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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Dec 26. 2024

키보드취향

모든 것에는 유행이 있다. 개인에게 있어서는 취향이라고 한다. 물론 취향에 있어서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유행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관된 취향도 있고 점점 변하는 취향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관된 취향은 클래식이라고 따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것 정도로 치면 되겠다. 기능상 필수적인 부분이라던가 시간이 지나도 선호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 것들, 혹은 오랜 시간을 밀고 가는 브랜드 파워 같은 것들 말이다. 취향이든 유행이든 결국은 사람들의 감정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에 언젠가 변할 수밖에 없지만 마치 비트코인이 고유의 가치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기관들이 가치를 가진 것으로 취급하면 비트코인실제 가치를 가진 것들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가격이 형성되듯이 유행을 타지 않는 요소 역시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고자 하는 기업들에 의해 클래식의 자리를 오래도록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살펴보 시시때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변하는 유행이 여기저기에 아닌 척하고 앉아 있다.
물건에 대한 취향도 유행처럼 어떤 계기가 있어서 변하기는 하지만 어떤 현상을 보고 나서 그 현상이 계기가 되어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기는 힘든 그런 것이다. 지나고 나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인생이라는 것 안에서 헤엄가면서 모든 요소를 그런 인과간계가 생기지 않을까 하면서 철저하 심각하게 일일이 관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이나 광고산업조차 놓치는 부분이 있는 판에 개인이 스스로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떤 때는 존경하는 사람이 사용했다는 이유로 메모용 필기도구를 만년필로 바꾼다던가, 아침마다 하나의 의식처럼 사용하던 화장품을 어떤 드라마를 보고 나서 바꾼다거나, 소설을 감명 깊게 읽고 소설의 주인공처럼 말투를 바꾼다던가 등 실제로 일어나고 나면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계기들 수없이 많다.
하지만 계기를 알 수 없는 취향의 변화도 충분히 있다. 키보드를 고르는 내 취향이 가장 좋은 예이다. 처음에는 조용한 키보드를 찾았다. 노트북 키보드가 좋은 예이다. 그때는 노트북을 집 밖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없을 때였다. 아니, 내 주변에서만 많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그것이 대략 십오 년에서 이십 년 전이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지금 판매하는 아이패드 키보드도 그 당시 내 취향의 범위에 들어간다. 그런 걸 보면 내 취향이 변한 것도 일종의 유행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갈축 스위치로 돌아섰다. 그때는 그런 키보드를 보면 꼭 눌러보고 다니기는 했지만 실제로 구입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는 별도의 키보드라는 것이 전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데스크톱을 구입하면 주는 키보드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능적으로는 대단히 좋기는 하다. 그러다가 결국 특가로 나와서 구입한 키보드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무아스에서 나온 타자기형 키보드이고 하나가 엘지에서 나온 휴대용 접이식 키보드이다. 접이식 키보드는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아서 쓰는 것인데 휴대용답게 키를 칠 때 가벼운 소리가 난다. 그러나 키보드 자체가 매우 얇아서 칠 때 무게감은 제법 있는 편이다. 구조적인 장치 때문이 아니라 너무 얇아서 손가락이 책상 바닥을 치게 되어서이다. 그리고 그때 느낀 것이 타자기형 키보드가 두께도 있고 스위치도 괜찮고 다 좋은데 자판이라는 것이 타자기에서 컴퓨터용 키보드로 진화를 한 것이 맞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예뻐 보이는 원형 타자기 자판이 지금은 못생기게 네모난 것이 따닥따닥 붙어 있게 바뀐 이유가 있다. 경험상 키와 키 사이의 공간이 좁은 것이 얼마나 오타를 줄일 수 있는 요소인지 모른다. 그래서 타자기형 키보드는 경험상, 절대 글을 쓰기 위한 용도로는 쓸 수 없다. 그냥 게임용 키보드가 훨씬 낫다.
그러다가 한참 가지고 싶어 한 것이 조돌 같은 느낌의 키였다. 동글동글하지만 역시 사각형이기는 한 키들이 있다. 라운드처리된 사각형이라고 할까. 그리고 조약돌 키보드로 나오는 것들은 스위치 소리도 조약돌 투성이인 냇가에서 조약돌들 사이로 조약돌을 하나 던졌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것들이 있다. 30센티미터짜리 플라스틱 자로 나무 책상을 때리는 소리 같다고나 할까. 쇠처럼 차갑지 않지만 단단한 소리. 경쾌하지 않고 뭔가 정돈된 듯한 소리.
그렇지만 조약돌의 느낌은 얼마 가지 않았다. 우선 아무리 라운드 사각형이라고 해도 틈이 넓으면 글을 조금만 빨리 치면 수시로 오타가 난다. 그리고 그 소리도 왠지 모르게 정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시 남의 키보드를 기회가 될 때마다 써 보고 깨달은 것인데, 그런 단단한 소리보다는 글을 쓸 때는 조금은 가벼운 소리가 나는 것이 좋다. 내가 글을 쓸 때 개요를 다 짜놓고 쓰는 타입이 아니라서 왠지 단단한 소리는 줄거리가 이미 다 나와 있고 쓰기만 하면 되는 상태와 어울리지 내가 글을 쓰는 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계속 다.
지금은 적어도 키보드에 있어서는 최종 취향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은 내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계속해서 뒤로 밀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어떤 취향이 다시 최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유행을 돌아서 다시 데스크톱 컴퓨터를 구입하면 끼워 넣어주는 보급형 키보드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충분하다는 거지 갈축에 일반적인 키보드 모양의 키캡을 가진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노트북용 키보드 같은 느낌도 여전히 좋다. 다만,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면, 글을 쓸 때 키보드가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엘지 제품이 아닌 다른 접이식 키보드에는 동그란 고무 스티커를 뒷면에 15개나 붙였다. 

앞으로도 어떤 취향이 생길지 모르겠다. 아예 보급형 키보드만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기계식 키보드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다. 글이 잘 써지고 집중이 잘 된다는 점에서는 아직은 좋지만 사실 조약돌 느낌의 키보드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것만 찾았고 타자기형 키캡이 좋았을 때는 그것이 마지막일 줄 알았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세상에는 돈을 쓰게 만들려고 새로 개발하는 물건이 너무 많다. 그리고 키보드에 있어서도 취향이 될 때마다 마구 구입해서 하나씩 모두 써 보고 싶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키보드가 몸에 조금만 맞지 않으면 글을 아예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핑계 같지만 키보에 함부로 돈을 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키보드로 글이 잘 써진다는 것은 그 정도에 있어서 보급형 키보드 정도면 되는 거지 그보다 잘 써진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잘 써지지 않는 경우에는 쓰다 보니 잘 써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집중이 안 돼서 아예 시작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 본다'가 안 되는 것이다. 굳이 써 보지도 못하고 중고가 될 위험 부담을 가지고 구입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사용하는 키보드는 보급형 키보드 또는 노트북 키보드 같은 것들이다. 기식 키보드도 키캡은 반드시 일반 키보드 같은 모양이어야 한다. 억지로 줄이거나 늘린 키보드는 안 된다. 높이는 높아도 되고 낮아도 되지만 옆으로는 같아야 한다. 소리는 노트북 키보드나 일반적인 기계식 키보드 정도면 충분하다. 보급형 키보드는 다 좋은데 소리가 마음에 살짝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 글을 쓰기 시작하면 바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다. 아마 이런 키보드들이 내 취향에 있어서도, 유행에 있어서도 클래식인 게 아닐까? 게다가 시간이 지나서 내 취향이 계속 유지되듯이 그렇게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실제로 유행에서도 클래식이 되겠지. 보급형 말고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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