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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빙 May 11. 2021

영화 제인 도 리뷰(결말, 해석)

이름없는 자의 권리는 누가 보장하는가

영화 결말이 포함된 글입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영화를 먼저 봐주세요!



Jane doe, 신원 미상이 갖는 의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를 나타낸다. 이름을 통해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이름으로 자신을 증명하며, 때로는 이름대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름 없는 자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당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영어로 Jane doe는 신원 미상의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는 제목(The autompy of Jane Doe)에 충실하게, 두 부자가 신원 미상인 한 여성의 시체를 부검하면서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에 대해 다가가는 이야기이다. 플롯 자체는 단순하다. 일가족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경찰은 지하실에서 반쯤 묻힌 여성의 시체를 발견한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없고 오히려 외부로 나가려 한 듯한 현장. 단서 없는 사건, 그는 오랫동안 대대로 시체 부검을 해온 주인공 부자에게 신원 미상의 여성의 사인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늦은 아홉 시가 넘는 시간,  몸의 어느 곳 하나 외상이 없는 창백한 여성의 시신 부검이 시작된다.


 영화는 부검이라는 스토리에 맞춰, 인체의 날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멀쩡해 보이는 시체는 매스가 움직일수록, 도려지고 점점 호러 하우스의 마네킹처럼 변모한다. 보는 입장에서는 리얼한 장면에 일순 징그럽다고 느낄만한데도, 시체 부검을 대대로 해온 주인공들은 아무렇지 않고 태연하다. 오히려 관객이 오히려 더 긴장하는 아이러니함. 거기서 관객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잔인하다? 불쌍하다? 징그럽다?

 내게 떠오른 생각은 '비참'이라는 단어였다.


  서양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부검을 사람을 두 번 죽이는 행위라고 한다. 그도 그런 것이 부검을 하면 그이는 더 이상 온전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아니 '사람이었던' 흔적마저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이었던 자가 그 생명이 꺼졌다는 이유로 산산이 해부되어간다. 전신을 검사당하고, 분해된다. 부검이 진행되면 될수록 시신은 '사람이었던 무언가'가 된다. 마치 찢어발겨진 인형처럼. 그렇기에 부검은 대체로 유가족의 동의를 받는다. 고인의 존엄성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고인이 신원 미상이라면?


 Jane Doe는 신원 미상의 인물로, 그녀에게는 그 어떤 존엄과 권리를 지지해줄 사람이 없다. 그 신체는 동의 없이 해체될 뿐이다. 그리고 아마 수십 번, 수백 번 그랬을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는 진실이지만 그녀는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 벌어진, 그 유명한 사일럼 마녀재판의 희생자이다. 무고한 희생자를 마녀로 몰아간 저주와 의식이 오히려 마녀를 만들어내, 제인 도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몇 세기 동안 존재했던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음에도 그녀의 권리를 말해줄 이는 없다. 신원미상인 무연고 시신은 마음대로 다뤄진다. 그녀는 살아생전에는 철저한 약자로 권리를 짓밟혔고, 죽어서는 신원 미상이라는 이름 아래 제 몸이 여기저기 옮겨지고, 버려지고, 찢기는 치욕을 당한다. 약자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으며, 물화된다. 단지 '시신'으로. 오롯이 고통을 느끼고 그 신체는 살아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알려야 한다. 말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영화 속의 '제인 도' 역시 그렇게 행동한다.




존엄성을 지키는 방식, 저주인가 복수인가 처벌인가.


 영화는 초반부에는 별 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만, 부검을 하면 할수록 불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검시를 하면서 뜨게 한 눈은 이런 공포를 더한다. 사후 시간이 지나 혼탁해지는 시신의 눈동자가 관객을 오롯이 응시하여, 마치 언제든지 눈동자가 움직일 것만 같다. 말 그대로 '눈을 떴기' 때문이다. 눈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하면 이때부터 불길한 느낌이 퍼진다.


영화 '제인 도' 공식 트레일러 영상_Youtube


 영화 속에선 라디오 음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육신은 죽은 상태로, 심지어 혀가 잘린 제인이 경고의 의사를 음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검시 단계가 진행될 때마다, 꾸준히 신호를 준다. 외부 검시를 할 때 라디오에서 '사흘간 청명한 날씨가... 아니요.'라는 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해부를 하려고 할 때는 불길한 노이즈와 함께 노래가 흘러나와 그들을 막는다.

 하지만 부자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자 붉은 피가 토하듯 쏟아져 나온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상처를 입은 것 마냥, 붉은 피가 흐른다. 가슴을 열고 피부 조직을 살핀 뒤, 늑골을 부러트려 폐, 심장 등 장기를 차례로 꺼내 살펴본다. 흥미로운 지점은 절단기로 갈비뼈를 우득우득 자를 때의 카메라 시선이다.


 뼈가 잘릴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제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공교롭게도 눈은 멍하니 천장을 향해있고 입은 벌려져 있다. 얼핏 보면 극한의 고통으로 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관객들은 점차 불안해진다. '어... 뭔가 안될 것 같은데...' 스멀스멀 불길한 분위기가 풍긴다. 이상 현상이 점차 발생하고, 시간은 한 밤중으로 향한다. 그리고 세 번째 검시가 시작된다.

 소화기 계통 검시를 하며, 천둥소리는 더욱 크게 울린다. 라디오에서는 경고한다. 현재 돌풍이 몰아치고 있다며 엄청나게 비가 쏟아진다고 속보가 나온다. 불안감을 느낀 아들이 그만두자고 하나, 아버지는 한번 시작한 건 끝을 봐야 한다며 계속한다. 검시는 계속된다. 이제 더 이상 경고는 간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심상치 않은 폭풍이 오고 있습니다. 홍수 경보가 내려졌습니다. 지역 전체에 경보가 내려졌습니다. 여러분 이 폭풍우는 엄청나며, 갇히면 큰일 납니다. (중략) 집에 있다면 외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만은 장담하겠습니다. 당신은 절대 못 나갑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다시 울린다.


우리 엄마가 얘기해주셨어요
어린 소녀는 반드시 알아한다는 걸
모든 악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미워하는 법을 배웠어요
악마가 안에 들어오면 사고가 일어나요
마음이 울적할 때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웃는 얼굴로 햇빛을 받아들여요
웃는 사람은 절대 지지 않아요
우는 사람은  절대 이길 수 없어요
그러니까
웃는 얼굴로 햇빛을 받아들여요
가슴을 열고 햇빛을 받아들여요


 그리고 영화는 발 빠르게 반전된다. 전등이 꺼지고, 부자는 영문을 모르는 이에게 공격당한다, 보관되었던 시신들이 사라져 있고, 시신의 발에 달린 방울 소리가 울린다, 빠져나갈 방법은 모두 막힌 상황. 다른 방법이 없자, 그들은 검시실로 가서 마지막으로 뇌를 열어보며 그제야 그들은 진상에 도달한다.
 


 이 사람은 옛날 사람이 한 짓도, 오늘 우리가 한 짓도 다 느끼고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도 같은 고통을 느끼길 바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를 살려두는 거야. 복수야. 자신을 위한 의식인 거야.
왜 우리예요?
아무 이유 없어. 그저 우리가 이 사람 앞에 나타난 것뿐이지. 이 사람은 아직도 고통받고 있고, 고통받을 거야, 그리고 그때까진.... 끝나지 않을 거야.
당신에게 대항하지 않을게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아들만 살려주세요.

 그러자 응답이라도 하듯 반응이 온다. 아버지의 몸에는 여자가 당한 상처와 흔적이 그대로 옮겨간다. 그 대신 여성의 몸은 점차 회복되고 있다. 눈동자엔 빛이 돌아온다. 심한 고통을 느끼는 아버지의 요구로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다. 이윽고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검시실, 경찰의 목소리에 아들은 달려가서 구해달라 외친다. 그러나 경찰이 예의 그 노래를 부르자 충격을 받게 되고,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환영을 보며 아들은 난간에 떨어져 죽는다.




 결과를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왜 아들까지 죽이는 거지? 아버지가 부탁해서 들어주기로 한 거 아니었나? 저주를 내리는 건가? 마지막의 의미는 뭐지? 하지만 이에 앞서 제인의 행동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선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1) 이미 원한을 지닌 마녀이므로, 모조리 죽인다. 즉 원한이다.

2) 자신에게 고통을 준 상대에게는 그대로 돌려준다. 즉 복수다.


   1번의 사례에 아주 훌륭한 예시가 있다. 바로 유명한 공포영화 '주온'이다. 다 알다시피 주온의 가야코, 토시오 모자는 일단 집에 들어가거나 연관된 사람은 모조리 저주를 하여 죽인다. 설사 들어가지 않아도 운이 없거나 눈에 띄면 끝이다. 집에 들어간 사람, 그 사람의 배우자, 가족, 동료 때로는 같은 장소에 있던 운 나쁜 사람이거나....

  그럼 주온 모자처럼 제인은 악령인 걸까? 주온의 희생자들이 '집에 들어간 사람'인 것처럼, 운이 안 좋게 마주쳐서 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제인을 지나치게 가까이 접한 인물 중인 경찰이 너무 멀쩡하다. 주인공 일가와 가까운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영화를 보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들은 아마 지하실을 파다가 제인도를 발견한 듯 보인다. 이 피해자들을 유심히 보다가 내가 느낀 건, 피해자들이 주로 '두상'을 공통적으로 다쳤다는 점이다. 토미 역시 자신이 부검한 그대로 상처를 입는다.

 이 가설대로라면, 1번보다는 2번 복수가 더 맞아 보인다. 가령 처음 더글라스 일가족들이 지하실을 파다 삽으로 그녀의 시신에 의도치 않은 상처를 냈고 그에 대한 복수로 모두 머리가 다친 것이라면? 그렇다면 제인이 마지막에 오스틴(아들)을 죽인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전까지 토미 혼자 부검을 하고, 공격받는 것 역시 토미 혼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뇌를 여는 건 오스틴이다. 오스틴의 사인 역시 추락사, 두개골 함몰이다. 행한 만큼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고 싶다. 제인의 관점, 즉 시야를 이들 부자가 아닌 제인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여기 이름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존재가 있다. 살아있되 죽은 상태로, 살아있는 사람이 받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는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의사표현을 하지만 결국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한다면? 그렇다면 이건 복수일까?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3)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 즉 합리적 처벌이다.


 복수와 처벌은 다르다. 복수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으로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지만, 처벌은 다르다. 정의나 대의를 위해 행동을 심판하는 관점에 가깝다. 즉 처벌은 복수보다는 합리적이고, 거시적이며 납득 가능한 것이다.




이름 없는 자가 존엄성을 지키는 방식


 제인은 검시를 그만두라고 신호를 보냈다. 고통을 느끼고 있으니 당연하다. 그럼에도 토미와 오스틴은 멈추지 않는다. 물론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검시가 일이니까. 그냥 시체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름 없는 자로 수세기를 고통받았던 제인에게는 이것은 이유가 어찌 되었든 변명에 불과하다. 인간 사회의 권한과 규칙은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다. 즉 이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 행사인 셈이다. 그렇다면 토미의 발언에 행동을 멈춘 이유도 납득 가능하다. 토미는 제인을 행동의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렇기에 이상현상이 멈추고, 토미에게만 고통을 준 것이다. 고통과 생명을 맞바꾸는 거래인 셈이다. 실제로 토미가 고통을 받을수록 제인의 몸은 아주 빠르게 인간처럼 변화한다. 혼탁한 눈동자는 완연한 사람처럼, 빛을 되찾아 간다.

 그러나 토미는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아들에게 죽음을 부탁한다. 아들을 살리는 조건으로 자신이 받은 고통을, 오스틴이 받을 것까지 감내했어야 하는 게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계약은 파기되었다. 사회에서 이름 없는 자로서 고통받던 제인에게, 이런 토미의 행동은 기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처벌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제인에게 작중 내에 살해당한 이는 직간접적으로 제인에게 해를 입힌 사람으로 추정된다.

 토미는 일련의 사건들이, 제인 자기 자신을 위한 의식, 복수라 평가했지만 이는 틀리다. 힘없는 약자로 보호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 고문과 의식의 여파로 죽어서도 고통받으며 살아갔을 이를 생각해보면 이는 오히려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인의 모습이 점차 소생하듯 변화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사람으로서 살아갈 삶에 대한 권리, 즉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는 과정인 것이다. 마지막에 종이 딸랑하고 움직이는 모습은, 전에는 빼앗겼던 인간으로서의 온당한 권리와 존엄을 되찾는 그 자신만의 의식의 소리가 아닐까? 모두가 외면했기에 제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던 건 아닐까? 


누가 약자의 존엄성을 보호해 줄 것인가

 

 관객은 신원 미상의 이 여성을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본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마녀이고, 악령이라고 하기도 하며, 진짜 마녀였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이름 없는 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켜내는 이야기로 보고 싶다.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여파로 인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오롯이 고통을 겪어내며 버티는 삶은 분명 그 자체로 고통이고, 억압이고, 지옥 일터다. 피해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억울한 사람이라 해도, 이 신원 미상의 여성의 삶에게 이 사회와 타인은 철저한 악, 악마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권리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건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는 초자연적인 외침을 통해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통을 준다면, 고통을 돌려주며 공격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처참했던 시신에서 응당 누렸어야 할 인간의 모습으로, 소생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과연 누가 이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회에 의해 철저히 짓밟혀, 스스로 존엄성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 비극적인 투쟁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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