이라거나, "도로 불법 점거와 투석전 등 불법 과격 시위를 주도했다." 등의 부정적 표현이 다수 등장했다.
언론이 청와대 홍보 지침대로 보도한 것이다.
그는 기자라는 타이틀이 늘 떳떳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셈이다.
이기주 기자가 당시 근무하던 한국경제 TV는 현장 기자가 40명 정도인 작은 언론사였지만 열정적인 기자들이 꽤 있어서 그는 기자 생활을 빠르게 적응했다. 당시 사장은 월급이 다 협찬과 광고에서 나오는 것인데 기자라고 못 할 것 없다며 협찬 활동을 독려했다.
이 기자는 2010년 천안함 국가 애도 기간에 어느 공공기관장이 부부 동반으로 외유성 해외 출장 떠난 것을 취적한 적이 있다.
기관장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특종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관의 언론 담당 임원과 부서장이 회사로 찾아와 간부들과 면담했다.
그들이 떠난 뒤 부장은 이기주 기자를 불러 기사를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협찬 들어올 시기가 얼마 안 남았어. 무슨 말인지 알지?"
기사를 취재한 이기주 기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사는 삭제됐다.
기자가 된 지 3년쯤 됐을 무렵, 한 선배 기자가 특종을 하려면 골프를 칠 줄 알아야 한다며 골프 배우기를 권했다.
골프를 배우고 선배들을 따라나섰지만, 골프 치고 식사까지 하는 동안 취재라고 할 만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기자들의 비용은 매번 상대측에서 냈고, 기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계산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취재를 빙자한 공짜 골프는 이미 기자들의 일상이었다.
2016년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출입처의 접대 골프 문화는 잠시 자취를 감추는 듯했지만, 최근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협찬과 공짜 골프, 우리에겐 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시급하다.
지역감정과 혐오는 수십 년이 흘러도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국민 통합은 선거 때마다 등장하지만 허울 좋은 구호로 소비될 뿐이다.
"너는 홍어는 아니구나."라며 갈라 치기부터 하는 세상이었다.
멀쩡히 일하던 기자가 정권 교체 5년마다 회사 밖이나 창고로 발령이 나고 기존 업무에서 배제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 MBC다.
처음엔 피해자였지만 다시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였다가 또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는 악순환도 끊이지 않았다.
이기주 기자는 보수 정권이 만들어놓은 괴이한 언론 지형에서 탄생했다.
이동관, 김재철로 대변되는 보수 정권의 상징인 종편이 득세할 때 MBC에 둥지를 틀었고, 김재철 키즈로 불렸다.
이 기자는 누군가의 키즈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다.
'첩의 자식'에게만 씌워진 스스로를 증명해 내야 한다는 굴레는 10년 넘도록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성과와 능력으로 인정받으면, 무리 지어 힘을 과시하는 이들보다 더 큰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소득이었다.
이기주 기자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는 일단 문제 제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기자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닥쳤던 곤란한 상황들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기주 기자의 사표(師表)인 리영희 선생은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에서 '오늘의 사실을 오늘 규명하지 않으면 통치 계급의 횡포는 계속되고, 대중은 암흑을 더듬는 상태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 기자는 허위의 권위를 벗길 기자의 용기는 먼 훗날이 아닌 바로 오늘 필요하다는 선생의 말이 좋아서 한때 책상에 글귀를 따로 붙여놓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이 쓴 <<기자 풍토 종횡기>>와 <<직업 수필>>은 이기주 기자의 생활지침서였다.
2. 청와대 기자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 - 53쪽
2023년 2월 언론정보 학회가 주최한 '대통령과 언론' 세미나에서 이 기자는 윤 대통령의 언론관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기자들의 게으름을 자성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 세미나가 열리기 1년 전 윤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 언론사 파산까지 언급해 이른바 사적 보복 논란을 일으켰었다. 아내인 김 여사의 7시간 녹취 보도 직후여서 논란이 확대될 법도 했지만, 대장도 이슈가 워낙 컸고 다른 이슈들도 많다 보니 기자들은 윤 대통령의 위험한 언론관을 외면하는 우를 범했다.
당선 후, 그의 위험한 언론관은 현실이 됐다.
KBS와 MBC 등 공영방송은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권력을 쥐여준 이들은 그를 예리하게 보는 데 실패했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
이기주 기자는 오늘의 결과가 기존 정치인들의 무능, 권력 감시가 본령인 언론의 오만으로부터 싹텄다고 생각한다.
검증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기자들부터 반성해야 한다는 이 기자의 목소리가 절벽에 부딪히는 현실처럼 답답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맞은편에 부딪쳐 돼 울려오면서 더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
이기주 기자는 2023년 2월, <1호기 속 수상한 민간인> 특종 보도로 제54회 한국기자 협회가 수여하는 한국기자상 '대상'으로 선정됐다.
한국기자상은 우리나라 기자들이 받을 수 있는 상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50년의 전통이 있다.
이후, '바이든 날리면' 사태와 경찰 수사, MBC에 대한 외압, 전용기 탑승 배제, 묻지 마 식 충돌 등 일련의 과정에서 겪으면서도 이기주 기자와 MBC 동료들은 감시자의 역할을 꿋꿋이 해내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MBC가 윤석열 정부에 불리한 보도를 했다고 주장할 때마다 국익을 등장시켰다.
불편하고 껄끄러운 보도에는 여지없이 정파적 프레임도 씌워졌고.
대통령 취재에는 '풀러'라는 개념이 있다.
출입 기자만 100명이 넘다 보니 대통령 경호가 중요한 행사장에 기자들이 모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대통령이 참석하는 일정마다 출입 기자 1~2명이 순서대로 돌아가며 현장 취재를 하고, 취재 내용을 기자단에 공유한다.
이렇게 기자단 대표로 취재에 나서는 기자를 풀러라고 부른다.
플러는 기자들 사이에서 순서대로 돌아오는 당번 같은 개념이지만, 못 들을 권력과 안 들을 권력, 또는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들었다고 해버리면 대통령의 공식 발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바이든 날이면' 사태는 그래서 특이한 사레다.
당시 플러로 간 취재기자는 TV조선 소속 기자였는데. 그가 공유한 대통령 발언 내용에 '바이든 날리면'은 없었다.
그런데 현장에 가지도 않은 이기주 기자가 촬영 플러가 찍은 마지막 장면에서 '바이든 날리면' 발언을 찾아냈으니, 정부와 여당이 볼 때 이 기자가 얼마나 미웠을까?
이 사건 이후, 대통령실은 이기주 기자에게 더는 플러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이든 날리면' 사태가 터진 뒤 대통령과 참모들은 무엇이 어째서 가짜 뉴스라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가짜 뉴스 타령을 늘어놓았다.
이기주 기자는 '최초 발견자'라는 이유로 보수 성향 정치단체와 언론인들에 의해 가짜 뉴스 유포자로 지목됐다.
MBC를 가짜 뉴스라고 몰아세우던 이들은 가짜 뉴스를 누가 어떻게 판정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논의를 시작하기보다 여론을 물 타기 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신문의 시대가 저물어가듯 신문 칼럼이 여론을 주도하던 시대도 끝나간다.
신문 칼럼은 여야가 매일 쏟아내는 독설 논평의 확장판으로 변질됐다.
기자가 쓰는 기명 칼럼은 자기 독자층만 열광시키는 정교한 글 솜씨로 각 진영의 격문 역할을 하며 점점 더 자극적인 글을 뽑아낸다.
신문 칼럼이 기자의 감정 배설 창구로 전락하는 동안 여론 주도의 기능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로 옮겨갔다.
정파성과 가짜 뉴스 논란이 따르긴 했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는 대장동 이슈, '바이든 날리면' 사태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등 여러 현안에서 기성 언론보다 빠르게 여론을 주도했다.
칼럼은 기자 개인의 분노 배설 창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영의 논리로 팩트를 흔들어서도 안 된다.
말 그대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른 상태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에 닿기 위해 골몰하면 진영의 사냥개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주 기자가 말하는 요즘 칼럼들의 고질병이다.
2022년 11월 21일 이기주 기자는 회사로 찾아온 경찰로부터, 일베 사이트에 <내가 총대 메고 MBC 기자 이기주 0000 죽인다>라는 제목의 살인 예고 글을 알게 된다.
이 살인 예고 글 게시와 경찰의 수사 착수는 여러 매체에 기사화됐다.
그런데 기사를 보고 오히려 용기를 얻은 것인지, 이후 이 기자의 메일함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협박 글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욕설뿐 아니라, 이기주 기자와 부모와 가족을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이 기자의 고향이 전라도일 것으로 넘겨짚고 전라도 사람들을 혐오하는 내용의 메일도 많았다. (이기주 기자는 서울 출신)
민주당과 연루된 것으로 추측하고 민주당과 연관 지어 빨갱이 운운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이기주는 협박범이 자신을 만나지 못해 혹시 지나가는 다른 MBC 직원들에게 묻지 마 식 칼부림이라도 벌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해야 했다.
살인 예고는 가족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힘들었는지 이 무렵 그의 아내는 아기를 유산했다.
'바이든 날리면' 사태부터 누적된 스트레스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가족들은 의연해 보였으나, 그는 편치 못했다.
살인 예고 사건은 이기주에게 기자로서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도 큰 상처를 남겼다.
3. 기자, 왜 하는 것일까 - 145쪽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진도군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이기주 기자는 그날 아침 서울 신길동 주택가에서 노후주택 밀집 지역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기획 아이템을 취재하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 소식은 오전 10시쯤, 노후주택 취재를 중단하고 사무실로 복귀하라는 지시로, 취재 차량에 올라 DMB TV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 기자는 목포 MBC, 광주 MBC, 여수 MBC 등 진도 인근에 나가 있는 현지 기자들과 서울 본사의 소통 창구 역할을 맡았다. 뉴스특보는 배가 침몰했다는 것과 배 안에 단원고 학생 300여 명이 타고 있다는 걱정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 복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쯤, 보도국 어딘가에서 "전원 구조래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전원 구조 자막이 방송에 떴다.
이어, 한 통의 전화를 받은 부장이 "전원 구조가 아니라는데..."라는 말을 차장급 기자에서 전했다.
차장급 기자는 정부의 발표를 믿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취지의 말을 부장에게 했다.
오보가 정정되기까지 20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기주 기자는 당연히 현장 기자의 취재를 존중해야 한다고 의견을 강하게 내야 했지만,
이날 이 기자는 MBC 보도국 문화에 아직 적응 못하고, 먼발치에서 수수방관하는 무력한 존재였다.
언론사 이직 만 1년 차의 무력함을 방패 삼은 이날의 이 기자는 스스로를 무용(無用)한 존재였다고 회상한다.
전원 구조 오보는 시작에 불과했다.
심야에 진도 팽목항에서 청와대로 행진하는 세월호 유족들의 영상에서 웃는 사람을 찾으라거나, 웃는 사람은 유족이 아니라 외부 세력일 것이니 리포트를 해야 한다는 식의 업무 지시가 줄곧 내려왔다.
이런 지시를 얼굴 붉히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큰 스트레스였다.
유민 양 아버지 김영호 씨의 40일 넘는 단식을 두고는 '좌파 우파 개밥 논쟁'이라는 믿기 힘든 뉴스를 보낸 곳도 당시 MBC였다.
이기주 기자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를 취재하기보다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유병언과 구원파를 쫓기에 바빴다.
'기레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참사의 본질과 점점 멀어졌다.
유병언이 죽은 뒤에야 선정적인 보도에 동원된 사실을 깨달았다.
현장 취재기자의 취재 내용을 묵살하고 정부의 발표를 받아쓰기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때와 달리 2022년과 2023년에는 MBC 뉴스의 신뢰도가 각종 기관 조사에서 연속으로 1위를 기록했다. MBC가 상승하는 동안 JTBC와 KBS는 하락했다.
하지만 MBC 뉴스가 차지하고 있는 1위 자리가 얼마나 허약한지는 머지않아 드러날 것이다.
이기주 기자는 '슬픈 예감은 대개 틀린 적이 없다'라고 했다.
이기주 기자는 일단 기사를 쓰기로 마음먹으면, 제보든 취재원이든 사후 관리에도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기사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도 후 책임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자는 쓰고 현장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취재 이후 현장에 홀로 남는 것은 제보자나 취재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혹시라도 취재로 인해 보복당할 위험이 예상된다면 취재 방법을 바꾸거나 취재 차체를 심각하게 고민해 결정해야 한다.
취재원을 고려하는 것은 기자가 갖춰야 할 인성이자 능력이다.
이를 외면하지 않고 자기 기사가 우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기주 기자다.
그가 왜 기자가 되었는지 알 것 같다.
4. 어떤 기자로 살 것인가 - 179쪽
윤 대통령 취임 조기, 대통령실 한 관계자가 "MBC라고 무조건 비난하려고만 하지 말고, 5년간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있으면 공짜로 전 세계 해외여행 시켜주잖아. 대통령실 출입 기자보다 좋은 것은 없어.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라고 이기주 기자에게 말했다.
대통령 해외 순방 취재 동행하는 것을 공짜 해외여행이라고 불렀다.
이 기자는 5년은커녕 1년도 못 채우고 대통령실 출입을 마감했다.
리영희 선생은 1971년 9월 <<창조>>에 기고한 글에서 "수행기자가 제 나름의 독자적 취재를 하거나 그것이 본사에서 활자화되기 위해서는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권력의 위협을 물리칠 용기는 물론이려니와 동료 기자들이 앉아서도 누리는 혜택을 땀 흘려 뛰어다님으로써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50여 년 전 대통령 수행기자가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권력이 언론을 향해 국익과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이고, 변한 것은 기자들의 용기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기주 기자는 '바이든 날리면' 사태 이후 우기고 잡아떼고 가짜 뉴스로 몰아가는 방식을 줄곧 겪었다.
의무가 없는 이발사도 임금님 귀를 당나귀 귀라고 외쳤는데, 하물며 사회적 책무를 부여받은 기자들이 권력의 발표를 수동적으로 받아쓰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기자는 지금까지 "청와대 기자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 하는 핀잔만 들었을 뿐, 그렇다면 기자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
일부 기자들은 힘들게 얻은 질문 기회를 권력 칭송으로 소모하고, 질문을 가장해 대통령에게 야당 비판의 장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뒤에서 권력을 욕하던 기자들이 권력 앞에서는 셀카 사진 찍기에 바쁘다.
1호기 안에서 대통령에게 사적으로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들은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 피하고 있다.
권력을 향한 불편한 질문을 거부할 바에는 국민을 대신해 질문한다는 말도 더는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권력이 요구하는 협조 체제와 예의범절, 국익과 애국심은 통치자의 논리일 뿐이다.
언론은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주 기자의 『기자 유감』 책을 읽다 보면, 답답한 현실이 그대로 존재하는 데도 체증이 조금 가신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가 왜 바른말을 하며, 탄압받는 힘든 길을 선택했는지는 명백했다.
"적어도 국민을 배신하는 기자는 되지 말자!"는 이기주 기자의 선택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