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상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p L Dec 28. 2024

페라스트의 여인

그저 훌쩍 떠나보고 싶었다. 번아웃 같은 것이지만 번아웃까지는 아니었다. 번아웃을 겪어본 연서로서는 이렇게 떠나 볼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번아웃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여유로운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생존을 위한 정상적이고 기본적인 반응조차 머뭇거리게 되는 그 상태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이런 결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떠난다는 자체에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그리고 나머지는... 윗사람들의 결정 하나로 수십 명의 아랫사람들이 고생하는, 그리고 그 상태로 자기들끼리 일정 기간 정치게임을 즐길 만큼 즐기고 나면 회사에 위기가 왔다며 다시 직원들의 잘못인 양 직원들의 마인드가 달라져야 한다는 연설의 연속, 지겹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드는 것을 보면 연서는 번아웃이 오려고 한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떠난다고 해서 무슨 답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돌아가면 또다시 그 안으로 폭 빠져서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하겠지. 단지 연서는 회복을 위해 떠나는 것이다. 단순히 놀러 간다기에는 비용이 적지 않지만 요양이나 회복, 특히 입원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비싸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돌아와서 다시 힘만 낼 수 있다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몬테네그로까지는 열 시간을 비행기로 이스탄불까지 간 다음 다시 두 시간 반을 더 비행기로 이동해야 했다. 연서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사람들을 깨우는 것이 싫어서 통로 쪽 자리를 예약했는데 멋지게 나이 든 여성 한 명만 창가에 앉아 있고 가운데 자리는 비어 있었다.
"Hi, I'm Lana, how are you?"
갑자기 여성이 말을 걸자 연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Good!"
하고 대답하니 레이나는 계속해서 연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다가 깜짝 놀라서
"Ah, My name is 연서, 황! Sorry, sorry!"
하고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레이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긴 시간의 여행이니 힘을 비축하자고 하고는 자신은 많이 쓰는 게 핸드백에 다 있어서 핸드백만 가운데 자리 한쪽에 올려놓을 테니 나머지 공간은 알아서 써도 된다고 했다. 연서는 준비라고 해봐야 전자책 하나밖에 없었고 휴대폰은 혹시 비행기에서 영화를 제공하지 않으면 보려고 가져왔기에 앞자리 밑에서 꺼낼 만한 것은 더 이상 없었지만 고맙다고 하고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왠지 퍼스트클래스나 비즈니스 클래스에 어울릴 것 같은 멋진 여성 같은데,라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긴긴 시간 동안 최신 영화를 이것저것 보면서 이리저리 뒤척이고 때가 되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기내식을 먹으며 보냈지만 전자책은 의외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연서가 옆자리 여성을 보며 멋지다고 생각한 이유는 미국인으로 보이는 외모(목소리 톤 등도 포함해서)에다 혼자 여행을 하기 때문인 셈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연서 역시 혼자 여행하는 데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그 정도밖에 안 되면서 뛰쳐나올 정도면 나름 멋지고 독립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멋지다는 기준은 어떻게 채워지는 걸까? 누군가 멋지다고 해 주더라도 스스로를 그 말 한마디 들었다고
'난 멋진 사람이 맞았어!'
라고 생각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계속해서
"나는 멋진 여성이야"
라고 미친년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린다고 해서 그게 스스로 멋있다고 생각하게 될 방법 같지도 않았다. 만약에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걸 보고 <자신감 갖는 방법>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 건 <세뇌>라고 부르는 것이다. 진짜든 아니든 그렇게 생각을 덮어 씌우는 건 결국 멋진 게 맞는지 여부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그러나 연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내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지?'

연서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다른 쪽으로 샌 것이다. 분명히 안대를 쓰고 옆으로 돌아누웠을 때는 회사에서 이럴 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저럴 땐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같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도록 놓아두었던 시간들, 나의 반응들이 내가 스스로 깨어 있었다면,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보았다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돌아보는 게 아니라면, 그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행동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그렇게 행동했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돌아보게 되면 틀렸던 것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지 않을까?
연서는 사고뭉치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여기저기 분란을 일으키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나서 그것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고 최선이었다고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하는 유형도 아니었다.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다. 아니, 분란을 일으키지만 주변 사람들이 피하는 덕분에 분란으로 커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 말고, 정말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아는 듯이 기분은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웃으면서 잘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잘 끌고 나가는 사람들 말이다. 솔직하다는 것을 또 다른 가면으로 휘두르며 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고 배울 것이 없다. 민폐는 민폐다. 우리가 욕하는 진상이나 그 사람들이나.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을까, 그런 결론만 나도 다시 돌아가면 또다시 이런 여행은 필요 없겠지, 하는 생각이 연서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기내식도 맛있었고 영화도 재미있게 보았다. 헤드폰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 웅웅거렸지만 어차피 영어 자막으로 보니까 사실 배경음악이 아니라면 헤드폰은 딱히 낄 필요도 없기는 했다. 열 시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엉덩이가 배겨서 조금 불편했을 뿐.


이스탄불 공항은 정말 넓었다. 환승하는 곳까지 한참 걸었다. 가는 도중에 레이나는 자신은 이스탄불을 구경하러 왔다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레이나가 한참 앞에서 걷고 있었는데 뒤에도 눈이 달렸나. 그녀가 좋은 사람인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연서에게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여자 둘이 돌아다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탄불까지 워낙 오랜 시간을 비행해서인지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까지 두 시간의 비행은 짧은 순식간이었다. 금세 도착해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페라스트. 한 번에 가는 버스는 없고 중간에 갈아타야 했다. 부드바 또는 코토르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고 하는데 잘 모르니 상대적으로 유명한 코토르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기로 했다. 그렇지만 계획은 늘 바뀌는 법이다. 연서가 인터넷으로 미리 조사한 것과 달리 코토르 버스터미널에서 페라스트로 가는 버스 노선은 이제 없었다. 원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코로나 시절에 사라졌을지도. 어쨌거나 10여분을 걸어서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버스를 탔다. 그리고 삼십 분, 정확히 인터넷에 나와 있는 시간에 출발해서 정확히 인터넷에 나와 있는 시간에 도착했다. 시내버스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버스에서 내리면 계단만 내려가면 바로 숙소인데...
계단이 너무 많다.
여자 혼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려가는 건 힘든 일이다. 여자라는 건, 평소에 이런 가방을 끌고 다니지 들고 다닐 일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게 보면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게다가 계단의 한쪽은 비가 많이 올 때 계단으로 물이 흐르지 않게 하려는 건지 그냥 경사이다. 원래 경사가 심한 곳에 만들어 놓은 계단이라서 그 경사로로는 가방을 끌 수가 없다. 그냥 좁은 계단에 움츠리고 가방을 들고 내려가야 한다.
한 열 번은 쉬면서 가방을 들고 내려온 것 같았다. 기내용 가방 하나와 허리에 매는 색 하나인데 공항에서 쟀을 때 9.5킬로밖에 안 되던 기내용 가방이 유럽공기를 쐬고 무게가 늘어났는지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는 허리부터 어깨까지 등이 온통 쑤셨다. 그래도 바닷가까지도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도로가 있어서 가방을 더 이상은 힘들게 이리저리 들 필요가 없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문자로 받은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갔다. 바로 이것저것 확인을 하는데 인터넷에서 좋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먼저 체크하라고 한 것보다는 상태가 훨씬 좋았다.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충전기를 꽂아 보니 전기도 괜찮았다. 인터넷 속도도 빠르다. 요즘은 eSIM이란 게 있어서 유심도 따로 구입해서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데 데이터조차 여기서 와이파이를 쓰면 상당히 아낄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연서는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연서가 여기로 오게 된 계기는 그냥 문득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몬테네그로'라는 말이 어디선가 들려와서 검색해 보자 첫 페이지에 있던, 아름다운 성당 섬 사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옛날부터 지어서 남아 있는 건물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사진들을 보고는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히기에는 여기가 제일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몬테네그로라는 말을 들은 건 사무실에서 누가 테라-루나 재판 소식을 얘기하다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 말고는 누가 입 밖으로 꺼낼 일이 전혀 없는 나라이니까. 생소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으니 그 생소한 이름을 듣고 곧바로 마음속에서
"Yes, It Is!"
라고 한 것도 의외는 아니다.

비수기라서인지 밤이라서인지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었다. 연서는 기내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지만 소화가 하나도 되지 않은 상태라서 슈퍼마켓에서 탄산수만 두 개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에 돌아다니면서 먹을 게 있으면 아무거나 사 먹을 계획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연서는 이곳, 페라스트에서만 열흘을 묵기로 했다. 과연 결론이 날까. 아니면 그냥 우리나라 시골에 있다가 가는 것 같은 그런 상태가 될까. 알 수 없었다.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서 연서는 아침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아마 어젯밤에 열한 시가 넘어서 방에 들어와서 곧장 잠이 들었을 텐데 몸이 찌뿌둥하지만 꿈만 계속 꾸고 제대로 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계속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다가 갑자기 밖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어 보니 성당 종소리 같았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정각이다. 한 시간이나 뒤척거리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대충 옷만 갈아입고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들이니 머리만 질끈 묶고 밖으로 나갔다.
연서의 숙소는 큰 길가가 아닌, 바로 뒤 조그마한 골목에 있었다. 그래도 숙소 뒤로는 바로 계단이어서 계단이 아닌 곳이라는 설명만으로도 바로 찾아오기가 쉬웠다. 골목은, 소나타 같은 차 한 대를 주차하면 아무도 못 지나갈 것 같은 폭이었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지은 건물들이라 그렇겠지. 지금 생기는 동네라면 저렇게 지으면 아무도 안 살지도 모른다. 주차를 못하다니. 1층으로 내려와서 창살로 된 대문을 열어 보니 바로 앞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뒤돌아 보고는 다시 벽을 보며 멍 때리고 있었다. 연서는 잠기지 않는 대문을 잘 닫고 바닷가 쪽으로 나갔다. 이제 해가 뜨려는 듯 높이 산등성이를 따라 푸르스름한 선이 보이지만 정말 해가 뜨기에는 아직 시간이 제법 남은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저렇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특히 겨울에는 해가 언제 뜨고 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연는 어제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 내려왔던 계단 쪽 반대쪽으로 걸었다. 마을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다. 그쪽을 먼저 보고 숙소에 다시 들어갔다가 여덟 시나 아홉 시쯤 되어 나와서 계단 쪽으로 가 보면 대충 근처 식당이 어디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바닷가에는 조그마한 선착장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마을은 채 십 분도 걷기 전에 끝났다. 마을 끝에는 여름에 관광객들이 많이 왔을 때나 사용할 것만 같은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워낙 좁은 동네에 있어서 넓어 보이는 거지 사실 스무 대도 대기 힘들 것 같기는 했다. 주차장에서 다시 마을 쪽으로 걸어 들어오면 한 다섯 명쯤 탈 수 있을 것 같은 배들이 네댓 척 정박해 있는 조그마한 선착장이 있고 그 옆에 약간 계단처럼 보이는, 하지만 사실 용도는 없는 것 같은 곳이 있었다. 연서는 그 계단에 앉아 선착장 난간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멍하게 찰싹찰싹 소리를 내는 잔잔한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가 길쭉한 모양이어서 건너편 마을의 가로등 불빛들이 보였다. 그렇게 그냥 앉아 있었다. 왠지 마음이 포근한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분한데 뭐라고 하지 못했던 기억들도 하나씩 떠오른다. 그리고 화가 난다. 가슴이 답답하다. 연서는 곧 눈을 떴다. 서서히 올라오던 모든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지만 잠을 잔 시간이 절대적으로 짧아서인가 눈이 따끔거려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분하고 답답한 감정이 몰려왔다.

잠깐 꿈을 꾸었다. 연서는 이 바다를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날고 있는 건 아니었다. 사진으로 본 성당 종탑도 저 아래에 보인다. 모르겠다. 마음이 편하지만 왜 편한지 모르겠다. 가까운 곳에 또 성당이 하나 있다. 그러나 역시 발아래이다. 마음이 편안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지? 조금 전까지 그렇게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이런 생각을 한 걸 보면 역시 깊게 잠든 건 아니다. 그리고 불안하다. 편안하고 불안하다. 왜 편안한지 모르겠다. 왜 불안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선착장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연서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제 새벽이 조금씩 밝아오는데, 손이 왜 잘 보이지 않지? 마음은 편안한데. 오른손은 조금 보인다. 왼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앉아 있는 곳도 축축하다. 응? 나는 지금 선착장에 앉아 있다. 그런데 성당이 내려다 보인다.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두 군데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손이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니, 바다 냄새가 아니다. 왼손이 피투성이이다. 왼손 손가락을 따라 피가 줄줄 흐른다. 그걸 보면서도 마음이 편하다. 그렇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연서의 눈이 확 떠졌다.
하늘의 푸른색이 조금 더 밝아졌다. 연서는 여전히 선착장에 앉아 있는 것이 맞았다. 성당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 아니라 뒤돌아 보면 성당이 올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일곱 시이다. 깜짝 놀라서 왼손을 확인했다. 피는 없다. 양손 모두.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은 멍한 상태로 연서는 마을의 반대쪽까지 걷기로 했다. 반대쪽 끝까지 걷는 데는 한 이십 분 걸린 것 같았다. 이쪽에는 스무 대가 훨씬 넘는, 그렇지만 사십 대는 안 될 것 같은 크기의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 일곱 시밖에 되지 않아서인가 식당 간판들은 몇 개 보았는데 문을 연 곳은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이틀이 지나고 연도 이제 이곳 생활에 요령이 생겼다. 식사는 점심을 두시쯤에 먹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보통은 저녁까지 배가 꺼지지 않아서 그냥 그 상태로 있다가 잠이 들게 된다. 아침이 되면 배가 고파서 깨게 되는데, 그러면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신다. 공짜로 마실 수 있는 가루 커피도 있기는 한데, 점심을 먹으면서 한 잔 더 마시는 커피가 정말 특이해서 그 커피를 한 번 마셔 본 이후로는 가루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맛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달랐다. 낮에는 방에서 보통 책을 읽거나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본다. 그리고 한 번씩 밖으로 나가 걷는다. 연서는 눈에 이곳의 풍경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몸부림친다고 피할 수 없듯이, 이곳의 풍경과 이곳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보고 싶어 하고 상호작용을 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렇게 실제로 한다고 해서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결국은 연서에게는 돌아갈 일상이 있는 거고, 이곳의 열흘 역시 사무실의 열흘처럼 인생의 열흘일 뿐이었다. 기억에 남고, 앞으로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으면 그만이다. 굳이 스트레스를 풀고 힐링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이곳의 공기를 체험하러 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몬테네그로어 광고도 모두 즐거웠다.

넷째 날 아침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문득 졸면서 첫째 날 보았던, 성당들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연서는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인터넷을 뒤지면서 비슷한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경로가 있는지 계속해서 검색했는데, 들인 시간이 무색하게 이곳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 중에서는 첫날 버스에서 내렸던 그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검색을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두 시가 되었다. 주섬주섬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점심을 먹고 산책할 겸 다시 버스 정류장이 있는 도로까지 올라갔다 오기로 했다.
점심으로 소시지를 먹었는데, 이곳은 무엇을 먹어도 짠맛이 강해서 나트륨 때문에 소화가 되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치즈조차 짜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맛이 없는 게 아니라서 다 먹는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다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면 짠맛은 모두 잊고 정말 고급스러운 식사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서는 그날 점심도 순식간에 해치우고 마을의 양쪽 끝을 모두 돌았다. 여전히 어린아이들은 연서만 보면
"니하오! 니하오!"
라고 했다. 이곳에서 동양인이라고는 중국인들밖에 오지 않는가 보다. 한국인이 별로 오지 않는다는 점도 여행 목적지로 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데 정말이었다. 실제 중국인도 대여섯 명 보았지만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중국인 대여섯 명도 놀라운 일이었다. 단체 관광객이 없다니.
이제 계단을 오를 차례였다. 마지막 날은 다시 기내용 가방을 들고 올라야 하는 길이니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였지만 그래도 결국은 꿈 때문이었다. 계단은 의외로 가방 없이 오르니 오르기에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돌을 쌓아 만든 계단이라 폭이나 높이가 수시로 변하기는 했지만 거대한 화강암을 깎아서 만드는 우리나라 돌계단 같은 정도의 편차는 아니었다. 고작 해야 2,3센티미터 정도? 계단을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니 양쪽 건물 사이로 바다와 성당 섬이 보인다. 하늘은 파랗디 파랗고 흐르는 구름도 솜털처럼 하얗다. 발길을 방해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마을에서는 몇 걸음만 걸어도 바로 눈에 띄는 게 고양이인데 계단을 오르고 나서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이런 계단이 일자로 있다면 제법 무서웠을 텐데 계단도 골목을 따라 건물들 사이로 구불구불 나 있어서 오히려 재미있었다. 넘어져도 굴러 떨어질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 연서의 머리 위로 건물이 없는 곳이 갑자기 나타났다. 키만큼만 더 걸어 올라가면 꼭대기인 것이다.
계단에서 벗어나 도로로 가 보니 도로 위쪽으로도 산이 이어진 것이 보였다. 산을 깎아서 도로를 만든 거라 옛날에는 저 위로도 그대로 마을이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인구가 얼마나 줄어든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조금 걸어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가 보았다. 바닷가에서는 높았던 종탑이 이곳에서는 내려다 보였다. 꿈에서 본 것은 도로 위로 이어져 있는 산에 있는 또 다른 성당, 그리고 그 성당조차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지만 그곳까지는 갈 방법이 없었다.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네 대정도 주차되어 있었다. 아마 도로 바로 아래쪽에 사는 사람들 차일 것이었다. 집에서 나와서 차에 타기에는 바닷가까지 가는 것보다 이곳이 훨씬 가까우니까. 벤치라도 있으면 앉아서 꿈을 더듬더듬 생각해 볼 텐데 그런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여긴 난간이 없어서 무서웠다. 그럼에도 무섭다는 생각과 뭔가 부글거리는 느낌이 함께 들어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결국
꿈에서 본 그곳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은 짧았다. 그러나 힐링은 충분히 했고, 사람들도 좋았다. 따로 돈쓸데가 없으니 식당에서도 팁을 정확히 10%씩 주고 인사도 받았다. 뭔가 어릴 적 아무 걱정 없이 여행을 다녀 보았다면 그때도 이렇지 않았을까. 그래서 여행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나 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 느낌이 드는 것 자체가 그렇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서는 떠나는 날을 이틀 남기고 첫날처럼 새벽에 선착장에 가서 머리를 난간에 기대고 앉았다. 한참 눈을 감았지만 그런 꿈은 다시 꾸지 않았다. 일곱 시까지 있어 보았지만 하늘이 밝아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기대가 많아서 실망이 컸는지, 긴장을 하다가 풀려서인지 김이 빠진 기분으로 숙소에 와서 침대로 들어가니 휴대폰을 손에 들 새도 없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산이다.
첫날 그 꿈이다.
여자 둘이 있다. 여자 둘이 마을을 향해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연서도 여자들과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며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입을 틀어막고 참고 있었다. 여자 셋 모두 유럽의 역사 다큐멘터리에나 나올 것 같은 생소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마을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온다. 연서는 비명을 참고 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머릿속으로는
'검은 연기가 뭐지? 뭘 태우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다에는 어림잡아도 오십 척은 넘을 것 같은 배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마을에서 조그맣게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연의 앞에 있던 여자 하나가 연서를 돌아보며 뭐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고 말을 하고 연서도 뭐라고 대답을 했다. 그 여자는 이미 눈물을 펑펑 쏟고 있고 연서도 계속해서 눈앞이 눈물로 번진다. 눈을 감는다. 무릎에 고개를 묻은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여자는 간데없었다. 대낮이었지만 갑자기 저녁이 되었다. 마을에서는 하얀 연기가 여기저기서 올라온다. 연서는 검은 연기는 무엇인지 몰랐지만 하얀 연기는 저녁 준비를 하는 정상적인 연기라는 걸 안다. 두 명은 어디 갔지?
연서는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말소리와 동시에 이것저것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여자들과 아이들을 때리고 옷을 찢으며 끌고 갔다. 남자들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서 마을에 거의 아무도 없었다. 몇 명 안 되는 남자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칼에 맞아 죽었다. 남편이 돌아왔다. 내가 무사한 것을 보고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러나 다른 남자들은 살아남은 우리 세 명의 여자들을 계속해서 원망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만큼 남편도 마을의 복수에 더욱 공을 들였다. 아마 눈치가 보였겠지. 다 형제 같은 사람이기도 하고. 그리고 남자들은 떠났다. 그리고 몇 명은 죽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과 아이들을 다시 데리고 돌아왔다.
남편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았다.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은 모두 나를 볼 때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진심인 것도 알지만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를 향했던 원망의 눈초리를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그 원망의 눈초리가 아니었다면 남편은 죽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전쟁. 전쟁이었다.
주섬주섬 칼을 꺼냈다. 남편이 인형과 이런저런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깎던 칼이다. 손잡이를 쓰다듬으니 남편이 어디선가 나타나
"위험하니까, 내려놔, 이런 건 남자가 하는 거라고!"
라고 잔소리를 할 것 같았다.
"아니야, 위험하지 않아. 당신 만나면 내려놓을게. 그럼 되지?"
연서는 웃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칼을 들고 왼손 손목을 향해 내리꽂았다.
바다를 보았다.
연서는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왼손은 금세 축축해졌고 눈앞도 곧 현기증이 돌았다.
눈을 떴다.
연서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멍하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페라스트에 온 이후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서로 친하고 친하지 않더라도 일단 서로 다 알기 때문에 이상한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겼었다. 무섭기는 하지만 보통 생각하는 그런 범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대문이 열려 있었는지, 아니면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고양이 한 마리가 밑에서 문을 긁고 있었다.
"야옹!"
고양이는 한 마디 전하러 왔다는 듯이 그렇게 목소리 한 번 들려주고는 훌쩍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는 대문 틈새로 쏙 빠져나가 버렸다.
"잘 가"
연서는 힘없이 혼잣말처럼 인사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가려다 흠칫 놀랐다.
방의 반대편에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단단해 보이지만 단정하고 예뻤다. 슬픈 눈을 보고 그녀인 것을 알았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했다. 아마 몇백 년 전 이곳 말인가 싶은 말이었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위기를 보아 침대로 가서 앉으라는 말인 것은 알았다.
그녀는 연서가 침대 모퉁에 앉고 나서도 한참이나 슬픈 눈으로 연서를 쳐다보고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연서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언어로 계속해서 말을 했다. 목소리는 간혹 떨렸지만 언성은 높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연서는 그녀가 한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해는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알아들은 건 그녀가 문을 열고 잠깐 고개만 뒤돌아보며 한,
"Zao mi je i hvala" 한 문장뿐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이렇다. 지금의 전쟁이 정치인들이 만들고 국민들이 피해를 보는 것처럼 과거에도 똑같았다. 남자들의 문제로 생긴 싸움으로 온 가족이, 아이들이, 여자들이 끌려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정치인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묵묵히 내가 먹을 것을 손수 마련하는 데서 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데에 만족하던 사람들이 그 작은 행복의 한 조각조차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바닷가를 걷다 보면 400년 전, 해적들이 백여 척의 배를 끌고 들어와 납치를 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이곳 박물관에 가 보아도 그 조그마한 마을의 조그마한 박물관에 이 마을이 휩쓸렸던 전쟁의 역사로 가득했다. 이 조그마한 곳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잘못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죄를 지어야만 벌에 대비하는 법이다. 죄를 짓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이제 죄를 짓지 않았기에 죄짓는 자들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만 인류는 지혜로워졌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도 모자라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과 일면식이 없다는 이유로 희생당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희생시키는 것이 가능한 이상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연서가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는 아침이었다.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을 장기말로 보고 자신들만의 싸움을 하려는 윗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아야겠다, 같은 일차원적인 생각이 아니라 원래 그래왔고 우리는 또다시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라는 지혜를 다시 되새겼다. 전쟁은 반복되는 것이고, 총칼이 없는 전쟁도 조그마한 형태로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페라스트의 그 여인에 비하면 내 전쟁은, 쉽다. 그녀가 연서에게 말했지만 연서 또한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가 되뇌듯 건넨 그 말을 연서 역시 공항철도 열차에 앉아서 멍하게 앞을 보면서 입술로 되뇌어 보았다.
"Zao mi je i hvala...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