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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Dec 31. 2024

수첩과 볼펜

필기구 하나 산 게 그렇게나 기뻐할 일인가? Yes.

드디어 펜을 손에 넣었다. 페라스트에서는 슈퍼와 기념품가게 몇 개밖에 눈에 띄지 않아서 가판대에서라도 볼펜이든 연필이든 있으면 구입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가판대라고 해서 다를 수는 없었다. 신기하게도 가판대에서는 수도쿠나 십자말풀이, 미로 찾기 같은 연필이나 볼펜이 있어야 하는 퀴즈책들도 종종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은 무슨 수로 그것을 풀지, 는 생각이 들었다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볼펜도 없이 사는 집이 실제로 있기는 할까 하는 데로 생각이 미쳤다. 다들 볼펜 파는 곳이 없는데 어떻게 기록을 할까? 어쨌거나 들 휴대폰이 있으니, 그리고 집집마다 인터넷이 들어오니 굳이 볼펜이 필요 없어진 걸까? 그래서 구입하는 사람이 없어서 팔지 않게 된 걸까?

어디를 방문하지 않아서 볼펜을 발견하지 못한 건지를 수없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기념품가게에도 기념 수첩은 있었지만 기념 볼펜은 없었다. 슈퍼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 외에 다른 것 너무 진열장이 작아서 그곳에 있었다면 놓쳤을 리가 없었다. 계산대에는 담배와 라이터만 있었다. 혹시 성수기에는 필기구를 파는 장사꾼도 오는지는 모르겠다. 하루 이틀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서 틈이 나면 찾아보았지만 심지어 호텔 이름이 새겨진 볼펜이 객실에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코토르로 왔다. 보통은 페라스트는 너무나 시골 동네이고 사람이 많이 있을 수가 없는 곳이어서 코토르에서 숙박을 하고 페라스트는 하루정도 배를 타고 가서 관광만 하고 오는 그런 곳이라고 한다. 페라스트에 가는 길에도 느꼈지만, 페라스트가 그냥 시골 마을이라면 코토르는 그래도 읍내 정도의 역할은 한다. 소방서조차 기존 민가를 개조해서 만들었던 페라스트와 달리 코토르 소방서는 소방차의 규모도 다르고 건물도 새로 지은 것이 보인다. 선착장에관광용 보트만 몇 척 보이던 페라스트와 달리 요트도 몇 척 정박되어 있다. 대형마트라고 하기에는 작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대형 올리브영 크기는 되는 마트도 세 개나 있고, 무엇보다 걸어 다니다가 초등학교가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는 학생들이 있다. 그 말은 곧, 근처에 문구점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조금 다르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마트도 필기구는 없었다. 담배나 샴푸 같은 제품이 훨씬 늘어난 것이 보였지만 필기구는 보이지 않았다. 과자 종류도, 음료도 반찬도 많아서 여기에 산다면 직접 요리를 해 먹을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직접 해 먹어야 사용할 만한 식재료도 많은 사람들이 구입해 가긴 했지만.

문구점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파트가 곳곳에 있었으니 우리가 가지 않은 아파트 쪽에도 뭔가가 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성벽 근처만 돌아다녔다. 성벽 쪽도 관광객을 꺼리는 사람들이 가끔 보였는데 이 구역을 벗어나면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질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영어를 못하는 것 손짓발짓을 하면 되지만, 짜증을 내는 모양은 단 한 번 보고 나니 이곳에 정이 다 떨어졌다. 안 그래도 이 voli라는 매장 관광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별 하나짜리 한 줄 리뷰가 줄을 잇는 곳이기는 하다.

일단 문구점에 들어갔을 때 느낌은 '우리나라와 똑같다'였다. 어떤 향신료나 향초 냄새도 나지 않는 그냥 문방구. 계산대에는 마지막까지 보라고 비싼 볼펜, 샤프, 자 등이 꽂혀 있고, 입구 한쪽으로는 2025년 다이어리와 달력들이 놓여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미술시간에 사용하는 물감과 마커펜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주변에 있는 학교가 초등학교라 미술용품이 여기까지만 있는 건가 싶었다. 가방과 장난감만 모아놓은 곳이 또 있었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 더 비싼 볼펜과 수첩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역시 비싼 볼펜들은 상자에 있고 아닌 건 그냥 종류별로 꽂혀 있는 익숙한 모양새이다.

아주 안쪽에는 책도 팔고 있었다. 일론머스크 평전이 'ILON MASK'라고 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이곳에서 들리는 발음대로 이곳 스펠링으로 적은 걸 텐데 그렇다고 사람 이름도 바꿔서 표시할 이유가 있을까? 혹시 이곳 뉴스에서 표시를 저렇게 하나?  딴생각을 하면서 저자 이름들을 죽 훑었다. 여기는 저자 이름을 제목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크게 표시해 놓아서 찾기는 쉬웠다. 네 면으로 되어 있는 책꽂이를 샅샅이 훑었지만 '한강'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나 보다. 도서관에 있는 책도 수량이 워낙 적어서 번역 작업이 너무 느린 게 원인이 아닌가 싶긴 했다. 그냥 세르비아어로 된 책을 구입하나? 인터넷으로? 한편으로는 책이 나오는 속도가 느리면, 나오는 대로 꼭 씹듯이 읽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읽을 책이 너무 많으면 시작을 하기 힘들어지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6.9유로짜리 볼펜 두 개와 2유로짜리 수첩 하나를 구입해서 나왔다. 볼펜과 수첩이 생기니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제 이곳에서 쓰는 글감노트가 또 생겼으니 글을 쓰고 싶은 게 생기면 간단하게 메모를 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굳이 각 잡고 글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밤이 되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위와 같이 생각하며 누워 있었다. 수첩과 볼펜이 책상 위, 컴퓨터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글을 쓰든 메모를 하든 침대에서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으르게 머릿속으로 잘 정리해 두었다가 나중에 '뭔가 기억하려고 했다.'는 사실만 남기고 다 잊어버리는 일 또 벌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일어난 김에 책상 앞에 앉았다.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수첩은 옆에 잘 놓여 있다. 볼펜도 맨 앞장에 끄적여본 것 말고는 완전히 새것이다. 이렇게 첫 기록의 기회를, 볼펜과 메모지는 허무하게 놓쳤다. 볼펜과 메모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 둘이 책상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든든하다.


파스텔톤.

위아래가 구분되어 두 가지 색으로 된 볼펜. 심이 나오는 부분은 둘 다 민트색이다. 반대쪽 부분이 하나는 진한 파랑, 하나는 부드러운 핑크색이다. 모두 파스텔톤이라 강렬하지 않다. 심은 보통 호텔에서 비치해 놓는 볼펜처럼 몸통을 부드럽게 돌리면 나온다.

대리석 무늬. 

검은 대리석 안에 하얀 대리석을 깎아서 넣고 금테로 구분한 것 같은 모양의 표지. 마치 할리우드에 가면 이런 모양의 바닥이 어딘가 있을 것 같다. 노트의 한가운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it's a big world out there. GO - explore"

그렇지만 처음 수첩을 보았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표지의 왼쪽 위 귀퉁이에 거만하게 인쇄된, 책갈피 모양의 공간에 찍혀 있는 글씨였다.

"NICE Notes"

그런데 Notes의 'O' 안에는 깨알만 한 글씨로 'my'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 "My Nice Note"인 건가? 주인이 글씨를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지는 않은 건지 바코드 스티커에는 그냥 'Nice Notes'라고만 되어 있다. 사실 저 'my'는 지금 발견했다. 구입할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문구점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12유로짜리 몰스킨스러운 제본을 한 수첩도 있었는데 어차피 한국에 이미 글감노트가 있기에 그냥 저렴한 것으로 고른 건데 그게

'나는 나이스해!'

하고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볼펜 두 자루의 박스는 버렸다. 수첩은 별다른 포장 없이 저 상태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셋은 어젯밤 처음으로 같이 있었다. 저 볼펜들은 이제 저 수첩에 글을 풀어놓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볼펜들은 물병에 잉크가 어져서 퍼지듯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저 수첩 전체에 글을, 잉크를 퍼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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