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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JOE May 10. 2021

어느 고등학생

청소년 시절 저는 죽고 싶다는 말을 말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넘치는 공격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것을 유연하게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스스로를 해치는 방식으로 아픈 행동을 많이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 알리거나,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방식으로 초등생 때부터 꾸준히 자해를 해왔었어요. 스스로와 세상 모두를 증오하기에 택할 수 있었던 방법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아버지와 심하게 말다툼을 했고, 그 장소는 우리 집 옥상이었어요. 한참의 실랑이 끝에 분개한 아버지는 옥상 문을 쾅 닫아버리며 먼저 내려가셨고, 저는 하릴없이 혼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십 수분의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이 흐르고, 내려가기 위해서 옥상 문 손잡이를 돌린 저는 그만 놀라고 말았어요. 글쎄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이 굳게 잠겨져 있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생각이 드셨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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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의 어떤 고등학생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건 틀림없이 뛰어 내려서 죽으라는 뜻이구나.'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고민은 길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난간에 올라가 지상으로 추락할 채비를 마쳤어요. 그 위에서 어떤 감상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 내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있을지 따위의 것이지 않았을까요. 그 뒤는 뻔한 내용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를 들려 드릴 수 있는 이유죠. 내려본 땅은 매우 아득했고 그 즉시 죽음의 공포가 삽시간에 저를 지배했어요.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저에게 호기롭게 뛰어내릴 용기조차도 없단 걸 깨닫고서는 무도 못 벤 채로 난간에서 궁색하게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또 수십 분 후 신경질을 내며 '왜 안 내려오냐'라고 올라오신 아버지 덕분에 상황은 종결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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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어서 그때를 떠올리게 될 때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대상이 저 스스로임에도 그 판단은 깊은 황당함을 느끼게 해요. 상황이 사람의 시야를 얼마나 좁게 만들 수 있는지 뼛속 깊이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입니다. 흔히 동굴 시야라고 하는 그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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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루한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은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이 지금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처럼 이런 시절이 올 테니 희망을 가지라는 시시한 얘기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만 지금 당신의 생각에 너무 확신을 가지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성향을 지닌 당신은 매우 높은 확률로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사람일 거예요. 당신과 같은 상황에서 누구는 남에게 험한 말을 하고, 모든 탓을 전가하며, 심지어 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지우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 고통을 감내하고 계신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당신은 매우 똑똑하고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입니다. 다만 지금 당신이 하는 판단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둘러싼 상황과 주변 환경이 당신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지, 당신이 어리석거나 남들에게 피해만 주는 한심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멍청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에요. 제가 지금부터 당신이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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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해 내담자께 첫 시간에 꼭 드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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