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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은 글렀다

<몽골 걷기 4> 캐리어 끌며 전철 타러 냅다 뛰어

by 포롱

왕언니의 새벽 구조극

캄캄한 새벽 두 시, 우리의 구세주는 왕언니였다. 그녀는 막 잠에 빠지려던 때 카톡소리를 들었다. ‘이 밤중에 웬 카톡?’ 하며 투덜거리셨을 것이다. 젊은이 셋은 왜 아직 안 들어오나, 혹시 또 별 보러 나갔나 하며 눈을 감던 찰나 두 번째 알림이 울렸다. 이상한 예감에 휴대폰을 들여다본 순간, “여자 화장실에 갇혔다”는 긴급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곧장 달려오신 왕언니는 칠흑 같은 어둠 속 황당한 감옥 신세가 된 우리를 구출했다. 그날만큼은 카톡 무음을 하지 않으신 왕언니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흡수골의 12 정령을 이긴 호여사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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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트레킹, 히샤산

여행 마지막 일정은 해발 2,450m의 히샤산이었다. 1,700m 고지대에서 출발해 숨이 차진 않았지만, 신작로 같은 오르막은 다소 지루했다. 길가의 야생화와 저 아래 흡수골 호수의 비경이 아니었다면 발걸음이 한결 무거웠을 것이다.

여섯 시간 가까이 이어진 트레킹 동안 눈에 들어온 건 산보다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발을 맞추어 걷는 부부, 일부러 거리를 두는 부부, 알콩달콩 신혼 같은 부부, 수시로 투덜대는 부부, 그리고 형제자매끼리 동행한 무리까지. 그중에서도 의좋은 세 자매가 유난히 부러웠다. 돌아가신 부모님 이후 소원해진 시댁 식구들,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지낸 친정 형제가 떠올라 마음이 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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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올랐을 때 황량한 산세와 광활한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돌탑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에, ‘우리 성황당 문화가 혹시 몽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산길에 오르막에서 보았던 ‘정체불명 똥’ 위에 누군가가 돌탑을 쌓아놓은 걸 발견했다. 왕언니가 들려준 “스님이 똥을 덮으려 올린 돌이 나중엔 신령스러운 탑이 됐다”는 옛이야기가 떠올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리막의 끝자락쯤 가이드님이 길 없는 풀숲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곧 부드러운 초원이 펼쳐지고 노랑·빨강·흰빛의 야생화가 발끝을 스쳤다. ‘아, 이 맛에 몽골에 왔지.’ 말 그대로 행복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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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서 만끽한 자유

호숫가에 닿자 일행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신발을 벗고 에메랄드 빛깔의 물에 발을 담갔다. 나는 바지가 젖는지도 모르고 자꾸 물속에 들어갔다. 짓궂은 일행이 물장구를 치는 바람에 결국 온몸이 젖어 결국 풍덩 호수에 들어갔다. 온 몸으로 달디 단, 아니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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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파이어와 귀국길

흡수골의 마지막 밤, 게르촌 캠프파이어 앞에 앉았다. 대학 시절 모닥불 앞 통기타 소리에 가슴이 설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불꽃이 사그라질 때까지 잠 못 들었는데 지금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도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어찌할 수 없어 사진만 찍고 숙소로 향했다. 불꽃들이 하늘로 날아가 별로 박히는 순간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하고 잠든 걸 보면 세월은 참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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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토르로 돌아와 몽골 전통 공연도 관람하고 칭기스칸 박물관의 거대한 동상도 올랐다. 그의 말발굽에 고통받았던 우리네 선조를 생각하자 마음 한켠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땅을 직접 걸어보니 단순히 침략자로만 보이지 않는다. 거친 바람과 메마른 대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수 없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자유와 고독, 정복과 생존으로 다가온 그 땅의 풍경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것 같다.


인천공항에 내리자 몽골초원에서 함께 웃고 걸었던 우리들은 곧 지하철과 셔틀버스를 타고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졌다. 분명 몽골 광활한 대지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담대하게 살자 수없이 다짐했는데, 지하철역에 들어서는 순간 단 몇 분 빨리 집에 가겠다며 캐리어를 끌고 뛰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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