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일부러 까치발로 발소리를 줄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가장자리 즉 벽 쪽으로 바짝 밟아서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는 문을 순식간에 열려고 유리문을 당김과 동시에 안쪽 나무문을 확 열었는데, 갑자기 요란하게 뭔가가 바닥에 쿵쾅거리며 뒹구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날아가듯 구른 것이 내 의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엠이 한 손에 얇은 책을 든 상태로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잘 있었나?"
내가 인사를 했지만 엠은 아직 상황이 판단이 되지 않는다는 듯 멍한 상태였다.
"엠?"
엠이 벽까지 굴러가 있는 의자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응, 그래. 뭐지? 내가 지금 의자를 날린 건가?"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밖에 있었으니 의자를 문 앞에 둔 건 자네일 거 아닌가? 그럼 날아간 게 당연히 의자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렇지. 의자는 지금 자네가 서 있는 자리에 있었지. 문은 언제 닫았나?"
"방금 들어오면서 닫았지. 문을 붙들고 서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의자를 문 앞에 갖다 놓은 이유는 뭔가?"
"별 것 아니네. 그냥 그 의자에서 책을 좀 읽었었네. 그 의자에 앉아서 내 의자에 발을 뻗고 있었지."
"그럼 내 의자가 책상 앞에 그대로 있었어도 되는 거 아닌가?"
"자네 자리는 햇빛이 너무 강하게 들어와서 내가 책을 읽기에는 불편하다네. 그리고 나는 벽 쪽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 것이 익숙하고. 그러니 자네 의자에 앉아서 내 책상 쪽을 바라보는 방향에 의자를 놓을 수도 있지 뭐 그런가. 게다가 오늘은 자네가 올 줄도 몰랐네. 알았다면 바로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았을 텐데."
"그렇군. 그래도 바로 가져다 놓았다면 놀랄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지 않나?"
"아니야. 어차피 자네가 들어오면 방해받는 건 똑같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아니 신경 쓰지 말라고는 말을 하면서 왜 그렇게 신경을 긁는 말을 굳이 집어넣나? 내가 오는 게 그렇게 방해가 되나? 섭섭하네."
"자네가 있으면 도저히 책에 집중을 할 수가 없네.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니까 말이야. 이건 절대 욕이 아닐세. 고맙다는 걸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야."
"고맙다니 나도 은혜를 베푸는 마음으로 와야겠구먼."
"머릿속만 안 비우고 오면 언제든 좋지. 자,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나?"
"아니야, 나는 그냥 와서 앉아서 바깥 풍경만 보다 가려고 올 때도 있네."
"그런 건 다른 장소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특히 바다 풍경을 보고 싶은 때라면."
"그것 좋지. 그런데 오늘은 이야기해 볼 게 있어서 온 게 맞아."
"일단 이야기해 보게."
"자네는 혹시 언제 죽을지 알고 있나?"
"그런 걸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
엠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엘, 자네는 나를 사람으로도 안 보고 있구먼!"
"그게 아니라, 혹시나 해서 그렇지. 내가 죽는 날 죽는 걸로 되어 있거나 등등 가능성은 많으니까."
"아니 내가... 아니, 내가 무슨 자네 죽으면 순장되는 사람으로 보이나?"
"그게 아니라 내가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지 않은가?"
"아니, 언제는 존재했던 것처럼 말하는군. 그렇게 따지면 나는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건가? 물어보고 싶다는 게? '너는 내 부속품이다' 이런 거?"
"그게 아니라, 죽고 나서 보게 될 사후세계 때문이네. 혹시 그 죽음에 대해 알면 사후에 대해서도 알까 싶어서."
"사후세계는 없네."
"뭐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을 하는 거지? 죽음도 모른다면서?"
"모르는 건 죽는 날짜고, 죽으면 끝인 건 다 알고 있지."
"하지만 죽으면 끝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죽으면 끝일 때 생기는 문제와 끝이 아닐 때 생기는 문제를 비교해 보면 죽으면 끝인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알 수 있을 걸세."
"평소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나 봐?"
"많이 했지. 혹시 죽으면 나 혼자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아니라는 결론이 난 건가?"
"그렇네."
"아니면 좋겠는 게 아니고?"
"인류에게 영원에 대한 환상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지. 바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불가능할수록 더더욱 바라게 되지. 죽음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는 영생을 꿈꾸지도 않았을 걸세."
"그렇지만 많은 종교가 사후세계를 말하고 있네. 사후에 귀신이 되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
엠이 또 갑자기 웃었다.
"자네, 이제까지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나? 그 모든 사람들이 귀신이 되었다면 지구는 수시로 귀신의 활동을 보아야 하네. 어두운 곳이 어쩌고 하지만 이미 넘쳐나서 힘없는 귀신은 밀도 때문에 그 어둡고 습하고 음기 서린 그런 곳에서 억지로라도 밀려 나와야 한다는 말일세. 그런데도 별로 봤다는 사람이 없다는 건 없는 게 아니겠나?"
"그런 곳에서 밀려 나오면 양기가 강해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내 말이 그 말이야. 이 지구 표면 전체를 덮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밀도가 올라가면 귀신들은 아무리 음기 서린 곳이라도 해도 움짝달싹 못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음기에서는 마음대로 사람을 홀리고 양기가 심하면 못 움직인다고? 애초에 그렇게 많으면 그렇게 장소를 선택하지도 못한다고."
"서로 중첩될 수도 있지 않나?"
"만약 내가 다른 귀신과 중첩이 된다고 하면 나 같으면 그냥 존재하고 싶지 않을 걸세. 그렇게 된다면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수없이 많은 귀신들이 중첩되어야 그나마 물리적으로 표현을 할 수 있는 그런 상태여야 말이 되겠지만 지금 나오는 옛날이야기나 귀신 얘기에서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거든. 그냥 한 명이 죽은 귀신 하나인 경우뿐인데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물건을 움직이고 그러지 않나? 그럼 그냥 틀린 이야기라는 거야. 양쪽 다."
"그럼 귀신은 아니라고 치고."
"아니어야 해. 그게 맞다면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 거야."
"그럼 윤회는 어떤가?'
"윤회든 천국이나 지옥이든 나는 심각한 거짓이라고 보네."
"그 둘을 같은 선상에서 보는 건가?"
"그래. 인간은 자신의 인지능력과 감각으로 받아들인 세계에 대해 너무 집착이 강해서 그것이 영원히 있기를 바라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게 있고, 그러면 육체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영혼일세. 육체는 썩지만 썩지 않는 무언가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육체가 생기기 전에 먼저 존재했어야 하겠지? 육체가 생겼기 때문에 육체에서 발생한 거라면 육체가 죽으면 똑같이 사라져 버릴 테니 말이야. 그러면 육체와 상관없이 존재한 그 무엇 말일세. 영혼이라고 하면 너무 기존 종교와 가까우니 다른 표현으로 해 보지. 우리의 내적 존재가, 육체와 상관없이 그전에도 있어 왔고 그 후에도 있을 거라면 그것이 하찮은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육체를 조종할 때 육체에 잘못한 대가로 뭔가 벌을 받는다는 게 너무 웃기지 않나? 육체가 가진 고통과 감정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예를 들어 컴퓨터 게임을 했는데 게임 중에 다른 플레이어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게임방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매일 손바닥을 맞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해 보게. 이게 말이 되는가? 지나가면 사라지는 그런 종류는 계속해서 살아가는 존재에게는 컴퓨터 게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네. 그 고통에 대한 대가 운운하는 것 역시 그 영원한 내적 존재에 비해 현실의 육체적 고통을 너무 가깝게 느끼기 때문에 원근 감각에 문제가 생긴 것뿐이 아닐까?"
"그러니까 자네 말은 만약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육체를 가지고 지금 이 물리적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는 건가?"
"그렇네. 컴퓨터 게임 속의 세상이 재미만 있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삶이 훨씬 길기 때문이야. 컴퓨터 게임뿐만이 아닐세. 생각해 보게. 영혼이 천 년을 간다고 해 봐. 백 년의 삶의 기간을 주고 그 기간 때문에 나머지 구백 년을 벌을 받을지 어떨지 판결을 받는다고? 사후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들이 비웃을 일이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육체, 물리적인 형체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육체 따위 없어도 되네.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면. 소멸이 두려운 거지 육체가 썩는 게 두려운 게 아니잖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윤리나 이런 부분에서 문제가 많이 생길지도 모르네."
"바로 그거야. 그냥 그게 목적일 수도 있네. 영원을 꿈꾸는데, 그 영원동안 벌 받으면서 허비를 할래, 계속 살아갈래? 이런 협박이지."
"너무 확고하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군."
"하지만 이건 기존 설명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거야. 다른 한편으로 뇌가 육체에서 영혼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작용을 하는 것뿐이고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할 때, 아무런 의문이 없는 건 아니네."
"그게 뭔가?"
"만약 의미가 없다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능력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운명론 같은 것을 말하는 건가?"
"그래. 미래를 기준으로 보면 운명론이지. 과거를 기준으로 보면 가능성의 문제야."
"무슨 뜻인가?"
"생각해 봐.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 때문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한 어떤 결과가 생겼네. 그걸 보고 우리는 그게 운명이었을 거라고, 우연도 그런 기막힌 우연이 없다고 말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미래에서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서 내리는 결론이네. 이걸 과거에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러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우리가 그런 결과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결론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우리가 죽음 이후에 뭔가 더 있다고 끈질기게 생각한다는 것은 곧 미래의 어느 순간 죽지 않으려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네."
"그러니까 자네는 여전히 죽음이 영혼의 종말이라는 쪽인 거군."
"맞네. 말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네."
"사후에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수십 억 인구를 생각해 보게. 과연 맞을까?:"
"아니, 여보게, 과학적인 사실은 설득과 타협과 의견의 문제가 아니네. 그냥 1이면 1인 거지.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설득할 생각도 없네.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게 전부네. 뭐가 문제인가?"
"내가 설득될 것 같아서 그렇네."
"종교는 그냥 덮어놓고 믿게. 그러면 되네. 그럼 마음이 편해. 착한 일 하라고 하면 착한 일 하면 되고. 그건 과학이 아니네. 만약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밀을 듣고 49.9% 나쁜 일을 하고 50.1% 착한 일을 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네. 종교의 교리는 이미 과학의 범위가 아닐세. 과학하고 연결하려는 시도들은 그 자체로 모순일 테니. 그런 데 신경 쓰는 사람들일수록 교리에서 말하는 실천, 그러니까 실제로 하라고 한 것, 그 종교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그 교리가 인류를 위해 하라고 한 본질에는 인색하게 마련이지. 이런 생각을 필터 삼아 바라보면 그들의 말들 중 무엇을 걸러야 하는지 쉽게 알 걸세. 모두가 죽음과 연결되어 있어. 과학과 종교에 대한 싸움이든 실천의 정도에 대한 논의든 종교 자체의 존립에 대한 이단 논쟁이든. 이단 논쟁도 아주 쉽게도 '우리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시작하는 것들이 보통은 종교 자체의 존립을 교리보다 신경 쓰게 되기 때문에 교리 해석을 자기들 존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쉽게 굽히게 되지. 이게 모두 죽음에 대한 감각이 없이 믿어서이네.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하네. 신경 쓰지 않으면 조용해지는 것들이 우리 삶 안에 너무 많아. 좋은 일을 하고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그럼 어떻게 하면 무슨 동물로 태어나는지 같은 그런 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살라고 한 대로 계속 착하게 살면 되는 게 아닌가?"
"어휴.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았네. 생가할 게 많구먼. 할 말이 없네."
"미안하네. 내가 좀 흥분했네."
"하루이틀 생각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답답해서 어떻게 참았나?"
"어차피 이건 내가 직업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네. 나는 그냥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지. 나는 단지 남들보다 조금 직선을 좋아하는 것 같네."
"직언 같은 소리보다는 훨씬 낫네. 그런 건 보통 사람 기분 나쁘게 해 놓고 핑계로 대는 말인데 자네는 그냥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설명'을 하려는 것뿐 아니었나. 직선적이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지적질만 해 놓고 기분 나쁜 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할 때만 쓰는 사람도 많으니까. 자네는 문제라고 할 만한 건 아니었네."
"그렇게 들어주니 고맙구먼. 자네는 종교가 있지 않은가. 어쨌든 내 생각은 그래. 나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그냥 즐기다 가는 거네. 혹시 컴퓨터 게임 같은 그런 거라면 깨어나면 이 육체가 경험항 삶은 훨씬 실제보다 가벼운 삶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걸세. 물론 그때 맞이할 진짜 삶도 나름 문제가 있겠지. 지금 삶에 있는 문제처럼 똑같이."
"아니, 이걸 뭐 고맙다고 해야 하나? 무슨 강의를 들은 것 같아. 나는 한 마디도 못했네. 별 생각도 없었어서."
"이런 생각은 많이 해서 좋을 게 없어 보이네. 결론이 없어. 근거가 거의 없거든. 그러니 양쪽이 팽팽할 수밖에. 나도 육체가 있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고. 이제 머리가 아파서 한숨 자야겠네. 책도 눈에 안 들어오는구먼. 역시 말을 많이 하면 힘들어."
"그래그래 쉬고 있게. 나는 알아서 커피 한 잔 내려 먹을 테니. 물 한잔 줄까? 잠시만 기다리게. 시원한 물? 아, 미지근하게? 알겠네. 눈 감고 있어. 그래그래,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