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의 온도

어른

by 설 jade


밤이 깊어지면 나는 다시 그 이야기들을 꺼내 든다. 키다리아저씨의 낡은 책장을 넘기고, 나의 아저씨 속 지안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들이 품고 있던 그 텅 빈자리가 내 것과 너무 닮아서, 읽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시려온다.


주디에게는 키다리아저씨가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보내주는 편지 한 장으로도 세상이 달라 보였을 것이다. 지안에게는 동훈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도 곁에 있어주는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했을까.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자꾸만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처음 혼자 밥을 먹던 여덟 살 겨울에, 아무도 내 편이 없다고 느꼈던 열다섯 살 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스무 살 여름에. 단 한 사람이라도 "괜찮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줬다면.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저 혼자서 자라야 했다. 스스로 등을 두드려주고, 스스로에게 "잘했어"라고 속삭이며. 때로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기도 했지만, 아침이 오면 또 혼자 일어나 세수하고 하루를 견뎌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조금 어색하다. 누군가 "힘들지?"라고 물으면 "괜찮아"라고 대답하는 게 몸에 밴다. 누군가 "도와줄까?"라고 하면 "아니야, 혼자 할 수 있어"라고 손사래 친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편하고, 기대는 것보다 기댈 곳이 되어주는 게 자연스럽다.

그래서인지 이런 이야기들을 볼 때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갖지 못했던 것들, 경험하지 못했던 그 따뜻함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나는 그 이야기들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조건 없이 지지해 주는 순수한 마음을 본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어주는 그 믿음을.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그 목소리를.

지금도 가끔 꿈꾼다. 누군가 내게 와서 "수고했어"라고 말해주는 꿈을. "혼자서도 잘 견뎠구나"라고 토닥여주는 꿈을. 꿈에서 깨면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있곤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깨달았다. 내가 기다리던 그 어른이, 이제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과거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혼자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어린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세상을 조금 더 믿어봐.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이 차가운 풍경이 전부가 아니야. 아직 만나지 못한 따뜻한 사람들이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아름다운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빨리 마음을 닫지 마. 사랑할 용기를 잃지 마."

그리고 지금은 안다. 내가 받지 못했던 그 사랑을, 언젠가는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혼자였던 사람이 더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다는 것을. 상처받았던 마음이 더 세심하게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 모든 외로움도, 그리움도 헛되지 않을 거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키다리아저씨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그 따뜻한 어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부드럽고 조용하다. 마치 세상 모든 상처를 씻어주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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