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와 수첩, 글자의 배열

by 루펠 Rup L

키보드를 보면 한번쯤 눌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고 하얀 종이를 보면 무엇이든 써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글을 쓰기 위해' 하얀 화면을 쳐다볼 때나 수첩의 빈 종이를 바라볼 때와는 다른 충동이 일어난다. 의미는 없지만 키보드를 보고 그런 충동이 일어나면 눌러보는 글자들이 있다. 그 글자들을 치는 것이 어쩌다가 습관이 되었지만 어떻게 해서 습관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과정을 알 수 없으니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주의적인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걸 모른다고 해서 답답하거나 하지는 않다. 알게 될 것이라면 언젠가 알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이 아니라면 답답해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일종의 자포자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단순한 미신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어쨌거나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나서 딱히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닐 때, 혹은 생각 없이 키보드를 건드렸을 때 쳐 보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그 경우만의 특수성은 존재하겠지만 특수성이 인정된다는 것은 특수하지 않은 일반화 역시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 보아도 미신적인 요소가 붙을 만 하긴 하다. 수첩에 글을 끄적거릴 때는 보통 애국가를 적어 보는 편이다. 펜을 테스트하거나 종이의 질감을 확인할 때 등도 그런 경우가 많다.
반면 글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날 때가 있다. 글을 쓰려고 하는데 종이가 없다거나, 볼펜이 없다거나. 휴대폰에 간단하게 메모를 하려다가 긴 글이 될 때도 있지만 손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휴대폰을 들면 오히려 글이 처음 생각했던 문장까지만 쓰고 나서 딱 끊겨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에 종이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웬만하면 맞춰주려고 하는 편이다. 그래서 통근용 가방에도 휴대폰으로 글을 쓸 때 사용할 휴대용 키보드와 함께 수첩과 볼펜이 항상 들어 있다.
수첩에 글을 쓰고 나면 한 번씩 시간을 내어 수첩에 쓴 글을 키보드로 옮겨야 하는데 한동안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한바탕 수첩의 글을 베끼면서 이미 옮긴 페이지에 줄을 죽죽 긋는 작업을 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려면 시간을 특별히 내야 하게 되었다. 물론 시간이 가면 언젠가 글을 쓰는 것이 최우선의 취미가 될 것이다. 언제나 인생은 순환하는 법이니까.
요즘은 새 글을 수첩에도 잘 쓰지 않지만 수첩에 있지만 컴퓨터로 옮기지 않은 글도 수두룩하다. 수첩을 한 권 구입한 것을 의외로 일찍 다 써버려서 추가로 여섯 권을 사면서 적어도 세 권은 올해 다 쓸 줄 알았는데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게 맞다. 커피 한 잔 내려놓고 홀짝거리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니 차분해지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난다. 글을 쓰려고 했다가 쓰지 않은 것도 있고, 내용을 적어놓지 않아 내가 탄 여객선이 이상한 곳에 정박하고 모두가 어쩔 줄 몰라하던 장면밖에 기억이 나지 않은 꿈도 있었으며 접시 두 개가 이상한 모양으로 붙어 있는 모양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무엇을 하느라 주말에도 그렇게나 바빴을까.
생활에는 관성이 있어서 글을 쓰려고 하면 글을 쓰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글을 쓸 만한 것들, 글로 남기고 싶은 기분이 떠오르게 된다. 책을 계속해서 읽어야 읽고 싶은 책도 생긴다. 내 삶을 이루는 것들에게 동일한 정도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해 주면 모든 것에 관성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관성을 가질 만큼의 속도감이 있으려면 어쩔 수 없이 내 삶에서 일정 비율 이상을 차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수첩과 볼펜 찾는 곳을 찾아내자마자 일주일 동안 수첩을 거의 70% 가까이 써버렸던 올해 초와 같이 뭔가가 계속 써지는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지금은 키보드가 없어서 쓰지 않는 것도, 수첩이 없어서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이클이 돌아서인지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훨씬 좋은 때이다. 닥치는 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뭔가를 읽어나가는 지금 시기가, 읽고 싶은 책이 있지만 읽기 힘들 것 같아 그냥 포기하는 그런 시기에는 부러울지 모르겠다. 인생은 파도의 연속이고 그 파도는 좋은 일과 나쁜 일만이 아니라 내 시간의 밀도에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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