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관광이 아니다. 여행은 관광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여행과 관광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관광은 글자 가대로 읽으면 빛을 본다는 것으로, 선진국 견학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동굴에서 빛을 보고 따라가듯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발전된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배운다는 것이다. 관광의 뜻이 놀러 다니는 여행이 된 지 오래고 나 역시 여행을 관광의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상에서 관광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던 의미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런 경향이 더 도드라지기는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것이 없을 때에도 어디를 가면 반드시 이러이러한 것을 해 보아야 한다는 '공식'은 늘 있어 왔다. 파리까지 가서 루브르 박물관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던가, 제주도까지 가서 무슨무슨 폭포를 보지 않으면 비행기값을 날린 거라던가, 싱가포르에 갔으면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도 가 보아야 한다거나, 당장 해외여행이 아니라도 어디에 갔을 때 근처에 평점 좋은 식당이 있으면 그곳에 꼭 가서 먹어 보아야 한다거나. 그 하나하나가 관광이라는 단어에 있는 바로 그 빛이겠지. 하지만 여행은 남들 다 해본 것을 하지 않았다가 생길 박탈감을 예방하기 위해 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남들 다 가보는 해외여행, 나도 왔으니 남들 해본 것은 다 해보고 가겠다.'는 식의 오기가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옛날, 시골쥐가 서울쥐의 초대를 받아 서울에 왔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시골쥐가 서울쥐를 따라 각종 교통사고와 야생성을 아직 가진 길거리 동물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간신히 서울쥐의 집에 도착했을 때, 시골쥐는 자신은 이런 곳에서는 살지 못하겠다고 했지, 서울에 오는 쥐들이 모두 하는 것을 자기도 해 보아서 좋다고 하지 않았다. 서울쥐는 그것을 부러워하는 시골쥐들이 많이 본 것처럼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 이야기에서 서울은 사람들에게 좋은 곳이지 쥐에게 좋은 곳이 아니다. 쥐가 나름대로 아무리 즐긴 들 쥐는 서울이 뭔가를 베푸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서 어떤 것을 해서 아무리 좋다고 느껴도 그것은 여행객이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실제로 도시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관광상품이 있다고 해도 그 나라에서는 그 상품을 구경하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뿐, 그 장소가 관광객들의 공간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공간의 주인은 엄연히 그곳의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유롭게 느끼든, 얼마나 개방적으로 느끼든 그 체험이 제한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착각, 그것도 엄청난 착각이다.
그러니 누구는 무엇 무엇 앞에서 사진을 찍었으니 돈값을 했다더라, 또는 누구는 어디서 사진도 안 찍고 빈둥거리며 걸어 다니기만 했다더라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눈에 한심해 보이기 그지없는 '빈둥거리며 걸어 다니기만 한'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실제로는 그 공간에 인생을 녹이는 뜻깊은 산책이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육체에 한정되어 감각이 매 순간 외부 세계의 전부인 인간으로서는 어떤 체험이 어떻게 남은 인생에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인터넷에 수두룩한 사진을 찍고 바깥 세계와, 남과 비교하며 얻는 만족감이 아니라 내면이 채워지는 느낌을 선택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몬테네그로에서의 내 일상은, 신기한 것들, 재미있던 공연들, 귀여운 고양이들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소소하게 옷 갈아입고 나가 아내와 손잡고 천천히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었던 익숙하지 않은 골목들과 계단들, 방에 처박혀 글을 쓰면서 느낀 바다의 공기와 햇살들의 형태로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아, 남은 인생동안 두고두고 향을 낼 추억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순간들만큼은 아내와 나의 감정이 이 방을, 이 방에서 보이는 페라스트와 코토르의 풍경들을 가득 채우고 그리하여 겨울의 공기조차 따뜻하게 느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는 한겨울에도 섭씨 2,3도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