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자유 Mar 29. 2023

엽편 소설 1

운 좋은 여자.

17년 만에 일이다. 결혼하고 내 집 장만하게 된 것이. 그렇다고 으스댈 정도로 대단하거나 비싼 집은 아니다. 대출을 풀로 받아 아파트 절반이 은행 몫이긴 해도 내 명의의 집이 있다는 건,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버틸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있다는 것, 이것은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옮겨 다니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서울 도심보다 경기도에 가까운 비록 변두리라고 해도 당당히 서울 구역에 포함되어 있는 24평 구축 아파트였다. 이혼하고 홀로 아이 둘을 키우며 아등바등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가슴이 벅찼다.

난 운이 좋은 여자라 생각했다.


남의 집이 아닌 내 집으로 이사하고 나니 은근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낡은 가구와 오래된 가전을 내 집에 어울릴 만한 것들로 바꿨다. 생활용품은 이목을 생각해 한 단계 수준 높여 진열했다.

싼 맛에 지겹도록 썼던 2000밀리 대용량 라벤더 샴푸를 언젠가 여유되면 꼭 한번 써보리라 마음먹었던 풀꽃 향 샴푸로 바꿨다. 500밀리 작은 한 병이 라벤더 샴푸 4개와 맞먹는 가격을 보고 몇 날 며칠을 망설였다. 혹시 모르겠다. 다 쓰고 나면 고급 샴푸 통에 싸구려 샴푸를 꽉꽉 채워 쓰게 될지도. 그래도 좋았다.

난 운이 좋은 여자라 생각했다.


일요일 오전, 가장 친한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날이다. 나는 내 집 장만 소식을 전할 것이고 대출금액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회사 출근하는 내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풀꽃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어울릴 만한 신발을 찾다 바이올렛 하이힐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바쁘게 뛰느라 운동화나 로퍼 구두만 신었기 때문에 하이힐은 신문지 뭉치가 박힌 채로 장시간 햇빛을 보지 못했다. 신발장 젤 위 칸에 놓여있던 바이올렛 하이힐을 꺼내 먼지를 깨끗이 닦고 신었다. 어제 신은 것처럼 아프지 않았다.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나섰다. 새파란 하늘과 눈이 부시도록 터져 나오는 햇살이 마치 수채화 같았다. 경쾌히 걷는 발걸음을 따라 새벽 비 맞은 듯한 풀꽃 냄새가 일랑이는 바람결을 타고 숲이 되었다. 너무 행복했다.

정말 운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서울 변두리의 주말 거리는 이상하리만치 한산했다.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상점 유리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우아하면서 당당해 보였다.

‘돈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빚만 늘었는데 참 있어 보이네’ 생각하는 찰나.

끄-----극!

멈췄다. 어어?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래를 본다.

아뿔싸. 하이힐 굽이 맨홀 뚜껑에 박혀있다. 얼마나 깊숙이 박혔는지 꼼짝하지 않는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굽이 위태롭다.

바이올렛 하이힐은- 내게 하나밖에 없는, 남편이 결혼 5주년 선물로 사 준, 이혼하고 처음 신은 것이기에-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인적이 없어 나를 도와줄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이러고 서 있었을까. 

하늘색 블라우스 위로 땀이 떨어져 스며들고 있었고 어느새 약속 시간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결코 나는 운 좋은 여자가 아니란 것을.  




*이 소설은 문예창작학과 스토리텔링 수업 중  눈에 띄는 책을 펼쳐 무작위 단어 세 개를 골라 일명 엉뚱망뚱 창작하는 과제로 저는 대출, 샴푸, 하이힐을 골라 창작하였습니다.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