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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Dec 01. 2024

당나귀 귀가 되었다

이삿짐  목록에서 그를 지웠다.

한번 누르고 나면 다시 제 스스로 올라오지 않던 흰건반과 눌러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검은건반을 가진 피아노는 응급치료를 해서 소생시키는 방법을 알아봤지만 짐을 싸는 동안 생을 마감했다. 소생시키는데 드는 비용보다는 적지만 생을 마감하는데도 꽤나 많은 돈이 들었다. 스펙 짱 최신식에 밀려 눈밖에 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세탁기는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살집이 큰 장롱 한 짝도 함께 오지 못했다. 새 공간에서 거처할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이 그 이유였다.

한눈에 봐도 듬직한 인상을 풍기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던 그와도 이별해야 했다. 십여 년을 함께 지낸 그는 여전히 뽀얀 피부에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에서 여전히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키는 나와 잘 어울릴 만큼 크고 어깨는 각진 듯 둥글게 벌어졌다. 속은 또 얼마나 넓고 깊던지 온 식구를 다 품어 안을 만큼 넉넉했다.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이 없던 그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뒤처질세라 그의 손길을 빌려 이것저것 열심히 챙겨 먹였던 둘째는 그 사이 아파트 단지 안 슈퍼를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들 만큼 훌쩍 커버렸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집에서 밥 먹는 횟수가 줄었다지만 그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없던 터였다. 오래된 그를 대신할 최신형을 새로 들여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와 함께 보냈던 차갑고 서늘하던 수많은 여름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너무 생생했다.

새집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냉장고에서 냉동고로 자유자재로 전환되는 붙박이 김치냉장고가 이미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자리로 마련된 곳에는 냉온수기를 앉혀놓았다. 어린애가 아빠 양복을 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웠지만 마냥 비워둘 수도 없었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장을 보러 대형마트로 향했다. 짐정리를 하다 보니 자질구레하게 필요한 물건들이 많았다. 매장입구로 들어가려면 전자제품코너 앞을 지나서 가야 했다. 그의 부재를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지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슬금슬금 뻗쳐오는 유혹의 손길이 느껴졌다.

올림픽 시상식 단상 같은 무대 위에서 최신형 냉장고가 우람한 몸매를 뽐내며 근육질의 팔과 다리에 있는 힘을 꽉 쥐고 위풍당당 전시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딴짓 같은 건 하지도 않을 테니 아무 걱정 말라며  비었으면 빈대로 찼으면 찬대로 부드러운 노크 한방이면 훤하게 속을 다 보여주겠다 속살거렸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잡아당겼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평소보다 크게 울려오던 소리에 잠시 거울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시치미를 떼려 미러처리된 매끈한 문짝에 얼굴을 비춰보는데 머리카락으로 덮여있던 안경을 걸친 내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쭉해졌다면  믿어질까.

그를 대신할 또 다른 그를 데려오지 않기로 먹었던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이 홀랑 바꿔먹으려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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