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걷기 2>
엉거츠 산, 바람이 길을 여는 곳
산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15년. 그 사이 여행의 방식도, 마음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관광지 몇 군데를 찍고 오는 여행이 아니라, 걷거나 오르는 길이 있어야 마음이 채워진다. 여름이면 에어컨 빵빵한 집에서 드라마 몇 편 몰아보는 대신, 이젠 땀 냄새 밴 옷을 입고 길 위에서 낯선 바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 화장실 하나 없는 오지에서의 불편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쉼을 주곤 한다.
여행 둘째 날, 우리는 몽골의 명산 엉거츠 산(2085m)으로 향했다.
‘엉거츠’는 몽골어로 ‘비행기’를 뜻한다. 정상에 서면 드넓은 초원이 한눈에 담기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혹은 오래전 이 산자락에 비행기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 되었든 이 산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자연유산 테를지 전역을 품 안에 넣고 있었다.
산행은 준비에서 시작된다. 보온병에 끓인 물, 가방 안쪽에 끼워 넣은 컵라면, 서울에서 공수한 간식들, 혹시 몰라 챙겨 온 칼바람용 두꺼운 옷 몇 벌까지 마치 히말라야라도 오를 사람처럼 짐을 꾸렸다. 몽골 현지 가이드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몽골 사람들은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산을 넘어요. 가축이 가는 길은 다 사람이 가는 길이거든요.” 기능성 등산복에 스틱, 무거운 배낭, 무겁고 투박한 신발은 어쩌면 자연을 좇지만 실상은 그것을 무서워 하는 우리 모습인 것 같다.
최근 들어 체력이 부쩍 떨어진 *연 언니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녀는 계룡산을 종주하고, 울릉도의 성인봉까지 혼자 여행을 감행하는 용감한 사람이다. “난 안 가! 올라가는 건 싫어!”를 외치던 언니는, 정작 가장 먼저 배낭을 메고 출발선에 섰다. 어쩌면 ‘싫어’는 ‘기다려 달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엉거츠산의 출발 지점은 이미 해발 1500m. 숫자로는 고산이지만, 한 발짝 한 발짝 오르면 천천히 보물을 보여주는 산이었다. 다만 뜨거운 햇살이 곤혹스러웠다. 그늘 하나 없이 뻗은 산길 위에서 우리는 침엽수림 그늘을 하나의 목표 삼아 숨을 고르며 올랐다. 땀이 흐르고 숨이 찼지만, 나무 아래에만 서면 바람이 시원했다. 눈 아래로 펼쳐진 푸른 초원은 마치 하늘 아래 깔린 양탄자 같았다. 길 옆에는 여전히 야생화가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어제도 실컷 봤건만, 오늘도 또 발길이 머문다. 휴대폰을 꺼내 몇 장을 담았지만, 사진이 그 풍경의 결을 따라오진 못한다.
한참을 오르니 기암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평원 위, 마치 누군가 던져놓은 듯 각진 바위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포즈로 그 앞에서 추억을 남겼다. 그 뒤로 평탄하고 푹신한 능선길은 숲으로 이어졌다. 바람은 시원해졌고, 그 길 위에서는 고요해졌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정상에 도착했다. 사방으로 조망이 터졌고, 하늘과 땅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별이 떨어질 것 같은 밤하늘을 상상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상엔 어김없이 ‘아워’가 있었다. 몽골인들의 제단. 색색의 천을 감아 만든 기둥이 서 있었고, 돌을 올려놓은 탑도 보였다. 우리는 그 제단을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 돌며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땀을 너무 흘렸는지 입맛이 없었다. 도시락 속 고기 몇 점만 겨우 먹었다. 왕언니는 컵라면 국물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도시락을 싹 비웠다. 그녀는 제주도 올레길, 동피랑·서파랑·남파랑 완주자였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두 번이나 다녀온 인물이었다. '반짝이는 보석도, 좋은 옷도 다 싫고 트레킹 여행이 유일한 사치라는 왕언니는 '60대가 인생의 황금기'라고 설파했다. 나이 듦이 서러웠는데 인생 황금기가 다가온다는 말에 위로됐다.
도시락을 다 먹고 나서야 우리 자리 주변엔 말똥, 소똥, 야크똥이 뒤섞인 진짜 ‘똥밭’인 걸 알았다. 이쯤 되니 똥냄새도 향긋하게 느껴졌다. 몽골, 드디어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적응한 순간.
하산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산악인임을 자부하는 내게 *연 언니가 스틱 하나를 건넸다. 산행 고수임을 내세워도 소용없었다. 결국 스틱 하나를 받아 들고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키 작은 야생화들이 향긋한 꽃내음을 풍기며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가는 길. 전 인구의 반 이상이 살고 있다는 이 도시 외곽에는 판자촌 같은 게르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천 년 넘게 바람 따라 살던 유목민들이 이제는 전기와 수도를 기다리며 도시 변두리에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낯설고도 씁쓸했다.
차 경적 소리가 요란한 도시에서 둘째 밤을 보냈다. 4성급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모텔 정도의 편의시설이다. 다음날은 칭키스칸 공항에서 몽골 최고의 여름 휴양지, 흡수골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연 언니와 나는 7층 방에 묵었고, 다른 일행은 4층. 그런데 4층 일행은 밤새 들려온 한국인들의 노랫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도시 곳곳에 보이는 가라오케 간판과 CU 편의점. 문득 이 청정한 나라가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쯤일까, 우리라는 존재가 그들의 소중한 무언가를 훼손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셋째 날 새벽부터 이동, 200km를 날아 ‘무릉공항’에 도착했다. 시골 우체국 같은 아담하고 소박한 공항 밖에서 현대 스타렉스 4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몽골식 봉고차를 예상했는데 다소 호사스럽다.
앞차가 일으키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며 드넓은 초원을 달린다. 저 초원 어딘가를 칭기즈 칸도 말을 달렸을까. 야크 떼가 지나가는 언덕을 바라보며, 세계 최대의 육상제국을 꿈꾸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울퉁불퉁 비포장길을 몽골의 젊은 운전사는 곡예하듯 달렸다. *연 언니와 나는 놀이기구를 탄 듯 “우후~!”, “오빠 달려~!!”를 외치며 깔깔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앞차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길을 잃은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뒤를 보니 일행들의 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야~~!!! 이제 우리가 1등이야! 먼지 맛 좀 봐라.”
뒤차들을 향해 소리치며 환호하는 아줌마들. 누군가 봤더라면 철없는 관광객이라고 흉봤을 것이다. 그런들 어떠리, 벌써 우린 몽골 초원의 바람에 흠뻑 취했는데.
어머니의 바다 흡수골 호수
두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몽골인의 어머니의 바다’, 흡수골 호수다. 사막과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이 땅에, 이렇게 푸르고 깊은 물이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실제 몽골인들은 이 호수를 바다처럼 경외하며, 신성한 존재로 여긴다고 한다. ‘눈으로만 담고 손으로는 건드리지 말라’는 금기가 있을 정도이다.
호숫가에 자리 잡은 현대식 게르 캠핑장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몽골의 자연엔 정령(sprit)이 깃들여져 있다고 하는데 이 성스러운 호수에는 12명의 수호 정령이 지킨다고 한다. 시끄러운 이방인들에게 정령들이 분명 노하시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