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의 크기도 왕들의 살아생전 업적에 따라 반비례한다.
석굴암에서 나설 때만 해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17km를 달려온 30여 분 만에 어느새 비도 거의 멈춰가고 있었다.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회색 구름이 물러난 자리로 파란 하늘도 보였다.
문득, 석굴암까지 드센 비바람을 가르며 힘겹게 올랐던 얼마전 우리 발자취가 까마득한 옛일같이 느껴졌다.
신무왕릉은 경주시 배반동 낭산 동남쪽에 위치한 사적지이다.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살펴보고, 2박 3일간 여행을 마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 밖 오른쪽 좁다란 길가 입구로 자그마한 왕릉 표지가 눈에 띄었다. 왕릉 표지판이라 하기엔 작고 허술해 보여, 더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자동차 한 대가 들어설 정도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왕릉이라 하기엔 초라해 보이는 능이 보였다. 고분의 지름 15m, 높이 3.4m로, 신라왕릉 중 규모가 가장 작았다.
무슨 연유인지 궁금해, '경주 신무왕릉' 안내판부터 읽어보니 재위 3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고 쓰여있다. 재위 기간이 이처럼 짧다 보니, 어떠한 공훈마저 쌓기 힘들었을 것이다. 즉위 기간이 짧은 것도 짠했는데, 능까지 작고 외진 곳에 조성된 것을 보니, 살아서의 공적이야 말고, 살아있는 자들에겐 절대적인 평가의 잣대가 된다. 영혼이야 저승에 닿을 때 평가를 받는다 해도.
신라 45대 신무왕은 성은 김 씨이고,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원성왕의 증손자로 43대 희강왕의 사촌 동생이다. 839년 4월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도움으로 서라벌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3개월 만에 죽어 신라 천년 역사에 가장 단명한 왕이 되었다. 죽은 뒤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의해 이곳으로 비정(比定) 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 아무런 시설이 없는 일반민묘 형태로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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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왕릉에서 나와 자동차를 타고 2분(1.7km) 정도 달리다 보면, 자동차 대로 오른쪽으로 신문왕릉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아도 그 규모와 장소가 한눈에 확 띄었고, 주차장도 널찍했다. 방금 들렸던 신무왕릉과 차이가 저절로 느껴졌다.
신문왕릉은 능 전체가 담장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고, 입구엔 홍례문이 설치되어 있다.
신문왕은 왕권 강화와 통치 제도를 정비한 공적을 남겼다. 왕권을 잡자,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며 귀족 세력을 숙청했다.
국학 설립, 9주 5 소경 완성,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 등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문왕은 통일신라의 중흥기를 이끌고 강력한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기반을 다진 왕이다. 그의 업적이 왕릉의 크기와 대로변 번듯한 위치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구름이야 가볍든, 흰색이든 잿빛이든, 노을빛으로 물들던 하늘가로 점차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어둠 앞에선 이 모든 미세한 변화들도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듯 다소곳해지고 있었다.
신문왕릉에서 자동차로 1분 거리(514m)에 사천왕사지가 있다.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경주 사천왕사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가장 먼저 지은 사찰이 있던 자리다. 절터에는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 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 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 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 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 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 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 만에 왕릉 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 ‘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료 출처 - 국가유산 포털
선덕여왕릉까지 다녀올 생각은 중간에 접었다.
경주 낭산으로 급히 어둠이 깃들자, 초행 산길로 들어서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묵'은 올라가자고 고집했지만, 나는 돌아가자고 맞섰다.
왕릉을 모신 낭산이니, 일반인도 이런 명당에 자기 땅이 있다면, 조상의 묘를 모시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해 저문 시간에 이런 어둠을 뚫고 선덕여왕릉까지 오르려면, 오를 때보다는 내려올 때 어둠의 깊이를 상상하기 싫었다.
이번 여행길에선 왕릉까지 돌아볼 계획이 없었지만, 돌아가는 길에 이렇게 왕릉 모신 낭산 옆 대로를 지나게 되었으니, 이로써 만족이다. 아직은 다음에 다시 경주를 찾지 못할 이유도 없고.
저녁식사는 낙동강 구미 휴게소에서 부대찌개와 유부 가락국수로 마무리하고, 울산 경주 여행을 마쳤다.
이번 여행은 울산역 -> 양산 통도사 -> 울산 반구대 -> 장생포 특구: 모노레일 -> 장생포 문화마을(옛 마을) -> 고래 박물관 -> 고래생태체험관 -> '울산함' 승선 -> 경주 불국사 -> 석굴암 -> 경주 왕릉 2곳 -> 경주 사천왕사지 등을 돌아보면서 12개의 포스팅을 남겼다.
글을 쓰면서도 다녀온 곳의 기억이 뒤죽박죽 엉키곤 했다.
딴엔 곧바로 정리해 둔다고 했으나, 돌아보면 늘 뭔가 빠져있어서 뒤늦게 퍼즐을 맞춰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허긴 10월 말 다녀온 여행을 11월 말에야 겨우 갈무리하니,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당연하다.
쌓이는 세월이 곧 연륜이라기보단, 행동과 마음이 느긋해지는 건 확실했다.
손안에 쥐어진 것들은 바삐 빠져나가도 마음은 그 반대가 되어간다. 가벼워지는 만큼 여유롭다. 그래서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