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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Dec 24. 2024

휴식으로서의 여행

출발

여행은 사실 나와 잘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뭔가 계산적인 성격인데 그렇다고 보통 계산적이라고 할 때 생각하듯이 뒤에서 조종하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저 단지 딱딱 맞아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삶에 있어서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싶어 하는 편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다녀오면 추억이 되기도 하고 당연히 좋은 순간들도 많이 있겠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그 변수라는 것이 평소에 상상할 필요도 없던 부분까지 확장이 된다는 점이 일단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보통은 일을 하면서도 윗사람이 수시로 생각날 때마다 지시사항을 바꿔서 내려보내면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지연된 것이 무엇 무엇 인지도 솔직하게 항의하는 편인데 그런 사람하고 출장을 가게 되면 변수가 수시로 생기는 기적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몇 번의 출장으로 연습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에 적응한다는 건 아마 불가능한가 보다.
유럽으로 여행을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상상도 못 했던 변수라는 것이 대부분 길을 잃거나 소매치기를 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도 듣다 보니 그런 쪽으로 많이 집중을 했다. 변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알아보고 대책도 많이 세웠는데 문제는 열두 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다 보니 나 자신, 내 정신이 멀쩡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지키면 된다고 치고 정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우선, 공항에서는 휴식이 최고이므로 라운지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회원권을 구입했고, 호텔도 좋은 축에 드는 곳으로 잡아서 호텔에서는 최대한 걱정거리가 없게 했다. 여름이었다면 성수기라 훨씬 비싸서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지금은 추워서 결정하기가 쉬웠다. 일정도 따로 정하지 않고 말 그대로 산책이 중심이 되는 휴식 여행이기 때문에 들고 다니는 물건의 범위를 정확하게 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들고 탈 가방을 두 개로 고정해서 정신이 없어서 빼먹는 게 없게 했다.
사람의 일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1%이고 나머지는 시간과 수많은 우연이 만나서 이루어진다. 그 우연들은 우연처럼 보여도 지나고 나서 그 모든 우연들이 거미줄처럼 얽혀드는 과정을 되짚어 보면 우연이라는 말이 우리가 사용하는 그 용도여도 되는 건가 싶은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 대비를 해서 뭔가 효과를 보고 나면 그 또한 뭔가 알고 대비한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어차피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 생각을 많이 해서 생각하지 못한 범위를 줄이는 수밖에.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다 보면 옛날 해외여행이 흔치 않았을 때 왜 다들 유명한 곳에 가서 사진만 찍고 이동하는 코스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도 같다. 단체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우연을 막을 수 있다. 누군가 가 본 길이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고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주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해 왔다는 것은 그런 상품을 진행하는 여행사에는 요령이 쌓였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이런저런 경우에 대해 나름 대응책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용객들은 다시 그 노하우에 편승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았으면 여행을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여행사에서 하라는 대로 했으니 남는 것은 사진뿐일 수밖에. 그렇게 하지 않는 여행이 더 낫다는 게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는 여행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드디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는 뜻이다. 더욱이 해외여행을 자주 가지 못하는 시절에, 한 번 가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올 확률 50%의 방식을 따를지 다들 하는 대신에 나쁜 기억이 생길 가능성은 10% 이내인 방식(때에 따라 말이 안 통해서 갑질할 상대를 못 찾는 경우도 피할 수 있고)을 따를지를 생각해 보면 다들 후자 아니었을까?
나는 여행지에 가서 휴식을 하는 게 좋고, 인터넷에 조금만 찾아보면 수두룩하게 나오는 사진은 별로 찍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행을 간다.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고, 소문난 것만 찾아 사 먹는 사람들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은 거라서  나 같은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휴식에서도 안정이라는 즐거움이 있다. 밀렸던 책을 읽고 원 없이 글을 쓰고 편의점이나 지하철역 등 반드시 목적지가 있어야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길'을 구경하러 나가는 것의 즐거움은 일단 처음 느껴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사실 휴식이 목적이라는 이런 여행도 옛날에는 돈 버린다며 사치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옛날에 비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 요즘은 호텔 예약도 쉽기 때문에 숙소를 무조건 싼 곳만 찾아서 잡지 않으면 신경 쓸 일도 별로 없다. 마음 같아서는 장거리 비행은 비즈니스석으로 하고 싶지만 그 돈을 아껴서 호텔이라도 좋은 곳에 묵는 것이다. 치안이 좋은 곳에서는 버스 터미널 근처애서 묵거나, 그렇지 않아도 어차피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줄 테니. 아직은 다른 나라에 있다는 것이 크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열여섯 시간을 국적기가 아닌 비행기에 앉아 있다가 내려오니 비행기에서, 공항에서 영어를 수없이 사용했기에 호텔에서 영어로 체크인 한 정도로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일 아침이 되면 달라지겠지. 눈앞의 풍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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