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출현한 이래 원자력 카르텔만큼 거대하고 굳건한 조직은 없었다. 몇백 년에 걸쳐 세계의 모든 정부가 연관되고 모든 지도자들이 존재를 알고 있는 조직. 비밀을 파헤치려는 어떤 언론사들의 노력도 실패했고 그럼에도 인류 문명의 지지대로서의 영광은 계속해서 차지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전기를 만들 수 있는 수만 가지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원리에 대한 수많은 학자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카르텔은 물리 법칙을 비웃듯 안전하고 완전한 핵폐기물 처리라는 과제의 실적을 차례차례 홍보하고 있었다.
"오늘의 사고는 156건, 사건은 26건... 별로 특이할 것은 없네. 김주형 씨?"
지영은 의자에 앉아 기사의 통계 차트를 보고 있었다.
"네, 편집장님."
"그대로 인터넷에 올려도 되겠어요."
"그럼 기사 배치도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기사 배치는 신문 리더에 출력하는 배치를 말한다. 종이 신문이 사라지면서 대신 전자책처럼 전자잉크 신문이 탄생했는데, 접히는 형태의 디스플레이 덕분에 종이 신문까지는 아니지만 태블로이드 신문을 읽는 정도의 크기로 신문을 들고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전자 신문은 텍스트의 크기를 키우는 데 휴대폰이나 일반 태블릿보다 훨씬 제한이 없어서 노인들이 좋아하는 옵션이었다. 게다가 그 노인들은 기사의 배치 또한 옛날 종이 신문과 동일한 정도의 균형을 요구했다. 주 소비층의 요구에 부응해야지, 광고를 팔아먹으려면.
주형이 다른 직원들에게 진행 여부를 손짓으로 알리고 컬러와 흑백의 구분을 지시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지영은 입술을 씹었다. 입술만 질근질근 씹은 게 아니라 손톱도 리듬을 타듯 의자의 쿠션을 긁었다.
'아닌데... 뭔가 느낌이 오는데... 뭔가 있는데...'
지영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감 때문이었다. 뭔가 특종이 나올 것 같은 감. 정부에 뭔가 있는 것 같다는 낌새가 있으면 정부 청사 앞에 일단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기다렸고, 어떤 기업의 공시에서 이상한 것이 느껴지면 무조건 그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기했다. 독일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어서 가 보았는데 실제로 EU에서 독일 정부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다수 EU회원국의 의사에 반해 시민 이동 임시제한 조치를 내린 적도 있었다. 지영 자신도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뉴스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걸러내는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자연스럽고 자연스럽지 못한 것의 확실한 구분은 지금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게 지영의 레이다에 걸려들고 있었다.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선가 '삑', '삑', 하며 알람이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 여기서 부자연스러운 것이 뭐지?'
아무 사건도 없으면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무 사고도 없으면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도 않다. 어디서 내 본능이 이렇게 시끄럽게 알람을 울려 대는 것일까? 지영은 다시 주형이 제출한 편집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지영이 기사를 읽으면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맞춤법이 이상한 곳을 찾아내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었다. 부자연스러운 부분. 맞춤법이 틀린 곳도 이쪽이 이상하다, 정도로 말할 뿐 실제로 무슨 맞춤법이 틀렸는지를 지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영이 보기에 부자연스러우면 결국 문장이든 맞춤법이든 뭔가 다시 보아야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곳이 전혀 없었다.
'맞아, 전혀 없다, 뭐지? 왜 이상한 곳이 전혀 없지?'
지영은 다시 국제 뉴스 쪽을 들여다보았다. 빙고! 미국이 너무 조용하다. 지영은 책상 위의 벨을 눌렀다.
"삐이이이이"
지영은 옛날 1800년대에 썼을 법한 호출기를 사다가 사무실에 설치했다. 너무 소리가 튀는 대신 좀 신중하게 누르지 않을까 해서였다. 아랫사람들이야 그 소리를 두려워하겠지만 걸걸한 그 벨소리가 지영에게는 몸으로 일을 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해 주었다.
"네, 편집장님!"
지영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경희가 달려왔다. 경희는 애가 셋이지만 사회에서 애들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버려 두는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방치하는 건 아니고 이것저것 의무라고 생각하는 뒷바라지를 충실히 할 뿐만 아니라 기사 정리 때문에 사무실에서 밤을 새울 때면 경험을 쌓게 해 준다며 아이들을 불러서 분석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늘 아이들을 언론 계열로는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이 도제식이나 마찬가지인 저런 흔치 않은 방식으로 배우고 나면 결국 기자가 되고 싶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영은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경희는 지금도 자기 일로 매우 바빴을 텐데 고맙게도 바로 달려왔다.
"경희 씨, 오늘 보니까 미국에서 특별한 뉴스가 없는데 미국 언론사에서 뭔가 신경 쓰느라 기사를 안 내는 건지 알아봐요."
"언론사가 한둘도 아니고 전부 어디엔가 눈이 팔려서 뉴스를 안 낸다고요? 그럴 수가 있나요?"
"그런 경우는 없었는데 지금은 느낌이 안 좋아요."
"편집장님 느낌이요? 그럼 바로 알아봐야죠."
경희는 인사도 없이 쌩하고 사라졌다. 지영은 그런 경희가 믿음직스러웠다. 지금은 내가 일을 우선으로 하니 경희도 저렇게 일을 하지만 의전을 더 중요시하던 전임자 때는 의전을 책임졌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과 의견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그녀가 늘 부럽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저랬다면 덜 힘들게 올라왔을 텐데.'
상사들과 싸우면서 의견을 관철하고 그 상사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며 승진하던 순간순간들이 기억이 났다. 그 상사들 중의 대다수는 그 싸움을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게임에서 지고 나서 'Game Over'라는 문구와 함께 회사에서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지영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 자체가 업무라고 생각했다. 그 싸움 역시 단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드는 과정에 끼어든 어려움일 뿐이었다. 지영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나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데 실패하면 더 이상 언론사에서 일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지기 싫어서, 이기는 즐거움 때문에 싸우는 사람과 그것이 일을 하는 방식이어서 불도저처럼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뚫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싸움은 결국 둘 중에서 심각하게 임하는 사람의 승리가 되게 되어 있었다. 회사 생활은 결국 게임이 아니었다.
"편집장님! 미국 한 번 보시죠!"
경희가 뛰어오며 말했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지영을 쳐다보았다. 지영의 머릿속 레이더가 울린 알람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가 마침내 나온 것이다.
"뭐예요?"
"미국 국방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경희가 소셜 네트워크의 몇몇 텍스트들을 프린트해서 들고 왔다. 군인들이 배치되고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은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언론사가 움직이지 않는다? 경희가 지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엠바고일 겁니다."
지영은 머리를 굴려 보았다. 미국으로 사람을 보내면 적어도 열두 시간이 걸린다. 미국 특파원에게 연락을 하면 전 신문사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아니다. 왜 내가 연락을 해야 돼? 특파원은 왜 연락을 안 하지? 그럴 리가 없는데...
"경희 씨, 일단 워싱턴에 준구 씨 있죠? 뭐 들은 거 없는지 물어보세요."
"이미 통화했습니다."
"네? 뭐래요?"
"지금 모든 기자들에게 엠바고를 걸었답니다. 모든 기자들 신병확인하고 일일이 전화해서 알게 된 모든 사실에 대해 발설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기로 했대요?"
"어차피 자신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만 눈치챘을 뿐 알아낸 게 없긴 한데 알았다고 해도 거부하면 어차피 구치소로 가게 돼서 차이가 없답니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지금 연락도 닿지 않았을 거고요. 중국 특파원 두 명도 거부했다가 이미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중국 기자들은 본국에서는 거부 같은 거 안 하면서 미국에선 왜 그런대? 어쨌든 그럼 결국 뭐가 있긴 있다는 말이네?"
"확실해요. 하지만 내용은 모르니까..."
"아니, 지금 이런 상태라고 기사를 써 주세요. 1면에요."
"그래도 될까요?"
"뭐 어때요? 미국에서 이상하게 아무 뉴스가 없다는 사실이 엠바고 걸린 건 아니잖아요?"
경희가 바쁘게 자리로 돌아가고 2,30분이 지난 후 다시 주형이 나타났다.
"기사 배치 다 끝났어요. 지금 추가하는 건 왼쪽 사이드면 되겠죠? 어쨌든 1면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니까요."
"응, 맞아. 사이드는 평소에 잘 안 내니까 오히려 눈길을 끌 수 있어."
즉시 신문의 모든 칸이 재조정되었다. 다행히 1면 가운데 기사가 5면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던 덕에 구획 나누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지영의 감으로 뭔가 시그널만 울릴 뿐인데 그 시그널이 전 세계 토픽감이 되는 경우. 지금이 그랬다.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빨간불이 여기저기 들어오기 시작했다. 1면에 새로 넣은 미국 엠바고 추정 기사가 세계 여러 나라 언론사에 인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들 자국의 특파원에게 연락을 취한 결과를 덧붙였다. 모두 동일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은 다른 나라들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인들도 각종 SNS에 추측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포럼에서도 지영의 기사를 인용해서
"대체 무슨 일이길래 다른 나라 기자들까지 겁박하는 거냐?"
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인터넷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지영이 일어서서 말했다.
"오늘 아마 레드콜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대여섯 명이 손을 들었다. 밤새울 수 있는 인원이다. 이렇게 확실한 게 없는데 감으로 밤을 샐 때는 강요할 수 없다. 정작 확실한 게 늦게 나오면 그때 가서 투입할 사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신 퇴근하는 인원이 간단한 먹거리를 사다 놓기로 했다.
"그럼 나머지는 맥도널드, 버거킹, 김밥천국, 뭐든지 부탁해요."
그리고 그 나머지가 잠시 후 햄버거와 맥주 등을 사가지고 들어왔을 때 미국 국무부에서 1시간 30분 후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햄버거를 들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마치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이제 다들 집에 전화하겠지, 퇴근 못한다고.
마침내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 시간이 되었다.
지영은 자리에 등을 푹 기대앉아 데스크톱 모니터의 전체화면으로 국무부 발표를 들었다. 생중계 중인 미국 언론사에서도 자막을 제때 맞는 문장을 내보내지 못하는 걸 보니 제대로 사전 조율이 안 된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엠바고가 아니라 아예 말을 안 한 거 아니야?'
거의 10분 동안 대변인은 미국의 원자력 산업의 역사에 대해 떠들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10분 동안은 전 세계 원자력 산업에 미국이 기여한 것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지영은 손으로는 노트북에 요약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하는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에도 우리의 든든한 데일리 퍼블리시 라이브 스트리밍에는 탄탄한 자막이 적시에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막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메모장에 나름 요약을 하던 지영의 손도 멈추었다.
'뭐라고?'
"미국은, 이제까지 핵폐기물의 완전한 처리는 거짓이었음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핵폐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합니다. 현재 과거 핵폐기물의 위험성은 제로입니다."
'저게 무슨 소리야? 핵폐기물을 완전히 처리할 수 없는데 핵폐기물도 없다고?'
국무부 대변인이 말을 하다 말고 내려가 버렸다. 기자들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드는데도 아랑곳없었다. 잠시 후, 과학진흥위원회 위원장이라는 할아버지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안 그래도 평소에도 왜 저게 대통령 직속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대변인은 마이크를 자신의 키에 맞춘 후 아직 국무부 대변인을 향해 소리를 치고 있는 기자들을 무시하고 말을 시작했다.
"미국은 타임머신을 개발했습니다."
한순간에 기자들의 소리가 멈추었다.
"미국은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을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핵폐기물을 과거로 보냄으로써 안전한 원자력 산업을 이끌었습니다."
아, 골치 아파지겠다. 과학진흥위원회에서 물리학에 대한 설명을 하다니 강제로 집중력을 끌어올릴 시간이다. 지영은 맥주를 한 캔 땄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던 요약을 마저 끝냈다.
"다들 요약하고 있지?"
사무실에 대고 크게 외쳤지만 다들 잘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스트리밍에도 자막이 다시 제때 잘 올라가고 있다. 대체 어떤 뉴스일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지영의 촉은 미친 뉴스가 나올 것 같다고 외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패닉에 빠진 것처럼 맥주만 홀짝거리던 지영이 소리쳤다.
"우리 전자신문 1면 사이드!, 거기 좀 자르고 우리 자막 있는 라이브 동영상 넣어 버려!"
신문에 동영상 넣기. 이건 전자신문의 적은 용량이라는 장점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한때 광고에만 남기고 기사에서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동영상 광고도 조금만 많으면 독자가 줄어들면서 웬만한 전자 신문사에서는 광고에서조차 동영상을 모두 빼버렸는데 이것을 기사에 넣겠다는 건 승부수였다. 이렇게 해 놓고 미국발 기자회견이 김 빠지는 소식으로 끝나 버리면 사람들은 금방 헛된 승부수를 덜 띄우는 신문사로 갈아탈 것이다. 그러나 지영의 감은 이게 맞을 거라고 이마 속에서 주먹으로 쾅쾅 치고 있었다. 지영은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계속해서 큰소리로 지시를 이어갔다.
"그리고 자막, 트래킹 해, 조금도 늦으면 안 돼, 컨펌 놓치지 말고, 통역, 컨버팅, 컨펌 전부 2중, 3중으로 동영상에 붙어! 기사 업데이트는 끝나고 해도 돼! 신문사 메인에도 1면 자리를 동영상으로 바꿔!"
그러고 나서도 과학진흥위원회의 발표는 느릿느릿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히 위원장이 언론이나 정치를 해본 사람이 아니라서인지 극적인 효과도 없고 덜 중요한 내용이라고 빨리 지나가 버리는 부분도 없어서 통역 확인이나 자막 업데이트에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문장 속에서 특종을 잡아내려면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 했다.
"타임머신의 원리는 그냥,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미래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과거에 갔다가 그 시점에서의 미래인 현재로 돌아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과거에 뭔가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과거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로 가면 우리가 도착하는 순간 과거의 그 시점은 변하게 됩니다. 더 이상 그 시점은 우리 과거가 아니고 타임머신의 도착이 엄연히 과거에 일어난 일인 우주에서의 과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무언가를 보낼 수는 있지만 과거에서 뭔가를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점은? 핵폐기물을 줄 수는 있지만 가져올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원자력과 관련한 수많은 골칫거리들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 어느 나라에 그 골칫거리들을 보낸다고 해도 그 시점의 그 나라에서는 현재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다른 미래에 있으니까요."
지영은 생각했다.
'그렇지. 그래서 핵폐기물을 잔뜩 떠안는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그렇지만 핵폐기물을 떠 앉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말은 지영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놀라서 벌떡 일어난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처리가 곤란한 핵폭탄을 터지기 직전에 보낸 적도 있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터졌을 겁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핵폭발의 피해를 입은 과거 시점의 일부 주민들과 정부들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이 모든 것은 윤리적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피해가 그 세계에서는 실제라는 점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 우주입니다. 그러므로 윤리적 차원에서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실제로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사무실에서도 키보드 소리가 멈추었다. 지영은 멍한 상태에서도 동영상에 자막이 잘 뜨는지 확인했다. 아직은 내가 할 게 없네. 내가 이해한 것도 맞는 것 같고. 아니 이건 특종 차원이 아니잖아.
"데일리 퍼블리시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갑자기 지영의 정신이 확 들었다. 뭐? 우리? 우리 질문? 우리가 한 질문이 뭐였지?
"미국 정부가 엠바고를 내린 뉴스가 뭐냐는 기사가 전 세계를 휩쓸었더군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지금 미국 정부는, 아니, 현재의 지구는 미래로부터 타임머신을 통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핵폭발은 없었으나 420만 톤의 핵폐기물이 오늘 센트럴 타임으로 9시 정각에 펜실베이니아 주에 나타났습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곳이 추후 과거로 보낼 핵폐기물 임시 저장소 확장 부지로 선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확장부지로 사용하는 어느 시점 이후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타임머신을 상시 가동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로 핵폐기물을 투하할 때 외에는 계속해서 켜 놓는 것입니다. 미래의 미국에서 동일한 양자 방식의 타임머신을 사용한다면 이곳의 양자 타임머신이 활성화되어 있는 한은 미래에서 연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방어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린 시점에서 왜 오늘 핵폐기물이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타임머신 연결 방어체계가 실행되기 직전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지영은 머릿속으로 스토리를 연결해 보았다. 타임머신을 개발해서 과거로 쓰레기를 버렸는데, 오늘 쓰레기가 미래에서 날아왔고, 이제는 미래에서 지금 우리 시대로는 타임머신으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게 하겠다, 이거구나. 그런데 기자회견은 왜 하는 거지? 타임머신을 개발한 것을 굳이 밝히는 이유가 뭐지?
"타임머신 방어는 사실 오늘 오후 13시부터 실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벌써 세 건의 접속 시도가 확인되었습니다. 동일한 양자장이 불균형을 이루었다는 신호입니다. 양자는 쌍을 이루고 그 쌍이 하나는 과거로 가고, 하나는 나머지 하나의 과거 좌표를 인도하는 역할을 해서 타임머신이 동작하는데 그것이 쌍이 아니라 세 개 이상이 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 불균형으로 인해 타임머신에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벌써 세 번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전에도 누군가 계속해서 이곳에 미래로부터 연결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어차피 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왜 왔는지, 왜 오려고 했는지, 무엇을 보내려고 했던 건지는 더 알아보아야 합니다. 위치는 대한민국 대전, 태국 치앙마이, 독일 뮌헨입니다. 미국에서 발생한 다른 시도는 없습니다. 아마 밝혀내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만, 이러한 모든 노력이 인류 지혜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위원장은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덧붙이고 나서 이제부터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한 기자가 손을 들고 말했다.
"타임머신이 과거로는 갈 수 있지만 미래로는 보내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원래 타임머신은 미래로도 갈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위원장은 질문이 너무 멍청해서 왜 그걸 묻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기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혹시, 전자를 슬라이드로 통과시키는 실험 아시죠? 관찰자가 없으면 가능성의 파동으로 나타나지만 관찰자가 있으면 입자로 나타나는 것 말입니다. 과거라면 이미 정해진 것이니 그중에서 목적지 시간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어떻습니까? 이 우주의 미래는 말입니다, 우주 안에서 우주는 전부이기 때문에 밖이라는 개념이 없고, 그러므로 관찰자라는 것이 밖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주 자체는 미래를 향해 항상 파동 상태인 것이죠. 목적지라는 개념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렵거나 한 게 아니라 그냥 안 되는 겁니다. 이 정도 설명밖에 안 되겠군요."
"혹시 다른 나라에서 연결하려는 시도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낸 게 있나요?"
"확실한 건 최소한 뭘 보내려고 했더라도 규모가 너무 작아서 핵폐기물 같은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접속이 되는지만 시험해 본 것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그 나라들에서 자체 타임머신을 어느 시점에 발명해 내서 사용하려고 접속 가능한 시대를 찾으려고 했을지도요.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원자력 선두 자리를 노린 거겠지요."
"앞으로 핵폐기물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사실은 그동안 우리는 핵폐기물을 1초 전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1초 전은 불가능하고, 시간을 더 거슬러 가면서 버려야겠지요. 점점 전기가 많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같은 시점으로 보내더라도 우리의 현재와는 시간상 거리가 점점 벌어질 테니까요. 어쩌면 태양에 갖다 버리는 게 더 저렴할지도 모릅니다."
"비용으로 보면 태양으로 버리는 게 더 저렴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태양에 버리면 점점 지구의 질량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타임머신으로 과거로 보내면 그 질량만큼 이 에너지의 형태로 남기 때문에 지구의 질량에는 변화가 없게 되지요."
그 이후로는 지영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순수한 물리학 차원의 질문들만 나왔다. 지영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핵폐기물의 완전한 처리라는 게 우리에게 보복할 수 없는 과거로 보내버린 것이었고, 그 공격을 미래로부터 받았으니 우리는 방어를 한다. 그러면서도 과거로는 그대로 보내고.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장외시장! 장외시장!"
"무슨 일이야?"
지영의 정신이 확 들었다. 현석이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장이요! 시장! 저기 파란색!"
분명히 기자회견 때문이다. 독일, 한국, 태국의 주가가 일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독일은 지금 장이 열린 상태여서 직격탄이었고 우리나라도 장외가 저래서야 내일 아침에 장이 열리자마자 거래정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핵폐기물 처리 명목으로 미국으로 보내는 돈이 얼만데... 하지만 미래에 비해 지금은 과거이다. 과거에 미래의 한국에서 타임머신으로 접속을 시도한다는, 그러니까 타임머신의 개발이 완료되었다는 흔적이 또렷하게 남은 셈이다. 그때 가서 미국의 타임머신이 멈추게 되어 한국이나 독일에 있는 타임머신이 그 후속일 가능성도 있다. 반드시 미국을 배신하고 만든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알 수 없는 것이지. 지영은 워싱턴 포스트를 잠깐 띄워 보았다. 붉은 바탕에 하얀 헤드라인이 빛나고 있다. 그 헤드라인은... 지영의 생각과 매우 달랐다. 그 문구는 이랬다.
"독일, 한국, 태국. 자체 독립적인 양자 타임머신일 경우 현재의 미국 타임머신 양자 동일성 기반 방어체제 무방비... 개발 원천 봉쇄 대책 강구해야"
아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