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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완느 Dec 02. 2024

글쓰기 초심자

고2 중간고사 문학 시험에서 70점을 받았다. 열심히 공부한것 치고 형편없는 점수였다.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죄다 틀렸다는 것이 억울했다. 고인이 된 작가에게 물어보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를 노릇인데 말이다.‘시대상을 반영한 답’이라고 하는 문장의 타당성 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울며불며 항변하는 나에게 문학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교실을 떠나셨다. 문학 작품은 독자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역인가.


중학생 때만 해도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읽으며 시집에 흠뻑 빠져 있기도 했고,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침대에서 쪼그려 앉아 읽으며 눈물 흘렸던 시절도 있었다. 오체불만족을 읽고 독자인 나와 책 속의 저자가 만나 새로운 이야기 한편으로 풀어내어 독후감상문 상을 받기도 했다. 분명 중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독자로서의 입장을 견고히 하며책을 즐길 수 있었다.


무슨 신분 변화라도 생긴 것 마냥, 고등학생이 된 뒤로는 저자도 아닌 제3의 인물이 정해놓은 답 대로 문학 작품을 해석을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만큼 문학을 단락을 나누어놓고, 단어 하나하나에 밑줄 그으며 시대상을 반영한 상징적 비유를 찾아내는 나라가 또 있을까. 그때 당시 미국에서 전학 온 친구가 한국의 문학 수업이 낯설다 말했던 기억이 있다. 미국에서는 작품을 읽고 느낌을 그림을 그리고 발표하면 된단다. 그때 처음으로 미국이 가보고 싶었다.


작가와 독자의 영역은 절대적으로 각자의 자의적 해석이 허용되는 영역이라 여겼다. 글은 철저하게 작가의 입장에서 써 내려가는 것이고, 독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비평할 권리가 있다 생각했다.


‘초보 작가’도 아닌 ‘초보 글쓰는 이’ 에게 독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글 쓴다는 건 녹록지 않다. 자칫하다가는 글 쓰는 행위 자체가 일시 멈춤 상태로 오랜 시간 머물러 있기도 한다.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독자 입장을 생각하며 써 내려가는 건 일타 작가 정도쯤 되면 할 수 있는 일이지 싶다. 내 생각을 내 마음에 들게 재단하고 손질하는 것조차도 힘겨운데 말이다. 독자를 의식한 글쓰기는 이미 글의 주인이 내가 아닌 타인이 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대부분의 글이 읽히기 위해 쓰이는 것이라면, 작가는 독자의 공감받기 위해 글 쓰는 걸까. 나는 내 삶에 대한 기록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오롯이 개인 소장용이라면 잘 쓰려는 노력도 필요 없는게 아닐까 싶은데,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는 나를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결국 나도 잘 쓰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 행위는 결국 독자를 향한 것인가?


아직은 근사한 글을 만들 요량도 재주도 없다. 솔직한 글쓰기 그것만 해 낼 수 있어도 지금 내겐 과분하다. 내 생각과 다르게 해석되고 읽힐지라도, 서로의 경험이 같을 수 없으니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글쓴이 정도가 되고 싶다. 작가의 경험에 독자의 경험을 더해 새롭게 재 창조되는 행위가 독서라 감히 정의하고 싶다. 철자하게 독자의 입장에만 있었던 터라, 독자의 입장을 고려한 작가의 글쓰기라는것이 참 생소하리만큼 낯설다. 글을 잘 못 쓰는 이가 읽히기 쉬운 글을 쓰지 못하는 변명쯤으로 해두자. 그래야 이 글을 쓰는 내가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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